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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해동(海東)과 동국(東國)이 원래는 각각 다른 곳이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24. 5. 17. 21:34

윤여동설 - 해동(海東)과 동국(東國)이 원래는 각각 다른 곳이었다 최초주장

 

 

 

 

[: 東國地圖(동국지도), 한반도를 그린 것이 확실한 조선시대 지도인데 명칭을 조선지도(朝鮮地圖)라 하지 않고 동국지도(東國地圖)라 했다. 이는 한반도의 원래 명칭이 동국(東國)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조선말까지 대마도(對馬島)는 우리 땅이었다]

 

우리는 지금 해동(海東)”동국(東國)”을 모두 한반도(韓半島)의 별칭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필자가 보기에 이 둘이 원래는 각각 서로 다른 곳을 지칭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우리 역사에서 왕건의 고려(高麗)로부터 그 이전 우리 상고사(上古史)와 고대사(古代史)의 현장은 한반도가 아니라 발해 북쪽 대륙이었음이 밝혀졌고,

한반도(韓半島)는 왕망의 신()나라가 광무제에 의해 멸망하고, (, 後漢)이 복원되자 왕망(王莽)에게 적극 협조했던 투후 김일제(金日磾)의 후손인 김성[金星, 필자주 : 이 사람이 바로 태조 성한왕(星漢王)이다] 일파가 대륙을 떠나 한반도 동남부로 도망쳐 와서 세운 흉노족왕국이 있었고,[필자주 : 한반도 경주와 김해 등지에 있는 대형 고분들은 신라왕릉이나 가야왕릉이 아니라 흉노족들이 죽어 묻힌 곳이다]

또 대륙의 백제(대륙백제, 온조백제)에서 근초고왕과 왕위다툼을 벌이다가 패한 무광왕(武廣王, 필자주 : 이 사람이 반도백제의 건국시조로서 대륙백제 12대 계왕의 아들이었다)4세기 중엽 한반도로 와서 지모밀 땅에 도읍하고 세운 백제(반도백제)가 있었고,[필자주 : 한반도 익산, 공주, 부여에 있는 백제의 흔적들은 삼국사기 기록 속 온조백제(대륙백제)의 흔적이 아니라 무광왕의 반도백제 흔적들이다]

발해 북쪽 대륙 해동(海東)에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朝鮮)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그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옮겨 오게 되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해동(海東)과 동국(東國)을 구별없이 사용하게 되었고, 현재에 이르렀던 것으로 판단된다.[필자주 : 고려는 발해 북쪽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고, 고려왕들은 죽어 발해 북쪽 대륙에 묻혔다. 따라서 한반도 북한 개성 부근에 있다는 고총들은 고려왕릉이 아니다.]

 

 

[: 개경 선죽교 남쪽 좌견리(坐犬里) 확대 : 마치 개가 앉아 있는 것 같은 형상도 고려의 도읍 개경이었던 지금의 하북성 관성만족자치현(寬城滿族自治縣) 폭하(瀑河) 남쪽에 있다. 따라서 이 좌견리(坐犬里) 북쪽을 지나는 지금의 폭하가 바로 고려 예성강(禮成江)이었던 것이고, 그 강을 건너는 다리가 바로 진짜 고려 개경의 선죽교(善竹橋)였던 것이다. 개경(開京)은 지금의 한반도 개성(開城)이 아니라 발해 북쪽 하북성 관성만족자치현임이 확실한 것이다.]

 

 

 

[: 하북성 승덕시 열하행궁(피서산장) : 고조선의 왕검성, 고구려 평양성, 고려 서경]

 

우리의 대륙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고조선의 왕검성(王儉城, 왕험성이라고도 한다)은 지금의 발해 북쪽 하북성 승덕시(承德市)를 말하는 것으로서, 후일 전한낙랑군(前漢樂浪郡)의 치소가 되기도 했고,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平壤城)이 되기도 했으며, 고려의 서경(西京)이 되었던 곳이다.
그리고 고조선의 남쪽에 위치했던 삼한(三韓)은 발해 북쪽 연안에 위치하고 있었다. 즉 마한(馬韓)은 하북성 당산시, 진황도시 일원에, 진한(辰韓)은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일원에, 변한(弁韓)은 요녕성 호로도시 일원에 위치하고 있었다.

