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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위나라 관구검의 환도성 침공로와 동천왕의 파천로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 2010. 6. 21. 07:11

윤여동설 - 위나라 관구검의 환도성 침공로와 동천왕의 파천로 찾기 - 최초주장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1대 동천왕 20년(A.D.246) 조를 보면,

  “가을8월 위(魏)나라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을 보내 1만여 명을 거느리고 현토(玄菟)로 나와서 침입하였다.

  왕이 보․기병 2만으로 비류수(沸流水) 상류에서 맞받아 쳐서 적군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다시 군사를 이끌고 양맥(梁貊) 골짜기에서 싸워 적군을 쳐부수어 또 3천여 명을 죽이고 붙잡았다. 왕이 모든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위나라의 많은 군사가 도리어 우리의 적은 군사만도 못하도다. 관구검은 위나라의 명장이지만 오늘에는 그의 목숨이 나의 손아귀 속에 있도다’하고 곧 철기군 5천을 거느리고 쫓아가서 쳤다.

  관구검이 방형으로 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죽은자가 1만8천여 명이었다.

  왕이 1천여 기병을 거느리고 압록원(鴨綠原)으로 달아났다.

겨울 10월 관구검이 환도성(丸都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는 장군 왕기를 보내어 왕을 추격하므로 왕이 남옥저(南沃沮)로 달아나다가 죽령(竹嶺 , 필자주 : 철령의 오기이다)에 이르니 군사들은 흩어져 거의 다 없어지고 다만 동부(東部) 밀우가 홀로 왕의 옆에 있다가 말하기를 “지금 뒤를 쫓는 적병이 매우 가까이 왔으므로 추격을 벗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가 죽음을 각오하고 적군을 막겠사오니 왕께서는 도망해야 합니다”하고는 결사대를 모집하여 그들과 함께 적에게로 달려가서 힘을 다하여 싸웠다. 왕이 샛길로 탈출하다가 산골짜기에 의거하여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호위하도록 하고는 말하기를 “만약 밀우를 찾아오는 자가 있으면 후히 상을 주겠다”하였더니, 하부(下部) 유옥구가 앞으로 나서며 “제가 가보겠습니다”하고 드디어 전쟁터로 가서 밀우가 땅바닥에 쓰러진 것을 발견하고 곧 업어왔다. 왕이 밀우를 자기 다리에 눕혔더니 한참 지나서야 소생하였다. 왕이 다시 샛길로 이리저리 돌아서 남옥저에 이르렀으나 위나라 군사가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왕이 계책이 궁하고 형세가 곤란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동부(東部)사람 뉴유가 나와서 말하기를 “형세가 이처럼 매우 위급한 때에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아오니 청컨대 음식을 갖추어 가지고 위나라 군사에게로 가서 그들을 먹이는 체 하다가 기회를 엿보아 적장을 찔러 죽이려 합니다. 만일 저의 계책이 성공하면 왕께서는 분발하여 적들을 치면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니 왕이 “좋다”하였다. 

  뉴유가 위나라 진중에 들어가서 거짓으로 항복하고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짓고 바닷가까지 도망하여 왔으나 몸둘 곳이 없게 되어 장차 진앞에 나와 항복함으로써 장군께 목숨을 바치려 하옵는 바 우선 저를 보내어 변변치 못하나마 음식을 갖추어 군사들에게 대접하도록 하였습니다”하니 위나라 장수가 이 말을 듣고 왕의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이때 뉴유가 음식 그릇에 칼을 감추어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서 칼을 뽑아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으니 위나라 군사가 곧 혼란에 빠졌다. 왕이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급히 치니 위나라 군사들이 혼란하여 미쳐 군진을 정돈하지 못하고 드디어 낙랑으로부터 철수하였다.

  왕이 귀국하여 공로를 평가함에 있어 밀우와 뉴유를 제1로 하였다.

