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윤여동설 899

윤여동설 - 경주에는 세 쌍둥이 왕릉이 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경주에는 세 쌍둥이 왕릉이 있다 - 최초주장                              [위 : 경주 천마총출토 금관]                           [위 : 아프카니스탄출토금관 : 신라 금관과 매우 유사한 구조이다. 신라금관의 원형으로 추정된다]                                                  [위 : 경주 황남대총 출토 금관]                                              [위 : 경주 금관총 출토 금관]   경주에는 거의 똑같은 형식으로 만들어진 세 쌍둥이 왕릉이 있다.  신라 38대 원성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는 괘릉과 42대 흥덕왕릉으로 전해지는 고총과 김유신묘(흥무대왕릉)로 전해지는 고총..

카테고리 없음 2012.03.09

윤여동설 - 한반도 경주에 신라왕릉은 하나도 없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 경주에 신라왕릉은 하나도 없다 - 최초주장 [위 : 경주오릉, 이 고총들을 신라 혁거세왕릉, 알영왕후릉, 남해왕릉, 유리왕릉, 파사왕릉이라고 비정하고 있으나 이는 신라 왕릉들이 아니다] 어느 역사학자가 한반도 “경주에 있는 신라왕릉 중 제대로 명명된 곳이 7기 뿐”이라고 그의 유저 “신라왕릉 연구”에서 주장하였다고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으나, 사실 신라왕릉들이 잘못 비정되었다는 주장은 조선시대부터 꾸준히 제기되어온 것으로서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경주부 능묘 조를 보면, “혁거세릉,미추왕릉,법흥왕릉,태종무열왕릉,진흥왕릉,선덕왕릉,효소왕릉,성덕왕릉,헌덕왕릉,흥덕왕릉,김유신묘,김인문묘,김양묘”에 대한 조성위치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기 때문에 조선시대 사람들은..

카테고리 없음 2012.03.03

윤여동설 - 가야는 한반도에 없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가야는 한반도에 없었다 - 최초주장 일반적으로 우리는 가야가 지금 한반도 가야산의 남쪽, 지리산의 동쪽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인식하고 있으나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기록되어 있는 가야의 위치에 대한 기록과는 그 지형이 다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가야의 서북쪽(필자주 : 사실은 서남쪽이다)에 지리산이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한반도의 지리산은 서북쪽이 아닌 서쪽에 위치하고 있고,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가야산이 가야의 동북쪽에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한반도의 가야산은 북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야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으며, 때로는 수교하고, 때로는 전쟁을 했으며, 결국 후대에 이르러 가야를 병합한 것으로 나타나는 가야 북쪽에 위치했었다는 신라의 위치에 대하여, 신라 5대 왕이..

카테고리 없음 2012.02.25

윤여동설 - 백제와 북위는 지금의 어디에서 싸웠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와 북위는 지금의 어디에서 싸웠을까? - 최초주장 남제서 백제국전을 보면, 백제 동성왕이 남제에 사신을 보내 전쟁에서 공을 세운 신하들의 관작을 요청한 표문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백제가 488년에 일어난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490년에 남제에 보낸 표문에는, 면중왕 저근을 도장군 도한왕으로, 건위장군 팔중후 여고를 영삭장군 아착왕으로, 건위장군 여력을 용양장군 매로왕으로, 광무장군 여고를 건위장군 불사후로, 행건위장군 광양태수 겸장사 고달을 용양장군 대방태수로, 행건위장군 조선태수 겸사마 양무를 건위장군 광릉태수로, 행선위장군 겸참군 회매를 광무장군 청하태수로 임명해달라고 하자 그를 승인하고, 동성왕에게도 그 할아버지 모도왕이 받았던 작위와 같은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

카테고리 없음 2012.02.11

윤여동설 - 새로 밝히는 “백제요서군(百濟遼西郡)과 백제진평군(百濟晉平郡)”의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새로 밝히는 “백제요서군(百濟遼西郡)과 백제진평군(百濟晉平郡)”의 위치 - 최초주장 송서 동이전 백제국전을 보면, “백제국은 본래 고려(고구려)와 함께 요동 동쪽 1천여리에 있다. 후에 고구려는 요동을,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을 진평군(晉平郡) 진평현(晉平縣)이라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 송서는 서기 420-479년까지 존속했던 유송 60년 간의 역사서로서 심약이 남제 무제의 명을 받아 488년에 완성하였다. 백제가 요서군과 진평군을 경략하였다는 내용을 최초로 기록하였다. 양서 동이전 백제전을 보면, “그 나라는 본래 구려(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다. 진(晉 265-419)나라 때에 구려(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경략하자 백제 역시 요서군(遼西郡)..

