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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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의 첫 태후 주몽왕의 어머니 유화태후릉(柳花太后陵)조성위치 찾기-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의 첫 태후 주몽왕의 어머니 유화태후릉(柳花太后陵) 조성위치 찾기 - 최초공개 [고구려 건국시조 주몽왕의 어머니 유화태후릉 조성 추정지 : 태백산 서남쪽에 위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주몽왕 14년(B.C.24) 조를 보면, “가을8월 왕의 어머니 유화(柳花)가 동부여(東扶餘)에서 죽었다. 그 나라 왕 금와가 그녀를 태후의 예로써 장사지내고 그의 신묘를 세워 주었다. 겨울10월 사신을 부여(동부여)에 보내어 토산물을 주고 그 은덕에 보답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69년(A.D.121) 조를 보면, “겨울10월 왕이 부여(동부여)에 가서 태후(유화태후)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사람을 보내어 백성들의 곤궁한 처지를 위문하고 차등 있게 물품을 나누어 주었다”라고..

카테고리 없음 2019.03.24

윤여동설 - 원(元) 세조 쿠빌라이칸의 능은 과연 어디에 조성했을까?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원(元) 세조 쿠빌라이칸의 능은 과연 어디에 조성했을까? - 최초공개 쿠빌라이칸은 칭기즈칸이 총애한 아내에게서 출생한 4명의 아들 중 막내인 톨루이의 4번째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30대 중반이던 1251년부터 몽골 제국의 영토 확장과 기반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형인 몽케칸은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인 오고타이가 계획했던 송의 정복과 페르시아 정벌을 결심하고, 페르시아 정벌은 쿠빌라이의 또 다른 형인 훌라구에게 맡겼고, 쿠빌라이에게는 중국정벌에 대한 군사·행정의 전권이 주어졌다. 쿠빌라이는 중국어를 읽거나 쓸 줄은 몰랐지만 중국 사상의 우수함을 일찍 깨닫고 자신의 주변에 믿을 만한 유교학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의 통치술은 주위 한족 학자들의 영향 아래 형성된 것이다. ..

카테고리 없음 2019.03.22

윤여동설 - 비운의 중혼후(重昏侯) 북송 흠종(欽宗)의 능은 지금의 어디에 조성되었을까?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비운의 중혼후(重昏侯) 북송 흠종(欽宗)의 능은 지금의 어디에 조성되었을까? - 최초공개       정강의 변(靖康之變) 때 금(金)나라에 잡혀와 오국성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죽어야 했던 비운의 황제 북송 휘종과 흠종.  혼덕공 휘종이 죽자 금나라가 그 유해를 남송으로 돌려보내 주었다지만, 그 아들인 중혼후 흠종은 죽을 때까지 고생고생하며 금나라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오국성(五國城)에서 죽었고, 그 부근에 묻혔다고 전해오는데, 아직까지 아무도 그 북송 흠종의 능을 정확히 찾아낸 사람은 없다.  그리하여 비록 아직은 추정단계지만 필자가 그 북송 흠종릉의 조성지를 찾아내 공개하는 것인데, 능의 보호를 위해 그 정확한 위치좌표는 공개하지 않는다.  [참고]  정강의 변  정강의 변(靖康之變)이란 ..

카테고리 없음 2019.03.15

윤여동설 - 비운의 해빈왕(海濱王) 거란(요) 천조제(天祚帝)의 능은 지금의 어디에 조성되었을까?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비운의 해빈왕(海濱王) 거란(요) 천조제(天祚帝)의 능은 지금의 어디에 조성되었을까? - 최초공개       천조제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遼)의 마지막 황제인 천조제(天祚帝)의 본명은 거란식으로는 야율아과(耶律阿果), 중국식으로는 야율연희(耶律延禧)이다.  전 황제 도종의 손자로 아버지 야율준(순종(順宗)으로 추존)은 일찍 주살되어 그가 뒤를 이었다. 천조제는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이것을 불쌍하게 생각한 할아버지 도종에 의해서 여동생 진진국장공주(秦晉國長公主)와 함께 길러져 양왕으로 책봉 되었다. 일시적으로 조부 도종은 조카 야율순(耶律淳)을 황태자로 삼으려 하지만 신하들의 견제를 받아 천조제가 황태자가 되었다.  그러나 즉위한 천조제는 어리석은 성격이며 정무를 돌아보지 않고 가신의 간언..

카테고리 없음 2019.03.08

윤여동설 - 천년의 의문 요(거란) 태조 야율아보기가 죽어 묻힌 조주(祖州)의 조릉(祖陵)을 찾아라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천년의 의문 요(거란) 태조 야율아보기가 죽어 묻힌 조주(祖州)의 조릉(祖陵)을 찾아라 - 최초공개 [요(거란) 태조 야율아보기의 능을 조성한 후 능침의 수호를 위하여 설치했다는 조주천성군상절도(祖州天成軍上節度) 추정지, 규모 : 가로 약800m, 세로 약550m, 좌표 : 동경113도16분, 북위41도40분)] 요사(遼史) 지리지를 보면, “태조(요 태조 야율아보기)가 천제(天梯)、몽국(蒙國)、별로(別魯) 등 3산(三山)의 형세(形勢)를 취하여 위전(葦甸)으로 삼고, 금착전(金齪箭)을 쏘아서 표시하였는데, 이를 용미궁(龍眉宮)이라 하였다. 신책(神冊) 3년(918년)에 그곳에 성을 세우고 이름을 황도(皇都)라 하였다가 천현(天顯) 13년(938년)에 다시 이름을 상경(上京)이라 고치고 부(..