  밀우에게는 거곡과 청목곡을 주고, 옥구에게는 압록과 두눌하원을 주어 식읍으로 삼게 하고, 뉴유에게는 구사자로 추증하고, 뉴유의 아들 다우는 대사자를 삼았다.    

  이 전쟁 때에 위나라 장수가 숙신(肅愼) 남쪽 경계에 이르러 기념비를 세우고, 또한 환도산에 이르러 불내성(不耐城)에 공을 새겨놓고 돌아갔다.

  처음에 득래가 왕에게 중국을 침략하고 배반하는 것을 하지 말 것을 여러 번 간하였으나, 왕이 그 말에 따르지 않았으므로 득래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 땅에 쑥대가 나는 것을 곧 보게될 것이다’하고는 굶어 죽었다.

  관구검이 모든 군사들에게 명하여 그의 묘를 헐지 못하게 하고, 나무도 베지 못하게 하였으며 그의 처자들을 찾아서 놓아주었다.

  [괄지지에는, ‘불내성은 곧 국내성이니 돌을 쌓아 만들었다고 하였은즉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접한 것이다’ 하였고, 양서에는, ‘사마의를 시켜 공손연을 치니 왕이 장수를 보내어 서안평을 습격하였고, 관구검이 침입하여 왔다’고 하였으므로 통감에 득래가 왕에게 간한 것이 위궁왕 때의 일이라고 한 것은 그릇된 것이다]

 

  북사 고구려전에는 이때의 상황을,

  “정시 5년(A.D.244) 유주자사 관구검이 장수와 1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현토를 나와 위궁(동천왕)을 토벌하면서 비류에서 크게 싸웠는데, 위궁이 패하여 달아나자 관구검이 추격하여 정현(頳峴)에 이르러 수레를 말이 끌게 하고 환도산에 올라 그 도성을 도륙 하였다. 위궁(동천왕)은 홀로 장수와 그 처자만을 데리고 멀리 도망하였다.

  정시 6년(A.D.245) 관구검이 다시 토벌하니 위궁은 가벼운 차림으로 장수와 여러 대신들만 거느리고 옥저로 달아났다.

  관구검은 장군 왕기로 하여금 그를 추격하도록 하여 옥저를 지나 1천여 리를 쫓아 숙신의 남쪽에 이르러 바위에 공적을 새기고 또 환도산에도 불내성(不耐城)이라 새기고 돌아갔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삼국사기의 “환도산에 이르러 불내성에 공을 새기고 돌아갔다”는 기록과는 약간 다르다.

 

♣ 삼국지 부여 전에는, “정시 중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토벌하려 할 때 현토태수 왕기를 부여에 파견했었는데, 위거는 대가를 보내어 교외에서 맞이하게 하고 군량을 제공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하기 전에 동부여와 미리 접촉이 있어 동부여가 군량을 제공하기로 하였고, 왕기는 현토군의 태수였다는 것을 알 게 한다.

 

  삼국지 동옥저 전에는,

  “관구검이 고구려를 토벌할 때 고구려의 왕 궁(필자주 : 위궁의 오기로서 동천왕을 말하는 것이다)이 옥저로 달아났으므로 (관구검이) 군대를 진격시켜 공격하고 옥저의 읍락을 모두 파괴하고 3천여 명의 목을 베거나 포로로 잡으니 궁(위궁: 동천왕)이 북옥저로 달아났다.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라고도 하는데, 남옥저와는 8백여리 떨어져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삼국사기의 기록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즉 삼국사기는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한 때를 서기 246년 8월로 기록하고 있으나 북사는 244년에 관구검의 침공이 있었고, 무려 2년여에 걸친 전쟁으로 기록하고 있고

  또 삼국사기는 동천왕이 남옥저까지 도망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지에는 동천왕이 북옥저까지 도망쳤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사실 이때 동천왕은 철령을 넘어 남옥저에 도착했고, 다시 북쪽으로 향하여 동옥저를 지나 태백산 북쪽,  숙신(말갈) 남쪽의 북옥저까지 도망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