카테고리 없음 2012.02.04

윤여동설 - 신라 천주(泉州)는 지금의 요녕성 수중(綏中) 부근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신라 천주(泉州)는 지금의 요녕성 수중(綏中) 부근 - 최초주장 삼국사기 신라본기 54대 경명왕 8년(A.D.924) 조를 보면, “정월에 사신을 후당(後唐)에 보내 조공하였는데, 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 왕봉규(王逢規)도 후당(後唐)에 사신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쳤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55대 경애왕 4년(A.D.927) 조를 보면, “3월 후당(後唐) 명종이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 왕봉규(王逢規)를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으로 삼았다. 4월 지강주사(知康州事 : 權知康州事의 오기인듯) 왕봉규가 임언을 사신으로 후당에 보내 조공을 바치니 명종이 중흥전에서 불러보고 물건을 하사하였다. 강주(康州)소관의 돌산(突山) 등 4개 고을이 태조(고려태조 왕건)에게로 귀순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천주..

카테고리 없음 2012.01.28

윤여동설 - 광개토태왕이 요동군을 완전히 차지한 시기는? -최초주장

윤여동설 - 광개토태왕이 요동군을 완전히 차지한 시기는? - 최초주장 지금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광개토태왕이 요동군을 후연으로부터 완전히 빼앗아 차지한 시기를 놓고 영락5년(A.D.395) 이전이다 이후다 하면서 논쟁들을 하고 있는데, 기록들을 꼼꼼하게 검토해 보면 그 정확한 시기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양왕 2년(A.D.385) 조를 보면, "여름6월에 왕이 군사 4만명을 출동시켜 요동을 습격하였다. 앞서 연나라왕 수(모용수)가 대방왕 좌로 하여금 용성을 진무하게 하였는데, 좌는 우리 군사가 요동을 습격한다는 소문을 듣고 사마 학경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였으나 우리 군사가 이들을 쳐부수고 드디어 요동과 현토를 함락시키고 남녀 1만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겨울11월 ..

카테고리 없음 2012.01.20

윤여동설 - 광개토태왕의 정복지 비려 염수와 개선로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광개토태왕의 정복지 비려 염수와 개선로 - 최초주장 호태왕 비문 영락 5년(A.D.395) 을미년 조를 보면, “영락 5년 을미년에 왕이 비려(碑麗)가 붙잡아간 사람들을 돌려보내지 않으므로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3개 부(部) 6, 7백영(營)을 격파하고 셀 수 없을 만큼의 소, 말, 양떼를 노획하고 개선하였다. 양평(襄平) 길을 지나 동쪽으로 ○○성, 역성(力城), 북풍(北豐)을 거쳐 왕이 사냥을 준비시켜 국경도 구경하고 사냥도 즐기면서 돌아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여러 지명이 언급되고 있다. 비려(碑麗), 부산(富山), 부산(負山), 염수(鹽水), 양평(襄平), 역성(力城), 북풍(北豐) 등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카테고리 없음 2012.01.13

윤여동설 - 험독(險瀆)은 지금의 북경남쪽 부근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하여 처음 살았던 험독(險瀆)은 지금의 북경남쪽 부근 - 최초주장     위략에  “(조선왕) 부가 죽고 그 아들 준(準)이 왕위에 올랐다.  그 뒤 20여년이 지나 진항(진승과 항우)이 기병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燕), 제(齊), 조(趙)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점점 준에게 망명해오자 준은 이들을 (고조선의) 서부지역에 살게 하였다.   한나라 때에 이르러 노관으로 연왕을 삼으니 조선과 연나라는 요수(원문은 패수로 되어 있으나 요수의 오기임이 확실하므로 필자가 고쳤다)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관(노관)이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치자 연나라 사람 위만도 망명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조선의) 준(준왕)에게 망명하고는 서쪽 변방에 살게 ..

카테고리 없음 2012.01.06

윤여동설 - 백제 진사왕이 죽은 구원행궁(狗原行宮)의 위치를 찾아라

윤여동설 - 백제 진사왕이 죽은 구원행궁(狗原行宮)의 위치를 찾아라     삼국사기 백제본기 11대 비류왕 22년(A.D.325) "11월 왕이 구원(狗原) 북쪽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손수 사슴을 쏘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16대 진사왕 6년(A.D.390) "겨울10월 왕이 구원(狗原)에서 사냥을 하고 7일만에 돌아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진사왕 8년(A.D.392) 조를 보면,   “가을 7월 고구려왕 담덕(광개토태왕)이 군사 4만을 거느리고 와서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석현성 등 10여성을 함락시켰다.   왕이 담덕이 군사지휘에 능하다는 말을 듣고는 나가서 항전을 하지 못하여 한수(漢水) 북쪽의 부락들을 많이 빼앗겼다.   겨울 10월 고구려가 관미성(關彌城)을 쳐서 함락 시켰다.  왕..

