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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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대의 두만강(豆滿江)은 지금의 내몽골 적봉의 음하(陰河)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대의 두만강(豆滿江)은 지금의 내몽골 적봉의 음하(陰河) - 최초주장 두만강(豆滿江)은 백두산(白頭山)에서 발원하여 동쪽 방향으로 흐른다고 하였다. 그런데 옛 태백산(백두산, 장백산)으로 밝혀진 지금의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흐르며 강을 이루어 내몽골 적봉에 이르는 강이 지금의 음하(陰河)인데, 바로 이 강이 고대의 두만강(豆滿江)으로 비정되는 강이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함경도 회령도호부 산천 조를 보면, “백두산(白頭山)이 곧 장백산(長白山)이다. 회령도호부의 서쪽으로 7.8일 걸리는 거리에 있다. 산이 3층으로 되어 있는데, 높이가 2백리요, 가로는 천리에 뻗쳐있다. 그 꼭대기에 못이 있는데, 둘레가 80리이다. 남쪽으로 흐르는 것은 압록강(鴨綠江), 북쪽으로 ..

카테고리 없음 2020.08.16

윤여동설 - 백제 왕들의 시호에 붙인 "근(近)"자의 비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 왕들의 시호에 붙인 "근(近)"자의 비밀 - 최초주장 [본 역사천재들의 모임 블로그 “근초고왕을 알면 백제가 보인다(3)(2008.1.31등록)”에 게시되어 있던 글을 별도로 떼어내어 다시 올리는데, 이는 대륙백제와 반도백제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백제의 왕 중에 시호에 "근(近)"자를 붙인 왕은 세 명인데, 근초고왕, 근구수왕, 근개루왕(개로왕)이 바로 이들이다. 13대 근초고왕은 5대 초고왕의 시호에 근자를 붙인 것이고, 14대 근구수왕은 6대 구수왕의 시호에 근자를 붙였으며, 21대 근개루왕(개로왕)은 4대 개루왕의 시호에 근자를 붙여 시호로 정한 것인데, 우리는 지금까지 이들이 왜 선왕의 시호에 근자를 붙여 시호로 정하게 되었는지 그 확실한 이유를 ..

카테고리 없음 2020.08.07

윤여동설 - 백제 22첨로(檐魯)에 대한 새로운 가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 22첨로(檐魯)에 대한 새로운 가설 - 최초주장 양서 백제전을 보면, "號所治城曰固麻 謂邑曰檐魯 如中國之言郡縣也 其國有二十二檐魯 皆以子弟宗族分據之(치성을 고마라 부르고, 읍을 첨로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과 같은 말이다. 그 나라에는 22첨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와 종족에게 나누어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남사 백제전에는, "號所都城曰固麻 謂邑曰檐魯 如中國之言郡縣也 其國土有二十二檐魯 皆以子弟宗族分據之(도성을 고마(固麻)라 부르고, 읍을 첨로(檐魯)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과 같은 말이다. 그 나라 땅에는 22첨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와 종족들에게 나누어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양직공도 백제국사조에도, "所治城曰固麻 謂邑曰檐魯 於中國郡縣 有二十二檐魯(필자주 :..

카테고리 없음 2020.08.01

윤여동설 – 고려왕릉 조성지 찾아보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려왕릉 조성지 찾아보기 - 최초주장 [고려의 도읍 개경이었던 하북성 관성현의 좌표는 동경118도29분22초, 북위40도37분09초이다] 한반도에 고려는 없었고, 황해도 개성은 고려의 도읍 개경이 아니다. 고려는 등주, 래주, 빈주, 체주와 마주 바라보이는 발해 북쪽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고, 도읍 개경은 하북성 관성현(관성만족자치현)이었다. 따라서 고려왕릉들은 개경(開京)이었던 지금의 하북성 관성현(寬城縣) 부근에서 찾아야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개성부 하를 보면, 고려 세조릉 : 능호는 창릉(昌陵)이니 예성강 위에 있는 영안성(永安城)에 있다. 태조릉 : 능호는 현릉(顯陵)이니 송악산 서쪽에 있는 파지동(巴只洞) 남쪽에 있다. 혜종릉 : 능호는 순릉(順陵)이니 탄현문 밖 경덕사 북쪽에 있는..

카테고리 없음 2020.07.26

윤여동설 – 개경 선죽교(善竹橋)는 좌견리(坐犬里) 북쪽에 위치했었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개경 선죽교(善竹橋)는 좌견리(坐犬里) 북쪽에 위치했었다 - 최초공개 [개가 앉아 있는 형상 확대 : 하북성 관성현 폭하 남쪽] 신증동국여지승람 개성부 상 교량 조를 보면 “선죽교(善竹橋)는 좌견리(坐犬里) 북쪽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형이 마치 개가 앉아 있는 것처럼 생겼으므로 동네 이름을 좌견리(坐犬里)라고 불렀을 것이고, 그 좌견리의 북쪽에 선죽교가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위 그림은 필자가 하북성 승덕시 관성현(관성만족자치현)에서 찾아낸 “개가 앉아 있는 형상의 지형”이고, 이곳 관성현(寬城縣)은 필자가 일찍이 고려의 도읍 개경(開京)으로 비정한 곳이다. 따라서 진짜 선죽교(善竹橋)는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관성현을 지나는 폭하(瀑河)를 건너는 다리였던 것이다. [하북성 승덕시 관..

