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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신라 51대 진성여왕릉(眞聖女王陵) 조성지 황산(黃山)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 2024. 6. 16. 14:10

윤여동설 신라 51대 진성여왕릉(眞聖女王陵) 조성지 황산(黃山)의 위치  - 최초공개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보면, 가야의 강역에 대하여,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방향이 약간 비틀려 기록되어 있지만, 가야의 최대 강역이 동쪽은 황산강까지, 서쪽은 지리산까지, 남쪽은 바다에 닿았고, 북쪽은 가야산까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51대 진성여왕 2(A.D.888) 조를 보면, “왕이 그전부터 각간 위홍(魏弘)과 통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항상 궁중에 들어와서 일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명하여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를 수집, 편찬하게 하여 이를 삼대목(三代目)이라 하였다. 위홍(魏弘)이 죽으니 추증하여 시호를 혜성대왕(惠成大王)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위홍(魏弘)의 무덤을 어디에 조성했는지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으나, 아마 가야산 부근의 황산(黃山)에 조성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곳이 위홍이 태어난 곳이었거나 위홍이 생전에 특별히 그곳을 좋아하여 자신이 죽거든 황산에 묻어달라 유언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11(A.D.897) 조를 보면, 여름6월 왕이 좌우 측근자들에게 말하기를, ‘근래에 백성들이 곤궁해지고,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니 이는 과인이 부덕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진 자에게 양위하려 한다하고는 왕위를 태자 요(필자주 : 헌강왕의 아들로서 진성여왕의 조카이고, 52대 효공왕이다)에게 전하였다..........

  겨울12월 왕이 북궁(北宮, 필자주 : 가야산 해인사를 말한다)에서 훙()하였다. 시호를 진성(眞聖)이라 하고 황산(黃山)에 장사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진성여왕은 각간인 위홍이 죽자 추증하여 혜성대왕(惠成大王)이라 하였고, 가야산 해인사(海印寺)를 혜성대왕 원당으로 삼아 위홍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도 한다. 그리고는 자신도 만년에 왕위를 조카에게 양위하고는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살다가 얼마 후 죽게 되고, 황산(黃山)에 묻히게 되는 것이다.

 

[고운 최치원 선생 초상]

 

많은 사람들은 신라 진성여왕이 문란한 왕이었다고 하나 필자가 보기에는 그렇게 성적, 도덕적으로 문란한 왕이었다면, 어떻게 그녀의 시호를 참 성인이라는 의미인 眞聖(진성)”이라 했는지 매우 의문스럽고, 고운 최치원이 바로 이 진성여왕 때 사람인데 그렇게 문란한 왕이었다면 최고운이 그러한 왕 아래에서 벼슬을 했을 리 만무하고, 진성여왕이 죽은 이후 여왕을 추모했을 리도 없을 것이다. 당시 신라에서는 왕족끼리의 근친혼은 너무도 당연했고, 삼촌과 조카가 혼인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아마 후대에 왜곡되어 잘못 전해졌을 것이다.

 

  위홍의 무덤이 가야산과 가까운 그곳 황산(黃山)에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가야산 부근이 경치가 아름답고, 만년에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와 살아보니 그 부근이 좋아 보여 황산(黃山)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어찌되었든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의 능은 당시 신라의 도읍이었던 서라벌(徐羅伐)이 아닌 황산(黃山)”에 조성하였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기록이 확실하게 전해졌는데도 불구하고 신라 진성여왕릉과 그 조성지인 황산(黃山)에 대하여 밝힌 사람이 없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사실 신라와 가야는 한반도 남해안에 위치했던 나라가 아니라 발해 북쪽 대륙에 위치했던 나라였고,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가 신라의 서라벌(徐羅伐)이었고, 요녕성 호로도시 흥성시의 흥성고성(興城古城)이 금관가야의 도읍 금관성(金官城)이었으며, 그곳의 수산(首山)이 구지봉(龜旨峯)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이 이러하니 발해 북쪽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을 황산(黃山)을 어찌 한반도에서 찾을 수 있었을 것이며, 더구나 한반도에 조성되지도 않은 신라 진성여왕릉을 어찌 한반도에서 찾아낼 수 있었으리오.

 

  그렇다면 진성여왕이 만년에 살다 죽은 북궁(北宮) 즉 진짜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와 죽어 묻힌 진짜 황산(黃山)은 지금의 어느 산을 말하는 것일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황산강(黃山江)과 가야산(伽耶山)은 옛날 신라와 가야의 국경 역할을 했던 강과 산이었다. 가야산은 일명 우두산(牛頭山)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산 정상 부근에 소머리 형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붙여진 별칭이었고, 이 가야산 서쪽기슭에 해인사(海印寺) 라는 절이 있었으며, 황산강(필자주 : 후일의 낙동강)은 황산(黃山)에서 발원하는 강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런데 필자는 신라의 천년 도읍 서라벌(徐羅伐)이 한반도 경주가 아니라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임을 이미 밝혔고, 원래의 가야산(伽耶山)도 한반도의 합천 가야산이 아니라 발해 북쪽 호로도시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 정상 부근에 소머리 형상이 선명하게 나타나는 지금의 대홍라산(大虹螺山)임을 밝혔으며, 황산강(黃山江)도 한반도의 낙동강(洛東江)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호로도시 동북쪽을 흘러 발해 금주만(錦州灣)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금의 칠리하(七里河) 임도 이미 밝혔었다.

  따라서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이 죽어 묻힌 황산(黃山)은 바로 이 칠리하(七里河) 최상류에서 찾으면 되는 것인데, 지금의 요녕성 호로도시 북쪽 대홍라산의 동쪽 산을 말하는 것으로 비정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그 부근을 뒤져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의 능을 찾으면 된다.

  아래 그림들을 보시라.

 

[위 : 가야산(우두산)으로 비정되는 지금의 대홍라산(大虹螺山)은 발해 북쪽 요녕성 호로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좌표 동경120도42분31초 북위40도56분01초]

 

[위 : 호로도 대홍라산(가야산, 우두산) 정상부에 나타나는 소머리 형상입니다]

 

[위 : 요녕성 호로도시 북쪽 가야산(우두산)과 황산(黃山) 부근의 지형입니다]

 

 

[위 : 진성여왕릉과 위홍의 능이 동, 서로 나란히 조성되었던 것은 아닐까요?]

 

[위 : 신라 진성여왕릉 추정지, 좌표 : 동경120도53분24초 북위40도57분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