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전체 글 1063

윤여동설 - 백제 금현성(錦峴城)의 위치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 금현성(錦峴城)의 위치 찾기 - 최초주장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1년(A.D.550) 조를 보면, “봄 정월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함락시키고, 3월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錦峴城)을 함락시켰다. 왕이 두 나라 군사가 피로한 틈을 타서 이찬 이사부로 하여금 군사를 출병시켜 두 성을 빼앗아 성을 증축하고 군사 1천명을 머물게 하여 그곳을 지켰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이때 도살성(道薩城)과 금현성(錦峴城)을 신라가 차지하게 되었음을 알게 한다. 그런데 이 중 특히 금현성(錦峴城)이라는 곳은 백제 초기 온조왕 때의 기록에도 나타난다, 그를 보면,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26년(A.D.8) 가을7월 왕이 말하기를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임금과 신하가 각각 다른 마음을..

카테고리 없음 2018.07.07

윤여동설 - 홍산문화 옥룡(玉龍)의 원형은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의 도읍 대극성(大棘城)인가?

윤여동설 - 홍산문화 옥룡(玉龍)의 원형은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의 도읍 대극성(大棘城)인가? [위 홍산문화 옥룡은 북옥저였던 내몽골 적봉시 옹우특기 부근에서 발굴되었는데, 형태는 전욱고양씨의 도읍이었던 대극성(大棘城,, 棘城이라고도 한다)의 지형과 아주 유사하다. 따라서 필자는 이 옥룡이 전욱고양씨와 어떠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욱고양씨의 모습을 조각한 것으로 추정되는 홍산문화 옥제품. 전욱고양씨는 태어날 때부터 정수리 양쪽이 뿔처럼 솟아 오른 모습이었다고 하고, 그 아버지는 사람의 얼굴에 돼지입 모양을 하였고, 다리는 굽었다고 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조의 맨 끝을 보면, 저자인 김부식의 의자왕에 대한 논평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 중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선조에 대하여..

카테고리 없음 2018.06.29

윤여동설 - 관산성(管山城)은 우수주(牛首州 : 춘주) 부근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관산성(管山城)은 우수주(牛首州 : 춘주) 부근 - 최초주장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5년(A.D.554) 조를 보면,   “백제왕 명농(성왕)이 가량(加良)과 함께 와서 관산성(管山城)을 쳤다.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이를 맞아 싸우다가 불리하여 신주(新州) 군주 김무력이 병사들을 이끌고 와서 교전하게 되었는데, 그의 비장인 삼년산군 고간도도가 급히 몰아쳐 백제왕을 죽였다.   이때에야 모든 군사들이 이긴 틈을 타서 싸워 크게 이기고 백제의 좌평 4사람과 사졸 29,600명을 목 베니 말 한필도 돌아가지 못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16년(A.D.555) 조를 보면,   “겨울10월 왕이 북한산(北漢山)을 순행하고 국경을 넓혀서 정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

카테고리 없음 2018.06.23

윤여동설 - 백제의 초기강역은 지금의 하북성 도산(都山)을 중심으로 난하 동쪽, 청룡하 서쪽이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의 초기강역은 지금의 하북성 도산(都山)을 중심으로 난하 동쪽, 청룡하 서쪽이었다 - 최초주장     백제의 건국지는 한산(漢山) 부근이었다.   처음에 비류와 온조 그리고 신하들이 한산(漢山)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도읍할 장소를 물색했는데, 신하들이 한수(漢水) 남쪽에 도읍할 것을 건의했으나 비류는 그곳을 마다하고 미추홀(弥鄒忽)로 갔고, 온조는 신하들이 건의한 한산 부근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그를 알 수 있다.   [부아악(負兒嶽) : 어린아이를 업고 있는 형상의 산이라는 의미]   그런데 온조왕 2년(B.C.17) 조를 보면, “봄 정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말갈이 우리 북부 국경에 이어져 있고 그곳 사람들이 용기가 있고 거짓이 많으니 의당 병기..