카테고리 없음 2020.07.11

윤여동설 – 북부여 천제 해모수(解慕漱)의 능과 졸본부여 건국시조 동명왕(東明王)의 능은 지금의 어디에 조성했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북부여 천제 해모수(解慕漱)의 능과 졸본부여 건국시조 동명왕(東明王)의 능은 지금의 어디에 조성했을까? - 최초주장 북부여 건국시조 해모수 천제의 능 조성지에 대하여, 범장의 북부여기(상)시조 단군 해모수 조를 보면, “이 해(B.C.195) 겨울 단제께서 붕어하시어 웅심산(熊心山) 동쪽 기슭에 장사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북부여의 건국시조 해모수 천제의 능은 당시 북부여의 도읍이었던 북부여성(필자주 :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부근에 조성했던 것이 아니라, 해모수 천제의 고향이었던 웅심산에 조성했음을 알 수 있는데, 웅심산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밀운수고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서 해모수가 처음 군사를 일으키고 왕위에 오른 곳이다. 따라서 해모수의 능은 옛 압록강이었던 지금의 밀운수고 ..

카테고리 없음 2020.07.05

윤여동설 – 고구려 왕릉 조성지 고국(故國)에 대한 새로운 가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 왕릉 조성지 고국(故國)에 대한 새로운 가설 - 최초주장     고대 왕조시대에 왕릉은 당시의 도읍 부근에 조성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필자도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왔고, 따라서 고구려의 왕릉들도 당시의 도읍 부근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생각하여 시대에 따라 변화된 당시 고구려의 도읍 부근에서 해당 왕릉들을 찾으려고 하였다.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홀본)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后城鎭)이고,   국내성은 지금의 북경시 연경구 영녕진(永寧鎭)이며,   고구려의 환도성(丸都城), 안시성(安市城)은 지금의 북경 북쪽 회유 발해진(渤海鎭)이고,   고구려의 평양성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으로 밝혀졌다.    그리..

카테고리 없음 2020.06.28

윤여동설 - 궁예의 도읍지 철원(鐵原) 북쪽 풍천원(楓川原)과 피살지 부양(斧壤)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궁예의 도읍지 철원(鐵原) 북쪽 풍천원(楓川原)과 피살지 부양(斧壤)의 위치 - 최초공개       삼국사기 궁예열전을 보면, 궁예는 철원(鐵原)에 도읍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하였고, 강역도 상당히 넓었었으나 폭정을 일삼다가 왕건과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반정을 일으키자, 미복으로 갈아입고 산 속으로 들어갔으나, 얼마 안 되어 부양(斧壤, 필자주 : 부양(斧壤)이란 그곳의 지형이 도끼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으로 생각된다) 백성들에게 잡혀 살해당하였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원도 철원도호부 고적 조를 보면,    “풍천원(楓川原)은 궁예가 도읍했던 곳으로서 철원도호부의 북쪽 27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같은 책 평강현(平康縣) 건치연..

카테고리 없음 2020.06.22

윤여동설 - 전연 모용황의 고구려 환도성 침공로 “북도평활(北道平闊) 남도험협(南道險狹)”은 남과 북이 바뀌어 잘못 기록되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전연 모용황의 고구려 환도성 침공로 “북도평활(北道平闊) 남도험협(南道險狹)”은 남과 북이 바뀌어 잘못 기록되었다 - 최초주장 [고구려 목저성(木底城)으로 추정되는 지금 관청수고 서쪽의 진변성(鎭邊城)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6대 고국원왕 12년(A.D.342) 조를 보면, “봄2월 환도성(丸都城)을 보수하고 또 국내성(國內城)을 쌓았다. 가을8월 왕이 환도성으로 옮겨왔다. 겨울10월 연나라(전연) 임금 황(모용황)이 용성(龍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입위장군 한(모용한)이 황(모용황)에게 청하기를, “고구려를 먼저 빼앗은 다음 우문을 쳐부수어야만 중원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고구려로 가는 길에는 두 길이 있는데, 북쪽 길은 평탄하고 넓으며(北道平闊), 남쪽 길은 험하고 좁았다..

카테고리 없음 2020.06.15

윤여동설 - 고구려가 점점 동쪽의 패수 옆으로 옮겼다는 삼국사기 기록의 진실여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가 점점 동쪽의 패수 옆으로 옮겼다는 삼국사기 기록의 진실여부 - 최초주장 삼국사기 권제37 잡지제6 지리4 고구려편을 보면, “고구려가 처음에는 중국 북쪽 땅에서 살았으나 점점 동쪽의 패수 옆으로 옮겼다(高句麗始居中國北地 則漸東遷于浿水之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역사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 기록의 진실여부를 놓고 논란이 많다. 반도사관론자들은 고구려의 도읍이전이 한반도 북쪽의 환인으로부터 집안을 거쳐 남쪽의 북한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으므로 점점 남쪽으로 옮겼다고 기록했어야 옳았는데, 점남천우(漸南遷于)를 점동천우(漸東遷于)로 잘못 기록했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 삼국사기 기록이 매우 정확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북경(北京)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현토..

카테고리 없음 2020.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