 

[: 풍광이 매우 웅장하고 아름다운 고구려 건국지 졸본(卒本) :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

 

또한 고구려(高句麗)는 북경 북쪽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后城鎭, 필자주 : 이곳이 졸본이다)에서 건국되어 그 동남쪽 북경 연경현 영녕진(永寧鎭, 필자주 : 이곳이 국내성이다)으로 도읍을 옮겼고, 다시 회유 발해진(渤海鎭, 필자주 : 이곳이 환도성, 안시성이다)으로 다시 옮겼다가 또 하북성 승덕시(承德市, 필자주 : 이곳이 평양성이다)으로 옮겼는데, 결국 이곳에서 당나라의 침공을 받고 종묘사직을 문닫고 말았다.

 

[: 백제 한산 부아악(負兒嶽) : 하북성 당산시 천안시 건창영진 북쪽]

 

[: 백제 웅진성(熊津城) 서문 :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노룡고성(盧龍古城)]

 

[: 궁남지(宮南池), 백제 무왕이 사비성 왕궁 남쪽에 방장선산을 본 떠 만들었다는 궁남지는 지금의 발해 북쪽 하북성 당산시 난주고성]

 

백제(百濟)는 발해 북쪽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도산(都山) 남쪽 위례성(慰禮城)에서 건국되었으나 얼마 후 그 남쪽 지금의 당산시 천안시 건창영진(建昌營鎭, 필자주 : 이곳이 백제의 남한성이다)으로 도읍을 옮겼고, 다시 13대 근초고왕 때 다시 위례성과 가까운 도산 남쪽 한성(漢城)으로 옮겼는데, 아신왕 때 고구려 광개토왕의 침공을 받았고, 다시 개로왕 때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받아 도읍 한성이 함락되고 왕이 잡혀 죽게 되자 급히 지금의 진황도 노룡현(盧龍縣, 필자주 : 이곳이 웅진성이다)으로 옮겼고, 성왕 때 다시 그 서남쪽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난현(灤縣, 필자주 : 이곳이 사비성이다)으로 옮겼는데, 백제는 이곳에서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받고 사직을 문닫았다.

 

[: 신라의 건국지 서라벌(徐羅伐),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신라(新羅)는 발해 북쪽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필자주 : 이곳이 서라벌이다)에서 건국되어 주변국을 병합해 가며 천년왕조를 이었고,

 

[: 가야 금관성(金官城), 요녕성 호로도시 흥성시 흥성고성(興城古城)]

 

[: 가야산(우두산), 요녕성 호로도시 대홍라산 정상에 나타나는 소머리형상. 이 산이 고운 최치원이 만년에 들어가 살았던 진짜 가야산]

 

가야(伽倻)는 발해 북쪽 지금의 요녕성 호로도시 일원을 여러 가야가 나누어 차지하고 각각의 독립성을 유지하다가 차례차례 신라에 흡수되고 말았고,

결국 신라는 당나라와 함께 백제까지도 멸망시킨 후 그 땅을 전부 차지했고, 또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에 협조함으로써 고구려 남쪽 땅 일부를 차지한 후 9주를 두었다가 세월이 흐른 후 쇠약해져 나라를 고려 태조 왕건에게 들어 바침으로써 천년왕국 신라도 사직을 문닫게 되고 만다.

 

통일신라 시기 9주는 신라 땅에 설치했던 상주(尙州), 양주(良州), 강주(康州)와 백제 옛 땅에 설치했던 웅주(熊州), 전주(全州), 무주(武州) 그리고 고구려 남쪽 지역에 설치했던 한주(漢州), 삭주(朔州), 명주(溟州)였는데, 이들은 모두 발해 북쪽 대륙에 위치한다.

 

그렇게 왕건의 고려(高麗, 필자주 : 도읍 개경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관성만족자치현이다]가 발해 북쪽에서 건국되어 왕위를 이어가게 되는데, 고려 말에 이르러 중국에서 명()나라가 건국되어 철령(鐵嶺) 이북 땅을 차지하려 하자 고려는 공험진[公嶮鎭, 필자주 : 지금의 내몽골 서랍목륜하(시라무렌) 강가에 위치했고, 고려 윤관장군이 17만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한 후 공험진 선춘령에 고려지경이라 새겨 정계비를 세웠었다]까지가 원래 우리의 옛 땅이었는데,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고 반발하며 요동[遼東, 필자주 : 지금의 북경이다] 정벌을 실행에 옮기려고 군사를 출전시켰으나, 이성계가 압록강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함으로써 결국 고려는 얼마 후 사직을 문 닫게 되고 이성계의 조선(朝鮮)이 건국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발해 북쪽 대륙 해동 땅에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무슨 까닭인지 전해지지 않았으나 그 발해 북쪽 대륙을 떠나 한반도 지금의 서울로 도읍을 옮기게 되고, 대륙의 땅은 그 후 언젠가 명나라 또는 청나라에게 빼앗기게 되어, 지금 우리는 발해 북쪽 대륙이 우리의 옛 땅이었다는 사실을 모르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의 대륙 역사는 대략 위와 같았다.

