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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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시사 – 윤미향 사태를 보며 병자호란 때의 환향녀를 떠올린다

윤여동시사 – 윤미향 사태를 보며 병자호란 때의 환향녀를 떠올린다 일본군 종군위안부 출신 할머니가 윤미향을 비판하며 벌어진 정의기억연대 사태가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있는데, 필자는 이러한 사태를 보면서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환향녀가 생각났다. 나라가 힘이 약하여 청나라에 짓밟혀 왕은 청 태종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해야 했고, 여인들은 포로로 잡혀가야 했다. 만리타향에서 온갖 수모를 겪으며 고생고생 하다가 모진 목숨 끊지 못하고, 고국이라고 돌아왔더니 환향녀라고 멸시하며 손가락질 해대고, 가족들마저도 집에 들이지도 않았고, 양반들은 자결을 강요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오갈 데가 없어진 환향녀들은 강물에 몸을 던지거나 목을 맬 수밖에 없었다. 또한 힘이 약하여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

카테고리 없음 2020.06.02

윤여동설 - 고구려 강역 서쪽변경의 신성(新城)은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선화고성(宣化古城)이 확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 강역 서쪽변경의 신성(新城)은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선화고성(宣化古城)이 확실 - 최초공개 우리 고대역사에서 아직까지 그 위치를 확실하게 비정하지 못하고 있는 곳 중의 하나가 고구려 “신성(新城)”이다. 고구려의 동북쪽이라고도 하고, 북쪽이라고도 하고, 서쪽이라고도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신성(新城)은 고구려 13대 서천왕(재위 : 270-292) 대에 이미 축성되어 있던 성이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서천왕은 276년 4월에 신성으로 가서 무려 4개월이나 머무르며 사냥을 하기도 했고, 또 288년에는 4월부터 11월까지 무려 7개월간이나 그곳 신성에 머무르다가 평양성으로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성은 왕이 수개월을 머무르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을 정도로..

카테고리 없음 2020.05.31

윤여동설 – 신라 천경림(天鏡林)과 흥륜사(興輪寺)의 진짜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신라 천경림(天鏡林)과 흥륜사(興輪寺)의 진짜위치 - 최초공개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의 금주고탑 현재모습] 흥륜사(興輪寺)는 천경림(天鏡林)에 지어진 신라 최초의 절이었다.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에 불교의 씨앗을 뿌린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 흥법 제3 아도기라 조를 보면, “신라의 서울 안에 일곱 곳의 절터(七處伽藍之墟)가 있으니, 하나는 금교(金橋) 동쪽의 천경림(天鏡林)이요, [지금의 흥륜사(興輪寺)이다. 금교(金橋)는 서천교(西川橋)로서 속명에는 송교(松橋 : 솔다리)이다. 이 절은 아도화상이 처음 그 터를 잡았는데, 중간에 폐지되었다가 법흥왕 정미년(A.D.527)에 이르러 공사를 시작하여 을묘년(A.D.535)에 크게 공사를 일으키고 진흥왕 때에 이루어졌다] (참..

카테고리 없음 2020.05.24

윤여동설 - 신라 김유신은 한반도 경주가 아니라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서쪽 북보타산(北普陀山)에 묻혔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신라 김유신은 한반도 경주가 아니라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서쪽 북보타산(北普陀山)에 묻혔다 - 최초주장 [신라 서악이었던 요녕성 금주시 서쪽에 위치한 지금의 북보타산] 삼국유사 김유신 조를 보면, “김씨 집안의 재매부인(財買夫人 : 옛날의 복부인이었을까?)이 죽자 청연(靑淵)위 골짜기에 장사지내고 재매곡이라 불렀다. 해마다 봄이 되면 온 집안의 남녀들이 그 골짜기 남쪽 시냇가에 모여서 잔치를 열었다. 이때쯤 백가지 꽃이 화려하게 피고, 송화가 골짜기 안 숲속에 가득했다. 골짜기 어귀에 암자를 짓고 이름을 송화방(松花房)이라 하여 전해오다가 원찰로 삼았다. 경명왕 때에 공을 봉해서 흥호대왕(흥무대왕)이라 했다. (김유신의) 능은 서산(西山) 모지사(毛只寺) 북쪽에서 동쪽으로 향하여 뻗은 봉우..

