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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 초기 황룡국(黃龍國)의 위치를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 2020. 11. 29. 21:59

윤여동설 – 고구려 초기 황룡국(黃龍國)의 위치를 찾았다 - 최초공개

 

 

 

 

[황룡국 왕성 황룡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원중도유지 : 동경1143716초 북위411733]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27(A.D.8) 조를 보면, “봄 정월 왕의 태자 해명이 옛 도읍(졸본)에 남아 있었는데, 힘이 세고 용감했다. 황룡국(黃龍國) 왕이 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강궁을 선물했더니 해명이 사신이 보는 앞에서 그 활을 잡아당겨 꺾으면서 힘을 쓰지 않았는데도 활이 약해 부러졌다"고 하여 황룡국왕이 그 말을 전해 듣고는 매우 무안해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때 고구려는 졸본(卒本)에서 국내성(國內城)으로 도읍을 옮긴 때였는데, 해명태자는 도읍이전을 반대하며 국내로 가지 않고 계속 졸본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자 유리왕은 황룡국 왕에게 자기 아들인 해명을 죽여 달라고 부탁했으나 황룡국 왕이 그를 죽이지 못하자 유리왕은 해명에게 칼을 보내 스스로 죽으라 명하게 되어 해명 태자는 창을 땅에 꽂아 놓고 말을 타고 달려와 그 창에 꽂혀 죽고 마는데, 이를 보면 황룡국(黃龍國)이 졸본(卒本)이나 국내성(國內城)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나라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화랑세기 필사본 15세 풍월주 유신공 조를 보면, “금관가야는 수로청예왕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황룡국(黃龍國)여자 황옥(黃玉)을 아내로 맞이하여 거등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황룡국(黃龍國)의 위치를 찾으면 고구려의 졸본(卒本)과 국내성(國內城)을 찾을 수 있고, 가야 수로왕의 왕후인 허황옥(許黃玉)의 고향을 찾을 수 있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구당서 거란전을 보면, “거란은 황수(潢水)남쪽, 황룡(黃龍 : 황룡국)의 북쪽에 살았는데, 선비의 옛 땅으로 당나라 장안(서안)에서 동북쪽으로 5,300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고구려(高句麗)와 인접하였고, 서쪽으로는 해(奚)와 접했으며, 남쪽으로는 영주(營州), 북쪽으로는 실위(室韋)에 이른다. 냉형산(冷陘山)이 그 나라의 남쪽에 있는데, 해(奚)의 서산(西山)과 서로 이어져 있어 험준하고, 지방이 2천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 냉형산, 형산은 지금의 산서성 태원 북쪽 삭주, 안문관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서 안문관 북쪽을 형북이라 하고, 그 남쪽을 형남이라 한다. 그런데 거란의 남쪽 경계가 냉형산이라고 하였으니 결국 거란은 안문관 북쪽인 지금의 산서성 대동, 내몽골 오란찰포 부근에 위치했었다는 말이 된다. 

 

   또 신당서 거란전에도, “거란은 본래 동호(東胡)의 종류로서 그 선조가 흉노에게 격파되어 선비산(鮮卑山)에 의지하여 살았는데.......마침내 쇠잔해져 황수(潢水)의 남쪽, 황룡(黃龍)의 북쪽으로 도망쳤다. 원위(元魏) 때에 이르러 스스로 거란(契丹)이라 불렀다. 땅이 당나라 장안(서안)에서 동북쪽으로 5천여 리에 있고, 동쪽은 고구려(高句麗), 서쪽은 해(), 남쪽은 영주(營州), 북쪽은 말갈(靺鞨), 실위(室韋)에 닿아 있다. (그 나라의 남쪽에) 냉형산(冷陘山)이 가로 막고 있어 스스로를 견고하게 지킬 수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 지금 서안(장안)에서 내몽골 오란찰포시 상도현(거란 상경임황부)까지 현재의 고속도로로 약 1,104km인데, 이를 옛날 거리단위 10리를 2.3km로 환산하면 약 4,800여리가 된다. 따라서 옛날의 도로 굴곡지수를 감안하면 5천여리라 기록한 신당서의 기록이 옳아 보인다.

 

 

                                                                실위, 말갈

 

                                                                   황수

 

                                           해                      거란               고구려

 

                                                               영주, 황룡국

 

   그런데 필자가 거란()의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가 지금의 내몽골 오란찰포시 상도현(商都縣) 부근, 고구려의 졸본(卒本)은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后城鎭) 부근, 국내성은 북경시 연경구 영녕진(永寧鎭) 부근임을 이미 밝혔다.

 

☆ 요(거란)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는 지금의 북경(北京) 부근, 서경대동부(西京大同府)는 산서성 대동(大同) 부근이다.

 

                                             [거란지리지도 속 황룡부(黃龍府)의 위치]

 

  따라서 거란()의 남쪽 방향에 위치했고, 고구려의 졸본(卒本), 국내성(國內城)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을 황룡국(黃龍國)은 고구려의 서북쪽인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장북현 원중도유지(元中都遺址) 부근으로 비정해 볼 수 있고, 가야 수로왕의 왕후 허황옥의 고향 황룡국(黃龍國) 역시 그 부근이라 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거란지리지도에 황룡부(黃龍府)”로 표시되어 있는 곳도 바로 지금의 북경(옛 요동) 서북쪽에 위치한 장북 원중도성(元中都城) 유적지를 표시한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 황룡부는 요 태조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정복하고 돌아가다가 죽은 곳으로 전해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 금관가야의 왕성은 한반도 김해가 아니라 지금의 발해 북쪽 요녕성 호로도시 흥성시에 있는 흥성고성(興城古城)을 말하는 것이고, 구지봉(龜旨峯)은 그곳의 수산(首山)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 허황옥은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장북(張北) 부근을 출발하여 동남쪽으로 향하여 옛 요수(遼水)인 지금의 양하, 영정하, 해하를 타고 내려와 북경(옛 요동)을 지나 발해에 당도한 후 발해 북안을 따라 동북쪽으로 항해하여 진황도 앞바다를 지나고 국화도를 지나 금관가야인 요녕성 호로도시 흥성(興城)에 도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가야는 한반도 남쪽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가 아니었다.

 

[참고]

요사권38 지제8 지리지2 동경도를 보면,

“龍州黃龍府 本渤海扶餘府 太祖平渤海還至此崩有黃龍見更名

保寧七年 軍將燕頗叛府廢 開泰九年 遷城於東北 以宗州 檀州漢戶一千復置

統州五縣三

(용주황룡부는 본래 발해의 부여부이다. 태조(야율아보기)가 발해를 평정하고 돌아오다가 이곳에서 죽었는데, 황룡이 나타나므로 지명을 바꾸었다.

보령7년에 군장 연파가 배반했으므로 부를 폐지하였다가 개태9년에 성을 동북쪽으로 옮기고 종주, 단주의 한호 1천으로 다시 설치하였다. 관할하는 주가 다섯이고, 현이 셋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곳이 본래는 동부여의 부여부에 속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요나라 때 황룡이 나타나 이곳의 지명을 황룡부로 바꾸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고, 옛 황룡국(黃龍國)에서 유래된 황룡(黃龍)이라는 지명이 요나라 때까지도 전해졌기 때문에 이곳을 황룡부(黃龍府)라 명명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