카테고리 없음 2011.12.11

윤여동설 - 백제 초기 낙랑 우두산성(牛頭山城)의 위치를 공개한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백제 초기 낙랑 우두산성(牛頭山城)의 위치를 공개한다 - 최초공개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18년(B.C.1) 조를 보면, “11월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습격하려고 구곡(臼谷)까지 갔다가 큰 눈을 만나 돌아오고 말았다” 라고 하면서 우리 삼국역사서에 우두산성(우수산성)이 등장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원도 춘천도호부 건치연혁을 보면, “본래 맥국인데 신라의 선덕여왕 6년에 우수주(牛首州 : 首는 頭로도 쓴다)로 만들고 군주를 두었다. 문무왕 13년에는 수약주(水若州 : 오근내라고도 하고 수차약이라고도 한다)라고 불렀고, 경덕왕이 삭주(朔州)로 고쳤다가 뒤에 광해주(光海州)로 고쳤다. 고려 태조 23년에 춘주(春州)로 만들었고..............조선 태종 13년에 지..

카테고리 없음 2011.12.10

윤여동설 - 백제 성왕이 죽은 “구천(狗川)”은 철원 마수성(馬首城) 동쪽 부근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 성왕이 죽은 “구천(狗川)”은 철원 마수성(馬首城) 동쪽 부근 - 최초주장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11년(B.C.8) 조를 보면,   “가을 7월 독산(禿山)과 구천(狗川) 두 곳에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으로부터 오는 길을 차단하였다” 라고 하면서  “구천(狗川)”이라는 강이 언급되기 시작하는데, 백제 온조왕이 “나라의 동쪽에는 (신라가 있고, 서쪽에는) 낙랑이 있으며,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편안한 날이 적다”고 말한 기록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이 구천이라는 강이 백제와 낙랑과의 경계지역에 위치한 것을 알 수 있고,    또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32년(A.D.554)조를 보면,   “가을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려고 친히 보, 기병 50여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

카테고리 없음 2011.12.02

윤여동설 - 을파소(乙巴素)의 초상을 찾았다고?

윤여동설 - 을파소(乙巴素)의 초상을 찾았다고?  [용문애에 새겨진 사신대사상(捨身大士像)으로서 고구려 국상 을파소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를 보면, “책성에 태조무열제의 기공비가 있고, 동압록의 황성에 광개토경대훈적비가 있다.안주 청천강변에 을지문덕의 석상이 있고, 오소리강(烏蘇里江) 밖에 연개소문의 송덕비가 있다.평양 모란봉 중간 기슭에 동천제의 조천석이 있고, 삭주 거문산 서쪽 기슭에 을파소의 묘가 있으며, 운산 구봉산에 연개소문의 묘가 있다.(柵城有太祖武烈帝紀功碑 東鴨綠之皇城有廣開土境大勳蹟碑安州淸川江岸上有乙支文德石像烏蘇里江外有淵蓋蘇文頌德平壤牡丹峰中麓有東川帝朝天石 朔州巨門山西麓有乙巴素墓雲山之九峰山有淵蓋蘇文墓)”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 : 운주 용문애]       ..

카테고리 없음 2011.11.25

윤여동설 - 옥저(沃沮)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옥저(沃沮)의 위치 - 최초공개 옥저에 대한 사서의 기록들은 매우 혼란스럽다. 그리하여 역사 연구자에 따라 옥저가 4개(옥저, 동옥저, 남옥저, 북옥저)의 나라로 나누어져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3개(동옥저, 남옥저, 북옥저)의 나라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사람에 따라 이렇듯 주장들이 다르게 되었는지 사서의 기록들을 확인해 보자. 후한서 동옥저 전을 보면,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대해까지이고, 북쪽은 읍루와 부여, 남쪽은 예, 맥과 접했다. 그 땅이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긴데 땅이 사방 천리의 절반쯤 된다. [옥저의 위치] 읍루(말갈) 대해 부여(동부여) 개 북옥저 마 동옥저 대해 대 남옥저 산 고구려 맥 동예 토질은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카테고리 없음 2011.11.18

