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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통일신라 때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 熊州) 김헌창의 난은 지금의 발해 북쪽 진황도 노룡현(盧龍縣)에서 일어났던 사건 - 최초주장

윤여동 2024. 5. 25. 08:18

윤여동설 통일신라 때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 熊州) 김헌창의 난은 지금의 발해 북쪽 진황도 노룡현(盧龍縣)에서 일어났던 사건 - 최초주장

 

[: 웅천주(웅주, 웅진)는 지금의 발해 북쪽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盧龍縣)](세력범위는 청색글씨)

 

[: 진황도 노룡현의 노룡고성(盧龍古城)(옛 백제 웅진성)]

 

[: 영평부성도(옛 백제 웅진성(熊津城) 그림] [김헌창은 바로 이 웅진성(현 노룡고성)을 중심으로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다][필자주 : 위 노룡고성 사진과 그림을 비교해 보면 서문, 서북문쪽 성안에 백제왕궁과 관아가 위치했었던 듯 하다]

 

[; 노룡고성(옛 웅진성) 서문]

 

[: 노룡고성(옛 웅진성) 남문]

 

[: 노룡고성(옛 웅진성) 내에 지어진 지금의 법화사 천불전]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41대 헌덕왕 14(A.D.822) 3월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 웅주, 공주) 헌창(김헌창)이 그 아버지 주원(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반역을 하여, 나라 이름을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원년(慶雲元年)이라 하고, 무진(武珍, 광주), 완산(完山, 전주), 청주(菁州, 진주), 사벌주(필자주 : 비사벌의 오기로 보인다, 창녕) 네 주의 도독과 국원(國原, 충주), 서원(西原, 청주), 금관(金官, 김해)의 사신(仕臣)들과 여러 군, 현의 수령들을 협박하여 자기 소속으로 삼았다.

  청주도독(菁州都督, 진주) 향영은 빠져나와 추화군(推火郡, 밀양)으로 달아나고, 한산(漢山, 한주), 우두(牛頭, 삭주, 춘주), 삽량(歃良, 양주), 패강(浿江, 패수), 북원(北原, 원주) 등이 먼저 헌창의 반역 음모를 알고, 군사를 모아 스스로 수비하였다.....(중략)............

 

  헌창이 겨우 몸을 피하여 성(웅진성)으로 들어가 굳게 지키고 있었다. 모든 (신라) 군사들이 웅진성(熊津城)을 포위하고 공격하기 10여일 만에 성이 함락지경에 이르자 헌창이 화를 면할 수 없음을 알고 자살하니 수종했던 자가 머리를 잘라 몸통과 각각 따로 묻어 두었는데, 성이 함락된 후 그의 몸통은 옛 무덤에서 찾아 다시 베고, 그의 친족과 도당 239명을 죽이고, 백성들은 풀어준 후 전공에 따라 표창과 벼슬을 차등있게 시행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실 지금까지 김헌창이 난을 일으킨 웅천주(熊川州, 웅진, 공주)의 위치에 대하여 아무도 확실한 장소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 우리의 신라는 한반도 경주에서 건국된 나라가 아니라 발해 북쪽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에서 건국된 나라였다. 지금의 중국 요녕성 금주시(錦州市)가 신라의 천년도읍지 서라벌(徐羅伐)이었다.

백제(온조백제) 또한 한반도에서 건국된 나라가 아니라 발해 북쪽 진황도 도산(都山) 남쪽에서 건국되었다가 지금의 북경 동쪽 하북성 당산시 난현(灤縣)에서 멸망했다. 이곳 난현이 백제(온조백제, 대륙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성(泗沘城)이었다.

중국 사서들에 “요동 동쪽 1천여리에 고구려와 백제가 위치하고 있었다”는 기록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었고,

한반도 경주는 흉노족인 투후 김일제의 후손인 투후 김성(金星) 일파가 후한 광무제에게 쫓겨 한반도 동남부로 도망쳐 와서 세운 흉노족왕국의 도읍이었다. 경주에서 발견된 비편에 새겨져 있는 "태조성한왕(太祖星漢王)"이라는 인물이 바로 이 김성이고,

한반도의 백제 흔적들은 4세기 중엽 대륙백제(온조백제)에서 근초고왕과 왕위다툼을 벌이다가 패한 “무광왕(武廣王, 필자주 : 관세음응험기 기록 속의 백제 무광왕을 말한다)”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 익산 금마에 도읍하고 세웠던 반도백제(무광왕백제)의 흔적들이다.

 

  그런데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통일신라 때의 웅천주(熊川州)는 바로 옛 대륙백제(온조백제)의 도읍이었던 웅진(熊津)으로서,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盧龍縣)을 말하는 것이다.[필자주 : 그런데 지금 중국에서는 이곳을 백이와 숙제의 고향이라 하여 이제고리(夷齊故里)”라 하고 있으나, 지명이 명, 청대에 이동된 것을 모르는 엉터리 주장일 뿐이다]

  김헌창은 바로 이곳 웅천주(熊川州)의 도독으로 부임한 후 웅진(필자주 : 웅진은 백제의 옛 도읍으로서 지금의 발해 북쪽 진황도 노룡현을 말하고, 웅천은 청룡하를 말한다)을 중심으로 상당한 땅을 영향권 내에 두고 신라에 반기를 들었던 것인데, 겨우 한 달 만에 완전히 제압당하고 자살함으로써 반란은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니 비록 한 달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평생에 소원했던 왕위에는 올라 보았으니 그 한이 조금은 풀렸을까?

  위 그림을 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