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중국 사서들에 백제 건국시조로 기록되어 있는 “구태(仇台)”는 8대 고이왕의 할아버지였고, 반도백제 무광왕(武廣王)의 6대조였다 – 최초 주장

윤여동 2024. 10. 19. 07:17

윤여동설 - 중국 사서들에 백제 건국시조로 기록되어 있는 구태(仇台)”8대 고이왕의 할아버지였고, 반도백제 무광왕(武廣王)6대조였다 최초 주장

 

 

 

 

  삼국사기 잡지 제1 제사 조를 보면, “책부원구에 이르기를 백제는 연중 네 철의 중간 달마다 왕이 하늘과 5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그 시조 구태(仇台)의 사당을 서울에 세우고 해마다 네 차례씩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다라고 중국 사서의 기록을 인용했으나 찜찜했던지 주를 달아 해동고기에 의하면 혹은 시조 동명왕(東明王, 필자주 : 동명왕은 주몽이 아니라 사실은 졸본부여의 건국시조를 말하는 것이다)이라 하였고 혹은 시조 우태(優台)라 하였는데, 북사와 수서에는 모두 동명의 후손 구태(仇台)가 대방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고, 여기에는 시조 구태라 하였는데 동명이 시조로 된 사적이 명백하므로 다른 것은 믿을 수 없다라고 구태의 백제건국시조설을 부정해 놓았는데, 필자가 보기에 김부식은 구태(仇台)라는 인물의 신분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주서 백제전을 보면, “백제는 그 선조가 대개 마한(馬韓)의 속국이며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비로소 대방(帶方) 땅에 나라를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수서 백제전에는, “동명(東明)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자가 있었는데,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비로소 대방(帶方)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나라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의 딸을 아내로 삼았는데, 나라가 점점 번창하여 동이 중 강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북사 백제전에도, “동명의 후손에 구태(仇台)가 있었는데, 매우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비로소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는데, 마침내 동이 중 강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우리의 일반적인 역사상식과 다르게 백제의 건국시조를 온조왕이 아닌 구태(仇台)”라는 인물이라 하고 있고, 건국지를대방고지(帶方故地)”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 사서들은 왜 백제(百濟)의 건국시조를 구태(仇台)라고 기록했고, 대방고지(帶方故地)에서 백제가 건국되었다고 기록했으며, 공손도(公孫度)와 연관시켰던 것일까?

  후한 말에 공손도(?-204)가 요동군(遼東郡)을 장악했을 때, 백제는 5대 초고왕(재위166-214)때였다.

  따라서 당시 공손도는 서쪽의 중국과 북쪽의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하여 요동 동쪽 1천여리에 가까이 위치하고 있던 동쪽의 백제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실제 자신의 딸을 백제왕족인 부여구태(扶餘仇台)에게 시집보냈을 가능성이 있고, 9대 책계왕도 대방왕(필자주 : 공손공으로 추정된다)의 딸 공손보과와 혼인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그렇다면 구태(仇台)라는 인물은 과연 누구인 것일까?

  우리의 일반적인 역사상식으로는 백제의 건국시조를 온조왕으로 보는 게 보편적이다. 따라서 백제에서 건국시조인 온조왕의 제사를 철따라 지냈다던가 또는 온조왕의 증조할아버지였고, 졸본부여의 건국시조였던 동명왕(東明王, 필자주 : 동명왕은 고구려 주몽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졸본부여의 건국시조로서 백제 온조왕의 증조할아버지를 말하는 것이다)의 제사를 지냈다면 이해하기가 쉬울텐데, 구태(仇台)를 공손도의 사위라 하고, 대방 옛땅에서 나라를 세운 백제의 건국시조라 하며, 백제에서 1년에 네 번 제사를 지냈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또한 백제의 건국시기와 공손도의 생존시기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고개를 갸우뚱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이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잘 모르고 있었던 숨겨진 이야기가 있었다.

 

  사실 구태(仇台)라는 사람은, 온조백제(대륙백제) 4대 개루왕의 차자(둘째아들)로서 5대 초고왕의 동생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이때 백제에서는 조선시대 대군(大君)에 해당되는 이 부여구태(扶餘仇台)에게 옛 마한(馬韓) 땅이었던 대방군(帶方郡) 부근의 땅을 영지로 내려 주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일에 이르러 장자파인 초고왕의 후손과 차자파인 구태(仇台)의 후손 사이에 온조백제(대륙백제)의 왕위를 놓고 쟁탈전이 벌어지게 된다.

  즉 장자파인 7대 사반왕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바로 차자파인 8대 고이왕이 그 왕위를 빼앗아 9대 책계왕, 10대 분서왕까지 왕위가 이어지는데, 8대 고이왕은 차자파로서는 처음으로 온조백제(대륙백제)의 왕위에 오른 후 죽은 자기의 할아버지 구태(仇台)와 아버지(실명)를 왕으로 추증했을 가능성이 많고, 또 철 따라 제사도 지냈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장자파인 7대 사반왕의 동생의 아들인 11대 비류왕이 온조백제(대륙백제)의 왕위를 잇게 되고, 다시 차자파 분서왕의 아들인 12대 계왕이 왕위에 오르고, 다시 장자파 비류왕의 아들 13대 근초고왕이 남한성(南漢城)에서 온조백제(대륙백제)의 왕위에 오르자, 차자파 계왕의 아들인 무광왕(武廣王)은 대방고지를 중심으로 삼아 그곳에서 스스로 왕위에 올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백제는 왕실이 두 편으로 나뉘어 동쪽의 한산(漢山)을 중심으로 한 장자파와 서쪽의 대방고지를 중심으로 한 차자파 두 세력이 동서로 쪼개져 온조백제(대륙백제)의 왕위를 놓고 다투는 상황으로써 내란 상태였을 것이다.