카테고리 없음 2019.03.01

윤여동설 - 한반도 경주에서 발견된 문무왕릉비라는 것이 과연 신라 문무왕릉비일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 경주에서 발견된 문무왕릉비라는 것이 과연 신라 문무왕릉비일까? - 최초주장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기록되어 있는 “당신라문무왕릉잔비” 조를 보면, “國新羅文武王陵之碑(국신라문무왕릉지비)”라고 기록되어 있어, 학자들은 이 명문을 보고 이 비석이 신라 30대 문무왕릉비라고 해석한다. 이 문장을 “國 ∨ 新羅 ∨ 文武王陵之碑(국 신라 문무왕릉지비)”로 띄어 읽은 결과일 것인데, 그렇다면 여기에서 앞의 “國(국)”이 무슨 의미인지 매우 아리송해 진다. 하동 쌍계사에 있는 진감선사대공탑비명을 보면, “有唐新羅國故知異山雙谿寺 敎諡眞鑑禪師碑銘 幷書(유당신라국고지리산쌍계사 교시진감선사비명 병서)”라고 새겨져 있고, 조선 시대의 묘비에는 대개 "有明朝鮮國(유명조선국)"이라고 새겨져 있다. ☆ "有唐..

카테고리 없음 2019.02.22

윤여동설 - 백제 무령왕은 왜 63세가 아닌 62세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을까?

윤여동설 - 백제 무령왕은 왜 63세가 아닌 62세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을까?                 백제 무령왕은 서기 461년 신축년에 태어나 523년 계묘년에 죽었다.   그렇다면 무령왕은 우리 나이로 치면 63세에 죽은 것이다.   그런데 무령왕지석을 보면 62세 때인 계묘년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당시 백제에서는 나이를 만으로 계산한 것일까?   아니면 63세에 죽었다고 새겨야 할 것을 62세에 죽었다고 잘못 새긴 것일까?   설마 왕의 지석을 새기는데 잘못 새길 리는 없지 않을까?    일본서기 웅략천황 5년(A.D.461) 조를 보면,   무령왕은 곤지와 만삭이었던 개로왕의 왕비가 함께 왜국으로 가다가 각라도(各羅嶋 : 가까라시마)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산기가 있어 그 ..

카테고리 없음 2019.02.19

윤여동설 - 해모수의 북부여(北夫餘) 도읍은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赤城縣)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해모수의 북부여(北夫餘) 도읍은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赤城縣) - 최초주장 [해모수의 북부여 도읍으로 추정되는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 부근의 지형] [부여와 북부여의 도읍성으로 추정되는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赤城縣) 시가지 : 동경115도49분 북위40도54분] [적성고루] 부여(夫餘, 扶餘)는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나라로서 원래 고조선(왕검조선) 단군왕검의 넷째 아들인 부여에게 봉해진 영지였다. 부여는 왕검성(현 하북성 승덕시의 열하행궁)의 서쪽방향에 위치했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찾고보니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일대가 그 강역이었고, 도읍은 지금의 적성(赤城)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고조선 말기 어수선한 때 해모수가 그 땅을 차지하고 왕위에..

카테고리 없음 2019.02.16

윤여동설 - 예(濊)와 동예(東濊)의 위치가 서로 다른 것을 몰랐던 김부식과 삼국사기 찬자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예(濊)와 동예(東濊)의 위치가 서로 다른 것을 몰랐던 김부식과 삼국사기 찬자들 - 최초주장 삼국사기 권제35잡지 제4명주(溟州) 조를 보면, “명주는 본래 고구려의 하서량(하슬라라고도 한다)이었는데, 후에 신라에 속하였다. 가탐의 고금군국지에 이르기를, ‘지금 신라의 북쪽 경계에 있는 명주는 대개 예(濊)의 옛 땅’이라 하였으니 이전 사서에 ‘부여를 예의 땅’이라고 한 것은 잘못인 듯하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삼국사기 찬자들은 부여(동부여)가 예의 땅을 차지했다는 후한서 부여국전이나 삼국지 부여전의 기록을 부정하는 입장을 취했는데, 이로 미루어보면 김부식과 삼국사기 찬자들은 예와 동예의 위치변동에 대하여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는 예가 원래부터 신라의 북쪽 명주 일원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카테고리 없음 2019.02.10

윤여동설 - 왕검조선(고조선)의 장당경(藏唐京 : 당장경)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왕검조선(고조선)의 장당경(藏唐京 : 당장경) 찾기 - 최초주장 왕검조선(고조선)의 첫 도읍 아사달에 대하여 규원사화에는 태백산 동남쪽(필자주 : 원문에는 서남쪽으로 되어 있는데, 오기이므로 필자가 고쳤다) 우수하벌판에 위치했었다고 했고, 장당경(당장경) 역시 아사달 가까이 위치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고대의 태백산(太白山 : 長白山, 白頭山)은 지금의 하북성과 내몽골의 경계에 위치한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 해발 2,067m)으로 밝혀졌고, 왕검성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으로 밝혀졌다. 그리하여 왕검조선(고조선)의 첫도읍 아사달과 장당경(당장경)을 비정해 보았는데, 아사달은 내몽골 영성현 서쪽에 위치한 영성대명진고성으로 비정되었고, 장당경(당장경)은 그 동쪽에 위치한 ..

카테고리 없음 2019.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