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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려 남경(南京)의 면악(面嶽)을 찾았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19. 8. 25. 23:44

윤여동설 - 고려 남경(南京)의 면악(面嶽)을 찾았다 - 최초주장

 

 

  고려는 개국초기에는 도읍인 개경(開京)을 중경이라 하고, 옛 고구려의 도읍 평양을 서경(西京)이라 했으며, 옛 신라의 도읍 금성을 동경(東京)이라 했다. 그러다가 동경을 주(경주)로 격하시키게 되어 중경과 서경 만이 남게 되자 후일에 이르러 새로이 남경(南京)을 건설하게 된다.

  그런데 고려는 한반도가 아닌 북경 동쪽의 대륙이 중심 강역이었고, 고려의 도읍 개경(開京)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관성(寬城 : 관성만족자치현)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고려의 남경은 지금 하북성 관성의 남쪽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고려 숙종 원년(A.D.1096) 8월에 이르자 위위승 동정 김위제가 글을 올려 남경(南京)으로 도읍을 옮기기를 청하게 된다. 그리고는 남경으로 도읍을 옮겨야 하는 당위성을, "도선기(道詵記)에 이르기를 '고려국에 도읍할 곳이 세 곳 있으니 송악(松岳)이 중경이 되고, 목멱양(木覓壤)이 남경이 되며, 평양이 서경이 되는데, 11, 12, 정월, 2월은 중경에 머물고, 3, 4, 5, 6월은 남경에 머물며, 7, 8, 9, 10월은 서경에 머물면 36국이 와서 조회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개국한 뒤 160여 년에 목멱양에 도읍한다' 했는데, 신은 지금이 바로 새 서울에 순주할 시기라고 여깁니다.

  지금 나라에 중경(개경)과 서경은 있으나 남경이 없으니 삼각산 남쪽 목멱산 북쪽 평지에 도성을 건설하고 때때로 순주 하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하게 된다.

  그리하여 숙종 4(A.D.1099) 9월에 이르러 왕이 왕비와 원자를 데리고 양주에 도착해 도읍할 땅을 둘러보게 되고, 숙종 6(A.D.1101) 9월에는 남경 개창도감을 설치하고 문하시랑평장사 최사추, 어사대부 임의, 지주사 윤관 등에게 명하여 돕도록 한다.

  그런데 10월에 최사추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노원역, 해촌, 용산 등 여러 곳에 나아가서 산수를 살펴보았으나 도성을 건설하기에 합당하지 않았으며, 오직 삼각산 면악(面嶽)의 남쪽은 산형과 수세가 옛 문서와 부합되니 주산줄기의 중심 큰 맥에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지형에 따라서 도성을 건설하기를 청합니다"하게 된다.

 

 

                                [면악(面嶽)이란 사람 얼굴모양으로 생긴 봉우리라는 의미이다]

 

 

 그러자 숙종 7(A.D.1102) 3월에 이르러 중서문하에서 아뢰기를 "새로 남경을 건설하려면 반드시 땅을 넓게 차지하게 되어 백성들이 토지를 많이 빼앗기게 될 것이니 산을 따라서 지세대로 하시거나 혹은 물을 한계로 하여 지형을 정하여 먼저 안으로는 산수의 형세를 따라 동쪽으로는 대봉(大峰)까지, 남쪽으로는 사리(沙里)까지, 서쪽으로는 기봉(岐峰)까지, 북쪽으로는 면악(面嶽)까지를 경계로 하기를 청합니다"하게 되어 그렇게 하기로 최종 결정하고 궁궐 건축을 시작하게 된다.

  따라서 면악(面嶽)을 찾으면 고려 남경 궁궐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고려의 남경은 동쪽으로는 대봉까지, 서쪽으로는 기봉까지, 남쪽으로는 사리까지, 북쪽으로는 면악까지를 경계로 하였고, 궁궐은 면악의 남쪽에 임좌병향으로 지었다고 하였다]

 

[고려 남경의 위치]

                                                                           면악

 

 

 

                                      기봉                                남경                              대봉

 

 

 

                                                                            사리

 

 

  그로부터 약 2년이 지난 숙종 9(A.D.1104) 4월에 이르러 드디어 남경의 궁궐이 완성되어 7월에 왕이 남경의 궁궐을 둘러보기도 하나 실제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지는 않는데, 우리는 이때 건설된 고려 남경의 위치를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고려 인종 6(A.D.1128) 8월에 이르러 또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상경(개경)이 이미 쇠하여 궁궐이 다 타서 남은 것이 없고, 서경에는 왕기가 있으니 마땅히 임금께서 옮겨가서 상경으로 삼아야 된다." 하였고, 묘청 등이 인종에게 아뢰기를, "신 등이 서경 임원역(林原驛, 필자주 : 평양부 북쪽 30)의 지세를 살펴보니 이것이 소위 풍수가들이 말하는 대화세(大花勢)입니다. 만약 여기에 궁궐을 지어서 거처하면 천하를 병합할 수 있으며, 금나라가 폐백을 가지고 와 스스로 항복할 것이며, 36국이 모두 신하가 될 것입니다" 하였으므로 바로 공사에 들어가 다음해 정월 서경에 새 궁궐이 완성되고, 2월에 왕이 직접 서경의 새 궁궐을 둘러보게 되는데, 고려는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지 못했고, 결국 묘청의 난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고구려의 평양성(고려 서경)은 지금의 북한 평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승덕시를 말하는 것이고, 신라의 금성(고려 동경)은 요녕성 금주(錦州)이며, 백제의 도읍 한성(북한성)은 하북성 도산 남쪽 초영자진(肖營子鎭) 부근이었다. 따라서 그 고구려 땅과 백제 땅 그리고 신라 땅을 차지한 고려는 당연히 옛 삼국 땅에 위치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의 남경(南京)은 지금의 어디에 건설했던 것일까?

  고려의 도읍 개경은 지금 북경 동쪽 방향인 난하 동쪽 하북성 관성(寬城)에 위치하고 있었고, 서경은 관성현의 서북쪽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承德市)였다. 따라서 고려는 개경(현 하북성 관성)의 남쪽 멀지 않은 곳에 남경을 설치했을 것이다.

  처음에 김위제는 남경 천도를 주청하면서, 그 위치를 북쪽으로는 감악, 남쪽으로는 관악, 동쪽으로는 양주 남행산, 서쪽으로는 수주 북악이 둘러싸고 있는 그 가운데를 추천했으나, 최사추, 임의, 윤관 등이 직접 가서 그 부근의 지형을 실사해 보고는 결국 북으로는 면악, 남으로는 사리, 동쪽으로는 대봉, 서쪽으로는 기봉이 있는 그 가운데 땅에 남경을 건설하게 되는데, 고려사 열전 김위제 전을 보면 김위제는 처음에 남경으로의 도읍 이전을 건의하면서 풍수 상 한수를 건너서는 안 된다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때 고려에서는 도읍인 개경에서 볼 때 한수(漢水)를 건너지는 않은 곳에 남경을 건설했을 것이다. 한수(漢水)란 지금 한반도 서울의 한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진황도의 도산(都山) 남쪽 사하(沙河)를 말하는 것이므로 고려의 남경은 도산남쪽, 사하 동쪽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의 진황도 청룡현 초영자진(肖營子鎭) 부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