 

  그랬다가 장자파인 근초고왕이 365년경 최종 승리하자 패한 무광왕(武廣王)은 추종자들을 이끌고 발해 북쪽 대륙을 떠나 동국(東國, 필자주 : 한반도)으로 도망쳐 와서 지모밀 땅에 도읍하고 다시 나라를 세워 국호를 역시 백제(百濟)라 하게 되는 것이다.[필자주 : 지모밀 땅은 지금의 전북 익산 왕궁리 일원을 말하는 것으로서 많은 사람들은 한반도의 백제 흔적들을 삼국사기 기록 속 온조백제의 흔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사실은 무광왕의 반도백제 흔적들이다]

 

  필자는 발해 북쪽 요동 동쪽에 위치했던 원래의 온조백제를 대륙백제라 부르고, 무광왕이 한반도에 새로 세운 백제를 반도백제(半島百濟)라 부르는데, 무광왕이 한반도로 건너와 백제를 세운 때가 4세기 중엽인 365년경이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4세기 중엽부터의 백제유물이 출토되는 이유로 보고 있고, 관세음응험기에서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새로이 절을 지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기록 속의 백제 무광왕(百濟 武廣王)”이 바로 반도백제의 건국시조인 12대 계왕의 아들 무광왕(武廣王)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세상에 두 개의 백제 즉 대륙백제와 반도백제가 동시에 존재하게 되는 상황이 되었는데, 대개 대륙백제는 중국 북조의 나라들과 교류하게 되고, 반도백제는 중국 남조의 나라들과 교류하게 되기 때문에 중국 사서들에 백제(百濟)에 대한 기록들이 혼란스런 이유로 본다.

 

  그러다가 21대 개로왕 때 이르러 대륙백제의 국세가 약해지자 개로왕(근개루왕이라고도 부른다)은 당시 반도백제의 모도왕(牟都王)에게 두 백제의 통합을 제안하게 된다. 그러자 모도왕은 그에 동의하고 아들인 곤지(필자주 : 동성왕, 무령왕의 아버지)를 대륙백제로 보내 통합절차를 추진하던 중에, 대륙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받아 개로왕과 왕비, 왕자 등이 모두 고구려군에게 잡혀 죽게 되고, 도읍 한성(漢城)도 빼앗기게 된다.

  그리하여 개로왕의 뒤를 이어 동복동생이었던 문주왕이 새로이 왕위에 올라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고, 다시 두 백제의 통합작업을 재개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대륙백제에서 두 백제의 통합에 반대한 세력도 있었으니 바로 대륙백제 해씨들이었고, 그리하여 이들은 문주왕과 곤지를 죽여 버리고, 나이 어린 삼근왕을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리게 되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반도백제 모도왕(牟都王)은 대노했고, 해씨(解氏)들을 제거하고 대륙백제를 흡수 통합해 버린다.

  그리고는 대륙에서 죽은 곤지의 둘째 아들이며, 자신의 둘째 손자인 모대(모태라고도 한다)를 대륙으로 보내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렸는데, 이가 곧 동성왕이고, 또 동성왕이 백가에게 시해당하자 동성왕의 이복동생이었던 사마(무령왕)를 다시 대륙백제로 보내 백가의 난을 진압하게 하고 동성왕의 뒤를 이어 대륙백제의 왕위에 오르게 하는데, 그 이후에도 대륙백제의 왕위에는 구태(仇台)의 후예이며, 반도백제 무광왕(武廣王), 모도왕(牟都王)의 후손들이 모두 대를 이어 오르게 된다.

 

  자 상황이 이랬을 경우,

  반도백제의 왕실과 차자파로서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던 동성왕으로부터 그 이후 대륙백제의 왕들은 자신들의 직계조상이며, 차자파의 시조 격인 구태(仇台)의 제사를 철따라 지냈을 것은 쉽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인데, 이러한 내막을 확실하게 알 수 없었던 중국 사람들은 백제의 시조가 구태(仇台)라고 인식했던 것이라 할 수 있고, 그리하여 사서에 구태가 대방 옛땅에서 백제를 건국했고, 백제에서 그 시조 구태에게 일년에 네 번 제사를 지낸다고 기록했을 것이다.

 

  구태(仇台)는 백제의 건국시조가 아니라 사실은 대륙백제 4대 개루왕의 둘째 아들로서 실제 그가 백제의 왕위에 오른 적은 없으나, 대륙백제 8대 고이왕을 비롯한 차자파 왕들이나 반도백제 건국시조 무광왕(武廣王)과 모도왕(牟都王) 그리고 그 후손 왕들이 구태를 중시조로 받들고 철따라 제사 지냈던 인물이었을 뿐 실제 백제의 건국시조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