카테고리 없음 2020.05.16

윤여동설 - 신라 경애왕(景哀王)이 묻힌 남산 해목령(蟹目嶺)의 진짜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신라 경애왕(景哀王)이 묻힌 남산 해목령(蟹目嶺)의 진짜위치 - 최초공개      삼국사기 신라본기 55대 경애왕 4년(A.D.927) 조를 보면,    “강주(康州) 산하 돌산[突山, 필자주 :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부근] 등 4개 고을이 태조(필자주 : 고려태조 왕건)에게로 귀순하였다.    가을9월 견훤이 고울부(高鬱府)의 우리 군사들을 침공하므로 왕이 태조(왕건)에게 구원을 청하니 태조가 장수에게 명하여 강한 군사 1만으로서 구원하게 하였다.    이 구원병이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견훤이 겨울 11월에 신라의 왕경을 습격하여 왔다. 이때 왕이 비빈종척(妃嬪宗戚)들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를 베풀고 오락을 즐기고 있어 적병이 오는 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가 창졸간에 어찌할 바를 ..

카테고리 없음 2020.05.10

윤여동설 - 신라 공작지(孔雀趾) 찾기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신라 공작지(孔雀趾) 찾기 - 최초공개 삼국사기 신라본기 46대 문성왕(文聖王) 19년(A.D.857) 조를 보면, “왕이 죽으니 시호를 문성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같은 책 47대 헌안왕(憲安王) 5년(A.D.861) 조를 보면, “정월 29일에 왕이 죽으니 시호를 헌안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 이 기록에 나타나는 “공작지(孔雀趾)”의 확실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방향과 거리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한반도의 경주는 후한 광무제에게 쫓겨 대륙에서 한반도 남부로 도망쳐 온 흉노족들이 세웠던 흉노족왕국의 도읍이었는데, 학자들이 그를 알지 못하고 한반도 경주에서 신라 공..

카테고리 없음 2020.05.02

윤여동설 - 신라 석씨왕들의 능원 금성 북쪽 양정구(壤井丘)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신라 석씨왕들의 능원 금성 북쪽 양정구(壤井丘)의 위치 - 최초공개      삼국사기에는 석씨로서는 처음 신라 왕위에 올랐던 탈해이사금(탈해왕)의 능을 양정구(壤井丘)에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 그 후의 석씨왕들의 왕릉 조성위치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그리하여 필자는 탈해왕 이후의 석씨왕릉들도 모두 이 양정구에 조성했기 때문에 능의 조성위치를 굳이 또 언급할 필요성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위 : 양정구(壤井丘) 확대]  양정구(壤井丘)                :        4대 탈해이사금릉(양정구 : 양정언덕)(신라 석씨왕들의 능원)             9대 벌휴이사금릉(기록없음)                                       ..

카테고리 없음 2020.04.25

윤여동설 - 신라 초기 박씨왕들이 묻힌 진짜 사릉원(蛇陵園)과 담엄사의 위치를 공개한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신라 초기 박씨왕들이 묻힌 진짜 사릉원(蛇陵園)과 담엄사의 위치를 공개한다 - 최초공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초기 박씨왕들의 왕릉조성지에 대하여 시조 혁거세왕으로부터 5대 파사왕까지는 사릉(蛇陵) 또는 사릉원(蛇陵園)으로 기록되어 있고 6대 지마왕릉, 7대 일성왕릉, 8대 아달라왕릉의 조성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그렇지만 필자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이 세 왕의 왕릉도 사릉원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릉(蛇陵)과 사릉원(蛇陵園 : 시조 혁거세거서간릉(사릉) (신라 박씨왕들의 능원)             2대 남해차차웅릉(사릉원)                                                 3대 유리이사금릉(사릉원)   ..

카테고리 없음 2020.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