 

그런데 조선 태조 이성계가 발해 북쪽 대륙에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후 그 해동의 고려 땅을 버리고 한반도 동국으로 옮겨 온 까닭을 기록한 문서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 참 이상한 일이다. 그러한 큰 사건을 왜 기록으로 남겨 전하지 않았을까? 혹시 국가차원에서 엄격하게 통제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혹시 조선시대 고서적수거령에 의해 그러한 기록들이 모두 수거되어 폐기 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고려시대 발해 북쪽 대륙의 고려[필자주 : 도읍 개경은 하북성 승덕시 관성만족자치현이었다]에서 주조해서 통용했던 엽전은 해동통보(海東通寶)”, “해동중보(海東重寶)”라 이름 붙였고, 당나라 사람들은 발해 북쪽 대륙백제(온조백제)의 의자왕을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도 불렀다 하고, 또한 발해 북쪽 지금의 대흥안령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발해국도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렀다고 하니, 지금의 발해 북쪽 북경 동쪽 지역을 옛날에는 해동(海東)”이라 불렀음에 틀림없을 것인데, 요동은 요수의 동쪽이라는 의미로서 지금의 북경을 말하고, 해동은 요해의 동쪽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한반도(韓半島)에 관한 지도나 서적 그리고 엽전 등에는 한결같이 동국(東國)”이라는 명칭이 붙여져 있는데, 대표적으로 동국지도(東國地圖)”, “동국여지도(東國與地圖)”,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사략(東國史略)”,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정운(東國正韻)”, “동국통보(東國通寶)”, “동국중보(東國重寶)” 등이고 그 외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필자주 : 다만 고려 때 편찬되었다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은 예외인데, 왜 고려 사람이었던 이규보의 문집을 해동이상국집이라 하지 않고 동국이상국집이라 이름붙였는지 의아스럽다. 혹시 이규보가 원래 한반도 동국(東國) 출신으로서 발해 북쪽 해동(海東)의 대륙고려로 가서 벼슬했던 것은 아닐까?]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앞서 언급했듯이 한반도에는 365년경 발해 북쪽 대륙백제(온조백제)에서 근초고왕과의 왕위다툼에서 패한 무광왕(武廣王)이 한반도로 건너와 세운 반도백제가 있었다.[필자주 : 관세음응험기에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 땅으로 천도했다(百濟武廣王 遷都枳慕蜜地)”는 기록 속 무광왕이 바로 이 반도백제의 건국시조이다]

그런데 이 반도백제는 건국된지 100여년 만에 강국이 되었고, 반도백제 모도왕(牟都王) 때에 이르러서는 쇠약해진 대륙백제(온조백제)를 흡수통합하게 되고, 모도왕은 479년에 둘째 손자인 모대를 대륙백제로 보내 왕위에 올렸는데, 이가 바로 동성왕이었다. 그리고 이때 모도왕은 고대의 왜국[倭國, 필자주 : 지금의 요동반도에 위치하고 있던 고대의 왜국을 말한다]까지도 그의 영향권 아래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광왕의 반도백제는 처음 지모밀(枳慕蜜, 익산 금마 왕궁리) 땅에 도읍하고 나라를 세웠는데, 나라가 커지며 고마성(固麻城, 충남 공주), 거발성(居拔城, 충남 부여) 등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충남 공주와 부여에 백제의 유적, 유물이 많이 남겨진 것인데, 우리는 지금 그 백제의 흔적들을 삼국사기 기록 속 대륙백제(온조백제)의 흔적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런데 대륙백제가 서기 660년에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신라가 그 땅을 차지했다가 수백년 후 다시 고려가 그 땅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던 반도백제와 발해 북쪽 옛 대륙백제 땅을 차지하고 있던 고려와의 관계는 과연 어떠했을까?

