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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송막(松漠)"의 위치를 밝힌다 - 최초공개

윤여동 2010. 7. 5. 00:49

윤여동설 - “송막(松漠)”의 위치를 밝힌다 - 최초공개

 

 

 

 

 

   역사 연구를 하다보면 “송막(松漠)” 또는 “송막지간(松漠之間)”이라는 지명이 자주 언급된다.

  특히 거란의 역사를 보면 어김없이 “송막지간(松漠之間)”이 언급되고, 고구려가 멸망한 직후인 서기 696년에 거란인 송막도독 이진충과 귀성주자사 손만영이 영주도독 조문홰를 죽이고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한 기록도 보인다. 

  또 남송의 홍호가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휘종과 흠종의 송환을 위해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어 냉산(冷山)이라는 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돌아와서 송막기문(松漠記聞)이라는 견문록을 써 송막이라는 지명이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는데, 그 송막 또는 송막지간이라는 곳이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위서(魏書) 권100 열전 제88 거란전(契丹傳)을 보면,  

  “거란국은 고막해의 동쪽에 있으며 종은 다르지만 같은 부류이어서 (나란히 모용황에게 격파당하고) 송막지간(松漠之間)으로 숨어들었다.

  등국년간(북위 도무제(道武帝)의 연호 A.D.386~396)에, 북위군이 거란을 대파하자 고막해와 더불어 달아나 나누어 살았다.

  수십년이 지나자 점점 번성하여 부락을 이루어 화룡(和龍)의 북방 수백리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대다수는 노략질하는 도적이 되었다.

  진군(真君)(북위 태무제(太武帝)의 연호 태평진군 A.D.440~450)이래로, 조회를 와서 해마다 명마를 조공으로 바쳤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거란족이 자리 잡고 살았던 곳이 송막지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북사 권94 열전 제82 거란국 조에도,

  “거란국은 고막해의 동쪽에 있으며, 고막해와 종은 다르나 같은 부류이다.

  나란히 모용황에게 격파당하고 송막지간(松漠之間)으로 숨어들었다.

  등국년간에 북위에게 대파 당하자 달아나 흩어졌는데 고막해와 함께 나누어 살았다.

  수십 년이 지나자 점점 번성하여 부락을 이루어 화룡(和龍)의 북쪽 수 백리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노략질하는 도적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위서와 거의 동일하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도 이 “송막(松漠)”이라는 곳이 어디를 말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거란족의 중심지를 정확히 밝히지 못해 내몽골 파림좌기를 요 상경임황부라 하는 어쩌구니 없는 비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 내몽골 파림좌기는 발해의 상경용천부였다.

 

  거란국지에 붙여져 있는 거란지리지도(契丹地理之圖)보면,

  황하가 남쪽으로 흐르는 굴곡지점의 북쪽인 지금의 내몽골 지역에 “송림수천리(松林數千里)”라고 표기해 놓고 있다. 당시 그곳에 소나무 숲이 수천리 이어져 있었다는 의미일 것인데, 위치상 지금의 대청산맥, 음산산맥, 낭산산맥으로 이어지는 수천리 지역을 말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그 동쪽에는 상경과 황룡부가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요 태조 야율아보기가 죽자 능(조릉)을 조성하고 조주천성군절도사를 설치하고 능침을 수호하도록 하였다고 전하는 조주(祖州)의 위치가 요나라의 상경과 송림수천리 사이에 그려져 있고, 조주의 남쪽에 고북구(古北口)와 거용관(居庸關)이 표기되어 있다.

  원래의 고북구나 거용관이 산서성과 내몽골의 경계를 가르며 지나는 장성의 관문이었음을 알 수 있으니 지금 북경 북쪽의 고북구와 거용관은 후대인 명, 청대에 이르러서야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위서나 북사의 기록을 보면 거란족이 전연의 모용황에게 격파당하고 송막지간으로 숨어들어 갔고, 세월이 흘러 화룡 북방 수백리를 차지하고 살았다고 했으므로 송막이란  송(松)과 막(漠)의 사이에 위치한 지역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송(松)”은 무엇이고, 막(漠)은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송(松)은 글자그대로 소나무를 의미하는 것이니 송림(소나무숲)이 수천리 이어져 있었다는 송림을 말하는 것이고, 막(漠)은 사막(沙漠)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화룡 북쪽 수백리가 거란족이 자리 잡고 살았던 곳이라고 했으므로 결국 지금의 대청산맥(大靑山脈)과 내몽골 혼선달극사막(渾善達克沙漠) 사이 지역이 “송막지간(松漠之間)”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지금의 내몽골 오란찰포로부터 그 북쪽으로 찰합이우익후기, 상도, 소니특우기 부근이라 할 수 있고, 그 부근 지역을 통칭할 때 송막 또는 송막지간이라 불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곳은 아주 먼 옛날부터 거란족이 자리 잡고 살았던 터전이었으므로 당나라에서는 그곳에 송막도독부를 설치하고 거란족을 통치하기 위하여 귀부한 거란족인 이진충을 그곳 송막도독으로 임명했는데, 이진충이 마음이 바뀌어 당나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거란족의 나라를 세우려 하다가 실패했던 것이고, 그로부터 220년이 지나서야 결국 야율아보기가 요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그리고 거란은 고구려때부터 접촉기록이 나타나고, 요나라로 발전해서는 고려의 상국 노릇까지도 하게 되는데, 이 거란은 고구려와 고려의 서쪽 또는 서북쪽 국경을 맞대고 있던 나라였다.

  그런데 거란지리지도를 보면 지도의 오른쪽에 여진, 장백산, 발해, 말갈, 고려, 백제, 신라계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지금의 당산, 진황도,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말도 안 되는 엉터리지도라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그 사람이 우리 고대 역사의 현장이 지금의 어디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북경(필자주 : 고대의 요동군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부근 즉 난하를 중심으로 하는 그 부근이 실제로 옛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땅이었고 고려 땅이었기 때문이다.

  거란국지를 만들 때 그들은 지금의 난하 부근이 우리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과 가야의 옛 땅이었음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우리의 고조선이나 삼한, 삼국, 고려가 한반도에서 건국되고 멸망한 것으로 믿고 있는 멍청한 역사학자들이 많이 있으니 이를 어찌해야 할까?

  이로써 진짜 송막의 위치를 찾은 것이니 앞으로 사서에 송막이나 송막지간이 언급되더라도 헷갈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