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가 옮겨갔던 건안성(建安城)은 지금의 어디일까?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가 옮겨갔던 건안성(建安城)은 지금의 어디일까? – 최초공개
[건안산성(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난평현 소과영촌), 좌표 : 동경117도26분25초 북위40도54분38초]
백제가 항복한 지 16년이 흐른 676년에 이르러 당나라는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건안성(建安城)으로 옮기게 되는데, 이의 위치에 대하여 역사연구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다.
☆ 백제(대륙백제, 온조백제)는 발해 북쪽 대륙 난하 하류에 위치했었다. 지금의 진황도 도산(都山)이 백제의 북한산이었고, 진황도 노룡현이 웅진(熊津)이었다.
그러나 역사연구자라면 이 건안성(建安城)의 위치에 대하여 그리 혼란스러워할 곳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곳 고구려 건안성(建安城)은 원래는 고조선의 평곽성(平郭城)이었던 곳으로서 도읍이었던 백악산아사달(궁홀산아사달)을 방어하는 북쪽 방어성이었고, 고구려 장수왕 때인 438년에는 북연의 풍홍이 고구려로 망명해오자 처음 배치했던 곳이었으며, 후일 645년에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에 원래의 작전계획은 요수(遼水)를 건너 요동성(遼東城), 안시성(安市城) 등을 함락시킨 후 진군하여 건안성(建安城)을 지나 당시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평양성(平壤城, 옛 고조선의 왕검성)으로 향하려고 하였으나, 압록강도 건너기 전에 위치한 안시성(安市城, 필자주 : 옛 환도성)에서 막혀버리자 당 태종은 작전계획을 변경하여 오골성(烏骨城)으로 우회하여 평양성을 공격하려고도 했었으나 부하들의 반대에 부딪치고, 날씨도 추워지자 군사를 돌려 철군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서의 기록을 보자.
자치통감 권202 당 고종 의봉원년(A.D.676) 2월 조를 보면,
“웅진도독부를 건안성으로 옮기고, 앞서 옮겼던 서주와 연주의 백제 백성들 모두(필자주 : 12,807인이라한다)를 건안에 배치하였다(徙熊津都督府於建安故城其百濟戶口先徙於徐兗等州者皆置於建安)”라고 기록되어 있고,
그 다음 해인 677년에는 부여융(백제 의자왕의 아들)을 광록대부 태상원외경 겸 웅진도독대방군왕(熊津都督帶方郡王)으로 봉한 후 본국으로 보내 백제유민을 관할하게 하려고 하였으나, 이때 신라가 강성하여 감히 옛 나라(舊國)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고구려에 의탁하고 있다가 죽었다고 하였는데, 아마 새로 옮긴 건안성의 웅진도독부에서 살다 죽었던 듯하다.
그러자 측천무후가 또한 그의 손자 부여경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하려고 했으나 그 지역을 이미 신라, 발해말갈 등이 나누어 차지해 버렸기 때문에 드디어 백제의 국통이 끊기고 말았다고 했다.
이렇게 발해 북쪽 대륙에 위치했던 우리의 백제(대륙백제, 온조백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는데, 지금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발해 북쪽에 위치했던 대륙백제(온조백제)의 기록들 모두를 한반도로 가져와 한반도 지형, 지명에 맞추어 해석하려 하고 있으니 전후좌우가 맞아떨어지지를 않는 것이다.
[옛 평곽성, 건안성이었던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난평현]
필자가 찾아낸 고구려 평곽성(平郭城), 건안성(建安城)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하북성 승덕시 난평현(灤平縣) 일원을 말하는 것으로서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는 바로 이곳으로 옮겨졌다가 발해국(渤海國)에 병합되어 버렸던 것이고, 발해국은 그 땅을 중심으로 서경압록부(西京鴨淥府)를 건설했다.[필자주 : 발해국 서경압록부의 치소는 지금의 북경 동북쪽 고북수진(古北水鎭)에 설치되었는데, 이곳은 옛날 고조선(왕검조선)의 후기도읍지 백악산아사달이었고, 발해국의 서경압록부가 되었다가 발해국 멸망 후에는 거란(요)의 녹주압록군절도가 되었던 곳이다]
[참고]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정의] 660년 당나라가 백제 웅진(熊津) 지역에 설치한 통치 기구.
[개설] 웅진 지역은 사비 천도 이전 63년간 백제의 수도로 기능하였다. 사비로 천도하기 이전까지 웅진이 수도로 결정된 이유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으며, 방어상 유리하다는 점도 그중 하나였다.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사비성이 함락될 당시 의자왕 역시 웅진성으로 피신한 사실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제정경위 및 목적] 백제는 서기 660년 7월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였다. 당은 백제의 고지(故地)에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漣)·덕안(德安)의 5도독부를 설치하려 했으나 백제 부흥군이 기세를 떨침에 따라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결국 당은 662년 방어에 유리하면서 중요한 거점 지역의 하나인 웅진 지역의 웅진도독부를 중심으로 지배 체제를 재편하였다.