카테고리 없음 2018.06.15

윤여동설 - 위만조선 때 진번국(眞番國)과 임둔국(臨屯國)의 진짜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위만조선 때 진번국(眞番國)과 임둔국(臨屯國)의 진짜위치 - 최초공개 삼국유사 위만조선 조를 보면, “연왕(燕王) 노관이 한(漢 : 전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匈奴)로 들어가니 연(燕)나라 사람 위만도 망명하고자 무리 1,000여명을 모아 동쪽으로 도망쳐 요새를 넘고 패수(浿水)를 건너 진(秦)나라의 옛 빈터인 상하장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그리고는 차츰 진번(眞番), 조선(朝鮮)의 오랑캐들과 옛 연나라, 제나라에서 망명해 온 사람들을 모아 왕이 되고, 왕검성에 도읍했다. 위만은 군사의 위력으로 이웃의 조그만 나라들을 침략하여 항복시켰다. 이에 진번(眞番)과 임둔(臨屯)이 모두 복종해 와서 그에게 예속되니 땅이 수천리나 되었다. 위만은 아들에게 왕위를 전하고, 손자 우거에 이르렀다........

카테고리 없음 2018.06.08

윤여동설 - 맥족(貊族)은 환국(환인국), 단국(환웅국), 고조선(왕검조선)의 중심종족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맥족(貊族)은 환국(환인국), 단국(환웅국), 고조선(왕검조선)의 중심종족 - 최초주장 “맥(貊)”이란 중국 동북방에 살던 종족의 명칭인데, 삼국유사 기이 제1 마한 조를 보면, “명주(溟州)는 옛날에는 예국(穢國:濊國)이었다.......... 또 춘주(春州)는 옛 우수주(牛首州)로서 옛날에는 맥국(貊國)이었다. 또 혹은 지금의 삭주(朔州)가 바로 맥국이라고도 하고 혹은 평양성(平壤城)이 맥국이라고도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 위 글에 언급된 명주(溟州)는 한반도 강원도의 강릉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춘주(春州)나 삭주(朔州) 역시 한반도 강원도의 춘천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평양성(平壤城)도 한반도의 북한 평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미리 밝혀둡니다. 위 지도를 보시라. 위 글 ..

카테고리 없음 2018.05.19

윤여동설 - 발해국이 “부여, 옥저, 변한, 조선 등 바다 북쪽에 있던 여러 나라의 땅을 거의 차지하였다”는 신당서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일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발해국이 “부여, 옥저, 변한, 조선 등 바다 북쪽에 있던 여러 나라의 땅을 거의 차지하였다”는 신당서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일까? - 최초주장 신당서 발해전을 보면,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부용되어 있었으며 성은 대씨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였다. 그 땅이 영주(營州)에서 동쪽으로 2천리에 있으며 남쪽은 신라와 닿아 니하(泥河)를 국경으로 삼았고, 동쪽은 바다에 닿았으며, 서쪽은 거란까지이다. ......(중략)............땅이 사방 5천리이며, 호구는 10여만이고, 승병은 수만명이다. 문자를 제법안다. 부여, 옥저, 변한(?), 조선 등 바다 북쪽에 있던 여러 나라의 땅을 거의 차지하였다. 중종 때에 시어사 장행급을 ..

카테고리 없음 2018.05.13

윤여동설 - 발해국 5경의 위치와 서경은 조공길,남경은 신라길,동경은 일본길의 의미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발해국 5경의 위치와 서경은 조공길,남경은 신라길,동경은 일본길의 의미 - 최초주장 [중국에서는 지금 내몽골 파림좌기의 고성 터를 거란(요)의 상경임황부 터라고 하고 있으나 사실은 발해국의 상경용천부 홀한성 터이다] 발해국은 고구려 멸망 후 현주(중경현덕부)에 도읍하고 건국하였으나, 문왕(대흠무) 때인 천보(A.D. 742-756) 말년에 중경(중경현덕부)에서 동북쪽으로 300리쯤 떨어진 상경(상경용천부)으로 옮긴다. 발해국의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는 지금의 파림우기(巴林右旗)를 말하는 것이고,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는 파림좌기(巴林左旗)를 말하는 것인데, 지금도 파림좌기에는 아주 큰 옛 고성터가 남아 있다. 지금 중국에서는 파림좌기가 거란(요)의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였다고 하고 있지만, ..

카테고리 없음 2018.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