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고려 동북9성의 반환순서와 그 이유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려 동북9성의 반환순서와 그 이유 - 최초주장
고려 윤관장군이 여진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은 후 국경을 정했는데,
동쪽은 화곶령(火串嶺),
북쪽은 궁한이령(弓漢伊嶺),
서쪽은 몽라골령(蒙羅骨嶺)으로 하였다.
그리고 나서 먼저
서쪽 몽라골령에 영주성(英州城), 오림금촌(吳林金村)에 복주성(福州城),
북쪽 궁한이령에 길주성(吉州城),
동쪽 화곶령에 웅주성(雄州城)을 쌓았고,
그 다음에 함주성(咸州城)과 공험진성(公嶮鎭城)을 쌓았으며,
그 다음에 의주성(宜州城), 통태진성(通泰鎭城), 평융진성(平戎鎭城)을 쌓아 9성을 완성한다.
그런데 동북9성을 여진에게 반환할 때의 기록을 보면,
맨 먼저 길주성(吉州城)을 반환했는데, 길주성은 북단 궁한이령에 설치했던 성이었고,
그 다음 숭녕진성(崇寧鎭城)과 통태진성(通泰鎭城)을 반환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9성 중에 숭녕진성은 없었고, 평융진성이 있었다. 따라서 숭녕진성은 평융진성의 다른 이름일 것이고,
그 다음에 영주성(英州城)과 복주성(福州城), 진양진성(眞陽鎭城)을 반환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영주성은 9성 중에 서단 몽라골령에 설치한 성이었고, 복주성은 오림금촌에 설치한 성이었으며, 두만강 북쪽 700리 선춘령에 설치한 공험진성이 있었는데, 공험진성을 반환하는 것이 아니라 진양진성을 반환했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공험진성의 다른 이름이 진양진성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함주성(咸州城), 웅주성(雄州城), 선화진성(宣化鎭城)을 반환함으로써 9성의 반환을 마무리하게 되는데, 함주성은 함주도독부를 말하는 것이고, 웅주성은 동단 화곶령에 설치한 성이었고, 원래의 9성 중에 의주성이 있었는데, 의주성을 반환하는 것이 아니라 선화진성을 반환하는 것으로 보아 선화진성이 의주성의 다른 이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고려는 왜 하필 길주성, 숭녕진성(평융진성), 통태진성, 영주성, 복주성, 진양진성(공험진성), 함주성, 웅주성, 선화진성(의주성)의 순서로 여진에게 9성을 반환하고 군사들을 철수 했던 것일까?
역사학자들도 이 기록을 이해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고려 동북9성의 원래 설치 위치를 찾지 못하고는, 전혀 엉뚱한 한반도 동북쪽에서 고려의 동북9성을 찾으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고려의 동북9성은 한반도 동북쪽에 설치된 적이 없다.
고려의 도읍 개경은 한반도 황해도의 개성이 아니라 발해 북쪽 하북성 관성현(寬城縣 : 관성만족자치현)이었다.
그곳이 고려의 진짜 도읍 개경이었다.
따라서 고려의 동북9성은 진짜 개경이었던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관성현의 동북쪽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위 지도는 내몽골 적봉시와 옹우특기,극십극등기 일원의 지도이다.
고려사와 윤관열전의 기록을 세밀하게 읽고, 위 지도에 필자가 표시해 놓은 서랍목륜하 강변의 동북9성 각 성의 설치 위치와 도로를 비교해 보면, 당시의 도로 사정 상 그렇게 철수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고려가 여진에게 반환한 동북9성의 철수 순서에 대하여 고개가 끄떡여지지 않는가?
☆ 고려사 세가 권13 예종 4년(1109년) 7월 조
신유일 : 길주성 철수
임술일 : 숭녕진성, 통태진성 철수
갑자일 : 영주성, 복주성, 진양진성 철수
을축일 : 함주성, 웅주성, 선화진성 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