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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의 발상지 진짜 위치 찾기 –최초주장

윤여동 2024. 2. 29. 15:51

윤여동설 –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의 발상지 진짜 위치 찾기 최초주장

 

 

 

 

[망아지 머리 형상이 보이시나요?  좀 떨어져서 보세요. 그리고 필자가 망아지성(駒城, 용인의 옛 이름)이라고 주장하는 발해 북쪽, 진황도 도산남쪽 이곳에 진짜 망아지 형상이 나타나는 것을 반도사관론자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의 의미를 직역해 보면,

살았을 때는 진천에 사는게 좋고, 죽어서는 용인에 묻히는게 좋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이를 한반도 충북 진천(鎭川)과 경기도 용인(龍仁)에 대입시켜, 진천은 사람 살기에 좋은 곳이고, 용인에는 묘를 쓸 명당이 많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고려로부터 그 이전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가야 그리고 마한, 진한, 변한과 고조선 등의 원래 강역은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의 발해 북쪽 대륙이었다.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이었으며 고구려의 평양성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를 말하는 것이고,

백제의 웅진은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을 말하는 것이며,

신라의 천년 도읍 서라벌은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이며,

금관가야의 금관성은 요녕성 호로도시 흥성시의 흥성고성(興城古城)이고,

고려의 도읍 개경(開京) 역시 한반도 황해도의 개성이 아니라 하북성 승덕시 관성현(寬城縣, 관성만족자치현)을 말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이라는 말은 한반도의 진천과 용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되고, 이 말의 발상지는 발해 북쪽 대륙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 된다.

 

진천(鎭川)의 옛 이름은 고구려는 금물노군(今勿奴郡)이라 하였다고 하고, 신라는 만노군(萬弩郡)이라 하였다고 하는데, 신라 김유신 장군이 바로 이 만노군 즉 진천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고 있고,

 

 

용인(龍仁)의 옛 이름은 고구려 때에는 구성(駒城, 망아지성) 이었다고 하고, 고려 초에 용구(龍駒)로 바꾸어 광주(廣州)에 속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지명에 구성(駒城), 용구(龍駒)라 하여 "(망아지구)"자를 붙였는데, 옛사람들은 지명을 아무렇게나 부르는 것이 아니라 대개 그곳의 지형에 나타나는 형상에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백제 마수성(馬首城)]

 

 

[가야산 정상부에 소머리형상이 있기 때문에 가야산을 우두산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예를 들면, 백제 마수성(馬首城)의 경우 그곳의 지형이 마치 말머리를 닮았기 때문이었고, 가야산의 경우에도 산 정상에 소머리 형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우두산(牛頭山)이라고도 불렀으며, 백제의 한산 부아악(負兒嶽)도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있는 형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며, 신라 공작지(孔雀趾)라는 곳은 그곳의 지형이 마치 공작새의 발과 같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신라의 낭산(狼山)은 그 산의 형상이 마치 늑대(이리)의 머리형상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으며, 신라 남산 해목령(蟹目嶺)이라는 곳은 그곳의 지형이 마치 게[]의 눈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지금의 발해 북쪽 대륙에 위치하고 있다.

이를 보면 용인 지역의 지형도 망아지[] 형상을 닮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고, 역시 발해 북쪽 대륙에서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이라는 말이 생겨난 실제 현장은 지금의 발해 북쪽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진천(鎭川)은 지금의 발해 북쪽 진황도 노룡현 반장진(潘庄鎭) 일원으로 비정되고,

용인(龍仁)은 지금의 발해 북쪽 당산시 천안시 양각장진(楊各庄鎭) 일원을 말하는 것으로 비정해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각각의 지형을 살펴보면,

진천(鎭川)은 지금의 청룡하(靑龍河, 필자주 : 옛 백제의 웅천이다) 하류로서 길고 큰 강이 흐르는 곳이기 때문에 그 지방 사람들은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었고,

용인(龍仁)은 사하(沙河, 필자주 : 백제의 한수이다)의 하류 동쪽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 지형이 강보다 월등히 높아 강물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기에는 불편한 곳으로서, 묘지를 조성하면 알맞은 지형이었다.

결국 생거진천(生居鎭川)이란 의미는 사람들이 농사짓고 살기에 좋은 곳이라는 의미였고,

사거용인(死居龍仁)이란 묘지를 조성하면 장마에 묘가 물에 잠기거나, 떠내려갈 염려가 없는 명당의 의미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당시 그 부근에 살던 사람들은 진천(鎭川)에서 농사짓고 살다가, 죽어 용인(龍仁)에 묻히기를 염원했을 것이고, 그리하여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 혹시 용인이 백제 남한성시기 백제왕이나 왕족들이 죽어 묻히는 능원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한반도에서 이들을 찾지마라.

한반도에 생거진천(生居鎭川)은 원래 없었고, 사거용인(死居龍仁)도 원래 없었다.

이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대륙 고려로부터 전해진 말로서 발해 북쪽 진황도 도산(都山) 남쪽에서 찾아야 한다.

위 그림을 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