반도백제가 대륙백제 땅을 빼앗아간 철천지 원수의 나라 신라와의 관계가 원만치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은 누구나 가능하지만,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 신라를 멸망시키고 세워진 나라인 고려와의 관계까지 나빴을 가능성은 극히 적다고 판단된다.[필자주 : 옛날 고조선의 준왕은 위만에게 왕검성을 빼앗기고 남하하여 한왕이 된 후 얼마나 원한이 사무쳤는지 북쪽의 위만조선과는 일체 교류를 하지 않았다고 하고, 오히려 한 무제가 군사를 보내 위만조선을 침공할 때 한()나라 수군이 한()의 강역을 경유할 수 있도록 협조했었다. 적의 적은 내편이니까. 이와같은 원리로 반도백제의 입장에서 볼 때 원수를 대신 갚아준 고려에게 감정이 나쁠 리는 없었을 것이다]

 

고려의 청자(靑瓷)를 예로 들어 생각해 보자.

고려는 청자의 나라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당시 중국 사람들도 청자의 비색에 매료되어 고려청자를 구하려고 경쟁을 벌일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 고려청자의 생산지가 발해 북쪽 대륙의 해동 고려 땅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남부 전남 강진 부근으로 확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 한반도의 반도백제가 발해 북쪽 대륙고려와 지금 우리가 알지 못하는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거나 혹은 아주 친밀한 우방 교역국으로서 존재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하여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비색의 청자가 전량 발해 북쪽 대륙고려로 수출되었는데, 중국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고려청자(高麗靑瓷)라고 이름 붙였을 것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는 것이고,[필자주 : 이때 중국과 반도백제는 큰 바다(서해, 황해) 때문에 직접 교역이 매우 어려웠고, 산동반도를 차지하고 있던 고려가 중계무역을 하였던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발해 북쪽에 위치하고 있던 대륙고려에서는 해동통보(海東通寶)”라는 엽전을 만들어 화폐로 사용했는데, 한반도에서는 동국통보(東國通寶)”라는 엽전이 많이 출토된다. 이 동국통보(東國通寶)가 한반도에 존재하고 있던 나라에서 만들어 사용하던 엽전이 확실하다면 이는 한반도에 존재했을 반도백제(半島百濟)에서 만들어 사용하던 엽전이었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는 또 왕망의 신()나라 엽전인 화천(貨泉)이 많이 출토되는데, 이는 흉노족인 투후 김일제의 후손인 김성(金星)이 대륙에서 왕망의 신나라 멸망 후 후한 광무제에게 쫓겨 한반도 동남부로 도망쳐 올 때 가져왔던 화천도 있을 것이고, 그 후 한반도의 흉노족왕국 자체에서 만들어 사용하던 화천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발해북쪽 대륙고려와 한반도의 반도백제는 지금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아주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은 확실할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 멸망 후 발해 북쪽 대륙에서 조선(朝鮮)을 건국한 이성계가 대륙 개경[開京, 필자주 : 하북성 승덕시 관성만족자치현을 말한다]을 떠나 발해와 서해(황해)를 건너 한반도 서울로 도읍을 옮길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대륙고려와 반도백제가 특별한 관계가 아니었다면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필자주 : 그런데 조선이 한반도로 이동해 온 후 한반도에 존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반도백제와 흉노족왕국이 바로 소멸한 듯한데, 이는 지금 일본열도에 백제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고, 또한 북방유목문화도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이성계의 조선에 밀려 다시 지금의 일본열도로 옮겨갔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강단사학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한반도 만이 우리의 역사 강역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동국 즉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던 반도백제의 엽전일 가능성이 많은 동국통보(東國通寶)”를 보고도 아무런 역사적 기록이나 근거도 없이 고려시대 엽전이라 하고,[필자주 : 고려사 어디에도 고려에서 동국통보를 주조해 사용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조선(朝鮮)이라는 국호가 엄연히 있었건만 왜 조선사람들은 동국(東國)”이라는 별칭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함께 사용하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차치하고, 결론은

고려 때까지 원래의 해동(海東)은 중국 장안, 낙양의 동북쪽 방향에 위치한 요해 (遼海) 동쪽 동이족들이 사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동국(東國)은 중국 대륙의 동쪽에 위치한 한반도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발해 북쪽 대륙 해동에서 한반도인 동국으로 조선(朝鮮)이 옮겨오자 그 이후 해동과 동국을 구분없이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조선시대 사람들 특히 조선초기 사람들은 한반도가 원래 동국(東國)이었음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을 것인데, , 후기에 이르르며 점점 희미해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 통일한반도의 새로운 국명은 다시 동국(東國)”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