윤여동설 - 고려는 “철령(鐵嶺)” 때문에 망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려는 “철령(鐵嶺)” 때문에 망했다 - 최초주장       고려가 “철령(鐵嶺)” 때문에 망했다고?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      명사 조선전 홍무19년(A.D.1386) 12월 조를 보면,  “(명 태조 주원장이) 호부에 명하여 고려왕에게 말하기를   “철령 북쪽, 동쪽, 서쪽의 땅은 옛날부터 개원(開元:원나라 때의 개원로를 말함)에 속하였으니 요동(遼東)에서 통치하도록 하고, 철령(鐵嶺) 이남은 옛날부터 고려에 속하였으니 고려에서 통치하도록 하시오. 그리하여 서로 국경을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하였다.[필자주 : 이는 관북, 관서지역을 명나라가 차지하겠다는 말이다]   그러자 고려에서는 홍무21년(A.D.1388) 4월에 표문을 보내 철령 이북 공험진(필자주 : 고..

카테고리 없음 2011.11.11

윤여동설 - 공주 의당면 수촌리고분은 반도백제 왕족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공주 의당면 수촌리고분은 반도백제 왕족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 - 최초주장 백제 “무광왕(武廣王)”은 아직까지 비밀 속의 왕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아무리 뒤져봐도 백제의 왕 중에 무광왕이라는 왕은 존재하지 않고, 백제의 도읍 중에 지모밀지라는 곳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에 대한 기록은 정사에는 단 한 줄도 나타나지 않고 오직 관세음응험기의 기록 속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百濟武廣王遷都枳慕密地新營精舍(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새로이 절을 지었다)” 라고............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이 관세음응험기라는 기록의 신빙성에 대하여 의심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는다. 그러나 백제 역사를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무광왕이라는 왕이 누구를 말하는지 알 수 있게 되고, 양서나 남사에 언..

카테고리 없음 2011.11.04

윤여동설 - 공주 공산성 출토 황칠갑옷은 백제갑옷 금휴개(金髹鎧)일 가능성이 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공주 공산성 출토 황칠갑옷은 백제갑옷 금휴개일 가능성이 있다 - 최초주장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 27년(A.D.626) 조를 보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명광개(明光鎧)라는 갑옷을 바치고 고구려가 길을 막고 상국에 예방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호소하였더니 당 고조가 산기상시 주사서를 보내 조서로써 우리와 고구려 사이의 원한을 풀라고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당서 백제전에도 “무덕9년(A.D.626) (백제가) 명광개를 바치고 고구려가 조공 길을 막는다고 하소연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백제에서 명광개라는 갑옷을 만들어 당나라에 보냈음은 확실하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4년(A.D.645) 조의 당 태종 고구려 침공시의 요동성전투 기록을 보면, “이 때에 백제가 금..

카테고리 없음 2011.10.28

윤여동설 - 고구려 “신성(新城)” 위치찾기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 “신성(新城)” 위치찾기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3대 서천왕 조를 보면, “7년(A.D.276) 여름4월 왕이 신성[新城 혹자는 말하기를 신성은 나라 동북에 있는 큰 진이라 한다]에 가서 사냥을 하다가 백록을 잡았다. 가을8월에 왕이 신성으로부터 돌아왔다” 19년(A.D.288) 여름4월에 왕이 신성에 갔다. 겨울 11월에 왕이 신성으로부터 돌아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14대 봉상왕 조를 보면, “2년(A.D.293) 가을8월에 모용외가 와서 침노하였다. 왕이 신성(新城)으로 가서 적을 피하려고 곡림까지 갔는데 모용외가 왕이 달아난 것을 알고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거의 잡히게 되매 왕이 두려워하였다. 이때에 신성성주인 고노자가 기병5백을 거느리고 나와서 왕을 영접..

카테고리 없음 2011.10.21

윤여동설 - 건안성(평곽)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난평 부근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건안성(평곽)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난평 부근 - 최초주장 645년 당 태종 고구려 침공시 난공불락의 요새 안시성을 먼저 쳐야 되느냐 안시성을 그대로 두고 건안성을 치고 평양성으로 향할 것이냐를 놓고 작전회의를 할 때, 이세적이 말하기를 “건안은 남쪽(필자주 : 북쪽의 오기일 것이다)에 있고, 안시는 북쪽(필자주 : 남쪽의 오기일 것이다)에 있는데, 우리의 군량은 모두 요동에 있습니다. 이제 안시를 넘어 건안을 치다가 만약 고구려 사람들이 우리의 군량 수송로를 끊게 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했다는 기록이 있음을 보면 안시성과 건안성은 모두 요동성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고, 안시성이 남쪽(원문은 북쪽으로 되어 있다)에, 건안성이 북쪽(원문은 남쪽으로 되어 있다)에 위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카테고리 없음 2011.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