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고구려 평양성(平壤城)과 평양궁(平壤宮), 황궁(黃宮), 장안궁(長安宮)의 위치를 밝힌다 - 최초공개

윤여동 2025. 6. 7. 18:58

윤여동설 고구려 평양성(平壤城)과 평양궁(平壤宮), 황궁(黃宮), 장안궁(長安宮)의 위치를 밝힌다 - 최초공개

 

 

 

  고구려의 평양(平壤)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承德市)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곳의 열하행궁(熱河行宮) 자리가 옛 고조선의 왕검성(王儉城),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 터였다.

  그런데 청나라 때 그곳을 행궁(行宮)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대대적으로 개보수를 하였기 때문에 지금 옛 왕검성과 평양성의 흔적들이 모두 열하행궁(피서산장)에 가리워져 있어, 역사연구자들이 고조선의 왕검성과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를 찾고 이해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하북성 승덕시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난하(灤河)에 합류되는 지금의 무열하(武烈河)가 옛 선수(仙水)로서 후일의 대동강(大同江)이 되었고, 지금의 이손하(伊遜河)가 옛 습수(濕水)였으며, 지금의 난하가 옛 열수(洌水, 列水)였고, 패수(浿水)였다.

 

[고구려 평양성 : 하북성 승덕시 열하행궁(피서산장)]

 

  고구려 평양성(平壤城)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열하행궁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고구려 평양궁(平壤宮)]

 

  고구려의 평양궁(平壤宮)은 평양성(平壤城) 내에 위치하고 있던 왕궁이었고,

  지금의 피서산장(열하행궁) 자리로 비정된다.

 

 

[고구려 황궁(黃宮)]

 

  고구려 평양성의 동쪽 목멱산(木覓山)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황궁(黃宮)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보락사(普樂寺) 터이다.

 

 

[고구려 장안궁(長安宮)]

 

  고구려 장안궁(長安宮)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보녕사(普寧寺) 터이다.

 

  정리해보면,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열하행궁 전체를 말하는 것이고,

  평양궁(平壤宮)은 평양성 내 왕이 집무를 보던 지금의 피서산장을 말하는 것이며,

  황성(黃城, 평양동황성)은 평양성의 동쪽에 위치했으며, 왕이 정무를 보던 황궁(黃宮)을 황성(黃城)이라 기록했던 것이고,

  장안성(長安城)도 왕이 거처하며 정무를 보던 장안궁(長安宮)을 장안성(長安城)이라 기록했던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지금도 큰 건물을 ()”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아 옛날 고구려 사람들도 黃宮(황궁)이나 長安宮(장안궁)黃城(황성)이나 長安城(장안성)이라 불렀을 수도 있다고 생각되지만, 평양성처럼 외적을 막아낼 정도로 크고, 튼튼하게 쌓은 석축성이 아니라 지금 서울의 경복궁처럼 담장을 쌓은 정도였고,

  그리하여 평상시에는 식량과 무기 등을 평양성에 준비해 두었고, 외침을 받거나 하는 비상시가 되면 왕이 평양성(平壤城)으로 들어가 지켰던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6대 고국원왕은 재위 13(A.D.343), 평양 동쪽에 위치한 황성으로 옮겨 살았었는데, 41(A.D.371)에 이르러 백제 근초고왕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평양성을 쳤고, 이때 고구려 고국원왕은 군사들과 함께 황성(황궁)이 아닌 평양성에서 백제군을 방어하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죽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그를 알 수 있다.

  만약 고구려 황성(황궁)이 외적을 방어할 수 있는 튼튼한 석성이었다면 백제군은 고구려 왕이 있는 황성을 쳤을 것인데, 실제 전투는 황성이 아닌 평양성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필자는 황성은 황궁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즉 평상시에는 왕이 평양성 밖에 위치한 황궁에 거처하면서 정무를 보다가, 외적이 침공해 오는 비상시가 되면, 평양성으로 들어가 방어했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이 남겨질 수 있었던 것이라 보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 황성이 어디었느냐, 장안성이 어디였느냐 설왕설래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당시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이었고, 평양시내에 평양성과 성내에 평양궁이 있었고, 황궁이라는 왕이 거처하는 궁궐이 평양성 밖에 별도로 있었으며, 장안궁이라는 궁궐도 평양성 밖에 별도로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