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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고국(高句麗故國)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고북수진(古北水鎭)이 확실 - 최초주장

윤여동 2024. 6. 1. 17:51

윤여동설 고구려고국(高句麗故國)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고북수진(古北水鎭)이 확실 - 최초주장

 

 

 

[: 북경 동북쪽 사마대장성과 고북수진(古北水鎭) 전경]

 

 

[: 옛 고구려고국(高句麗故國)이었고, 발해국의 서경압록부였으며, 거란() 녹주압록군절도였던 지금의 북경 동북쪽 고북수진(古北水鎭) 풍광]

 

 

[: 고북수진 북쪽을 지나는 사마대장성]

 

  “고구려고국(高句麗故國)”은 과연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지만 그 위치를 잃어버린 곳 중의 하나가 바로 고구려고국(高句麗故國)이었다.

  고구려고국(高句麗故國)이란 고구려의 고향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이곳의 위치를 정확하게 찾으면, 고구려의 최초 발원지를 찾을 수 있고, 또 고구려고국(高句麗故國)에 조성된 고구려 여러 왕들의 왕릉을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시조인 추모왕(鄒牟王)의 능은 용산(龍山)에 장사지냈다고 하였고, 호태왕비문을 보면 홀본 동쪽 용산(龍山)에서 황룡을 타고 승천하였다고 하였으니, 추모왕의 능은 졸본 동쪽 용산(龍山)에 조성했을 것이고,

  2대 유리왕릉(琉璃王陵)은 국내 부근의 두곡동원(豆谷東原)에 조성했다고 하였고,

  3대 대무신왕릉(大武神王陵)은 국내 부근의 대수촌원(大獸村原)에 조성했다고 하였으며,

  4대 민중왕릉(閔中王陵)은 왕의 유언에 따라 국내 부근의 민중원석굴(閔中原石窟)에 장사 지냈다고 하였다.

 

[: 고구려왕릉 조성지 고구려고국(高句麗故國) 추정지 고북수진(古北水鎭) 부근의 지형]

 

  그런데 5대 모본왕(慕本王)의 능은 모본원(慕本原)”에 조성했다고 하였고[필자주 : 모본(慕本)이라는 의미 역시 근본을 그리워하다라는 의미로서 고국(故國)이라는 의미와 일맥상통한다고 판단 된다.] 그렇다면 모본원은 고구려고국(高句麗故國)의 모본원으로 볼 수 있을 것이고,