[관련기록] 웅진도독부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에 “이때에 이르러 웅진·마한·동명·금련·덕안의 5도독부를 나누어 두고 각각 주(州)·현(縣)을 다스리게 하였으며, 우두머리를 발탁하여 도독(都督)·자사(刺史)·현령(縣令)으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낭장(郎將) 유인원(劉仁願)에게 명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고, 또 좌위랑장(左衛郞將) 왕문도(王文度)를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아 남은 무리를 어루만지게 하였다(至是 析置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五都督府 各統州縣 擢渠長爲都督·刺史·縣令以理之 命郞將劉仁願守都城 又以左衛郞將王文度爲熊津都督 撫其餘衆).”라고 하여 웅진도독부가 설치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에도 “황제가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나라로 돌아가 신라와 옛 원한을 풀고 유민들을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인덕(麟德) 2년(665)에 신라 왕과 웅진성에서 모여 백마를 죽이며 맹세하였는데, 인궤가 맹세의 글을 지었다. 이에 금가루로 쓴 증표를 만들어 신라의 종묘 안에 간직하였다. 맹세의 글은 신라본기에 보인다. 인원 등이 돌아가니, 부여융은 무리가 흩어질까 두려워하다가 역시 당나라 서울로 돌아갔다. 의봉(儀鳳) 연간(676~679)에 부여융을 웅진도독 대방군왕으로 삼아 나라로 돌아가 남은 무리를 안정시키게 하고, 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으로 옮겨 거느리게 하였다. 이때 신라가 강성하므로 부여융이 감히 옛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구려에 의탁하여 다스리다가 죽었다(帝以扶餘隆爲熊津都督 俾歸國 平新羅古憾 招還遺人 麟德二年 與新羅王會熊津城 刑白馬以盟 仁軌爲盟辭 乃作金書鐵契 藏新羅廟中 盟辭見新羅紀中 仁願等還 隆畏衆攜散 亦歸京師 儀鳳中 以隆爲熊津都督帶方郡王 遣歸國 安輯餘衆 仍移安東都護府於新城以統之 時新羅强 隆不敢入舊國 寄理高句麗死人).”라고 하여 웅진도독에 백제의 태자였던 부여융이 임명된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 중국 측의 사료로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 『책부원귀(冊府元龜)』 등에서도 웅진도독부에 대한 기사를 전하고 있다.
[변천] 당은 663년 백제 부흥군의 수도였던 주류성을 함락시킨 후, 664년에서 665년 사이에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여 웅진도독부 체제를 완성하였다. 동명(東明)·지심(支尋)·노산(魯山)·고서(古西)·사반(沙泮)·대방(帶方)·분차(分嵯)의 7주(州)와 52현(縣)을 두어 백제를 지배한 것이다. 또한 유인원은 웅진도독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의 취리산 회맹을 강요하여 백제의 고지에 대한 신라의 진출을 막아내면서 고구려 공격을 위한 배후 기지로 활용하였다.
웅진도독부는 668년 고구려 멸망 후에는 동맹국이었던 신라를 견제하는 당의 정책을 수행하는 전진 기지의 성격을 지니기도 하였다.
672년 신라에 의해 웅진도독부는 백제 고지에서 축출되었다.
676년 당이 안동도호부를 요동고성으로 옮기고, 웅진도독부는 요동의 건안성으로 옮겼다.
677년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이동시키고, 부여융을 웅진도독대방군왕에 책봉하였다.
681년 요동도독으로 부임했던 보장왕의 모반 사건에 연루된 부여융은 유배되고, 요동 건안성의 웅진도독부도 폐지되었다.
[의의와 평가] 웅진도독부는 처음에 5도독부 체제 중의 하나였으나 웅진성 및 웅진 지역의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웅진도독부 단일 체제로 재편하여 운영하였다.
당시 당은 대외 팽창정책을 취하면서 정복 지역에 대한 기미정책(羈縻政策)을 실시하였다. 이는 명목상으로는 군현제(郡縣制)를 채택하여 부주현(府州縣)을 두고, 이민족의 왕·추장을 도독(都督)·자사(刺史)·현령(縣令) 등에 임명하여 자치를 맡기는 방식이었다. 당은 백제 고지에서도 부여융을 웅진도독에 임명하여 백제 유민들의 부흥운동을 억제하는 데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부여융의 웅진도독부 체제에 대해서는 친당 괴뢰정권의 수립으로 보아 부여융이 당의 기미정책에 이용당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예군(禰軍)과 법총(法聰)이라는 백제계 관료들의 활약과 백제를 계승한 일본과의 접촉 등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당의 현실적인 힘을 인정하면서 신라의 팽창을 저지하여 백제 자치구를 만들고자 하였던 일종의 백제 부흥을 위한 과정으로 재평가 되어야 한다는 견해도 제시되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