  6대 태조대왕(太祖大王), 7대 차대왕(次大王)의 왕릉 조성지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이 왕릉들 역시 고구려고국(高句麗故國)에 조성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8대 신대왕(新大王)의 능을 고국곡(故國谷)”에 조성했다고 고국(故國, 高句麗故國)”이 구체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하는데, 9대 고국천왕(故國川王)의 능은 고국천원(故國川原)에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심지어 고구려가 평양성 또는 황성에 도읍하고 있던 때인 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의 능도 고국지원(故國之原)에 조성했고, 18대 고국양왕(故國壤王)의 능도 역시 고국양(故國壤)에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고구려왕릉 조성지 기록]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혹시 고구려왕실에서는 5대 모본왕부터는 도읍과는 별개로 고국(故國)”이라는 곳에 고구려왕릉들 모두를 조성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16대 고국원왕 때 전연(前燕) 모용황의 침공을 받아 환도성을 함락당했을 때 모용황이 고국원왕의 아버지인 15대 미천왕릉을 파서 그 유골을 가져갔었는데, 미천왕은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했을 때의 왕이었고, 그는 평양성에서 죽었다. 그런데 이때 모용황은 고구려 평양성까지는 진격하지 못했었고, 요동성에서 가까운 환도성만 함락시킨 후 고국원왕의 어머니(미천왕의 왕비)인 주씨와 고국원왕의 왕비를 포로로 잡고, 미천왕의 능을 파서 그 유골을 가지고 철군했었다. 이를 보면 고구려 미천왕릉은 당시 도읍이었던 평양성(平壤城) 부근에 조성했던 것이 아니라 환도성(丸都城) 부근에 위치했던 고구려고국(高句麗故國)의 미천지원(美川之原)에 능을 조성했던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리하였기 때문에 모용황이 미천왕의 능을 파서 그 유골을 가져갈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이 그러했다면 8대 신대왕릉이 조성된 고국곡(故國谷), 9대 고국천왕릉이 조성된 고국천원(故國川原), 16대 고국원왕릉이 조성된 고국지원(故國之原), 18대 고국양왕릉이 조성된 고국양(故國壤)은 말할 것도 없고, 10대 산상왕릉이 조성된 산상릉(山上陵), 11대 동천왕릉이 조성된 시원(柴原), 12대 중천왕릉이 조성된 중천지원(中川之原), 13대 서천왕릉이 조성된 서천지원(西川之原), 14대 봉상왕릉이 조성된 봉산지원(烽山之原), 17대 소수림왕릉이 조성된 소수림(小獸林) 등도 모두 고구려고국(高句麗故國) 부근에 위치했던 지명이었을 가능성이 많고, 그 이후 왕릉조성지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19대 광개토대왕릉부터도 고구려고국(高句麗故國)에 조성했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그리하여 고구려에서는 고국(故國)”이라는 일정한 장소에 왕릉들을 조성했기 때문에 굳이 왕릉조성지를 따로 기록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국(故國)이라는 곳은 고구려에 있어 어떠한 의미가 있던 곳일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이곳 고국(故國)이 북부여 건국시조 해모수(解慕漱) 천제의 고향이었거나, 졸본부여 건국시조 동명왕(東明王)의 고향이었거나 고구려 건국시조 추모왕의 어머니 유화태후(柳花太后)의 고향이었을 가능성이 많은데, 고구려고국(高句麗故國)은 과연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요사(遼史)동경도 녹주압록군절도(渌州鴨渌軍節度)조를 보면, “녹주압록군절도는 본래 고구려고국(本高句麗故國)인데, 발해에서는 서경압록부(西京鴨渌府)라고 불렀다. 성의 높이는3장이고 광륜(둘레)20리이다. 신주 환주, 풍주, 정주 4개 주를 다스린다(渌州鴨渌軍節度 本高()麗故國 渤海號西京鴨渌府 城高三丈廣輪二十里 都督 神,,,正 四州事)”라고 기록되어 있고, 환주(桓州)는 고구려의 중도성이다........(녹주압록군절도의) 서남쪽 200리에 있다(桓州 高()麗中都城 故縣三桓都神鄕淇水皆廢 高()麗王於此剏立宮闕 國人謂之新國 五世孫釗晉康帝建元初爲慕容皝所敗宮室焚蕩 戶七百 隸渌州 在西南二百里)”라고 기록되어 있어 환주(桓州)가 곧 환도(丸都)임을 알 수 있고, “풍주(豐州)는 발해에서 반안군을 설치했다........(녹주압록군절도의) 동북 210리에 있다.(豊州 渤海置盤安郡……隷淥州 在東北二百一十里)” “정주(正州)는 본래 비류왕의 옛땅이다.....(녹주압록군절도의) 서북쪽 380리에 있다)(正州 本沸流王故地 國爲公孫康所倂 渤海置沸流郡 有沸流水……隷淥州 在西北三百八十里)”라고 기록되어 있어 옛 송양의 비류국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송양의 비류국은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용관진(龍關鎭)으로, 고구려 환도성(丸都城)은 북경시 회유현 발해진(渤海鎭)으로 비정되며, 거란()의 상경임황부는 내몽골 오란찰포시 상도현[商都縣, 필자주 : 거란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언젠가 상도(上都)를 상도(商都)로 바꾼 듯하다)으로 밝혀졌고, 서경대동부는 산서성 대동시(大同市),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는 지금의 중국 북경(北京)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주(正州)의 동남쪽 380리 지점이며, 환주(桓州,丸都城)의 동북쪽 200리 지점에 위치했던 발해의 서경압록부와 요나라 때의 녹주압록군절도는 바로 지금의 북경 동북쪽고북수진(古北水鎭)”으로 비정해 볼 수 있다.

 

신당서 발해전을 보면, “고구려 옛 땅(高句麗故地)으로 서경(西京)을 삼고 압록부(鴨淥府)라 하니, 신주(神州), 환주(桓州), 풍주(豐州), 정주(正州) 4주를 다스린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대 요동(遼東)이었던 지금 북경의 동북쪽 고북수진(古北水鎭)이 바로 우리가 그렇게도 찾아헤맸던 고구려고국(高句麗故國)”이었던 것이다.

 

  앞으로 이 부근에서 고구려왕릉들이 많이 발견될 것인데, 그때가 되면 필자가 주장하는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이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后城鎭), 국내성이 연경현 영녕진(永寧鎭)이었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고, 평양성이 하북성 승덕시(承德市) 임이 밝혀질 것이며, 고대의 요동이 지금의 북경(北京)이라는 것도 밝혀질 것이다. 그리고 고대의 요수가 지금의 영정하(永定河)이며, 압록수가 백하, 밀운수고이며, 살수가 조하(潮河), 패수가 난하(灤河)임이 증명될 것이다.

  그리하여 고구려가 지금의 요하 동쪽에 위치했었다는 엉터리 역사학자들의 논리가 여지없이 깨어지게 될 것이다.

  기다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