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한반도 제주도는 삼국사기 기록 속 탐라국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2. 31. 00:19

윤여동설 - 한반도 제주도는 삼국사기 기록 속 탐라국이 아니다 - 최초주장

 

 

                                                                    [한반도 제주 애월읍의 해중고인돌]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20년(A.D.498) 조를 보면,
  "8월 왕이 탐라(耽羅)에서 조공과 조세를 바치지 않는다 하여 그를 치려고 몸소 무진주에 이르니 탐라에서 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중지했다[탐라는 탐모라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우리는 지금 이 사건이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일이라고 생각해 이때의 백제가 지금의 충청, 전라도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고, 탐라는 곧 제주도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하여 당시 백제의 도읍이었던 웅진성 즉 지금의 충남 공주를 출발한 동성왕이 탐라국인 제주도를 침공하기 위해 무진주인 광주쯤에 도착했을 때 탐라에서 사신을 보내 사죄했기 때문에 정벌을 중지했던 것이라고 역사를 해석했다.  
   

  또한 고려사절요 목종5년(A.D.1002) 조의 "6월 탐라산에서 네 군데에 구멍이 뚫려 붉은 물이 5일 동안 솟아 나오다가 그쳤는데, 그 물이 모두 기와와 돌이 되었다" 라는 기록과  

  목종 10년(A.D.1007) 조의, " 탐라가 보고하기를 '상서로운 산이 바다 가운데에서 솟아 올랐습니다' 하여 태학박사 전공지로 하여금 가서 보도록 했는데, 탐라 사람이 말하기를 '산이 처음 솟아 오를 때에 구름과 안개가 끼어 어두컴컴하고, 땅이 움직이고 천둥소리가 나는 듯 했는데, 7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구름과 안개가 걷혔습니다.

  산의 높이는 1백여장이나 되고, 둘레는 40여리나 되며, 풀과 나무는 없고, 연기가 산위에 덮혀 있었으며, 이를 바라보면 굳은 유황같아 사람들이 두려워 감히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전공지가 몸소 산 아래에 가서 그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 올렸다" 라는 기록을 지금 한반도 남쪽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일이었다고 생각해 한라산이 서기 1002년에 화산이 폭발해 용암이 흘렀고, 제주도 부근 어느 섬이 1007년에 솟아 올랐기 때문에 고려사절요에 이러한 내용이 기록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백제의 위치에 대하여 위서 백제국전에는,
  "백제국은 그 선조가 부여로부터 나왔다. 그 나라는 북쪽에 고구려가 1천여리 거리에 있고, 소해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백성들은 농사를 짓는데 땅이 대부분 낮고 습하여 대개 산에서 산다. 오곡이 있고 의복과 음식은 고구려와 같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송서 백제국전에는,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 동쪽 1천여 리에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주서 백제전에는,
  "백제는 그 선조가 대개 마한의 속국이며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비로소 대방 땅에 나라를 세웠다. 옛날에는 그 땅의 경계가 동쪽으로는 신라에 닿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했으며 서쪽과 남쪽은 모두 바다에 닿았다. (그 강역이) 동서의 길이는 450리이고, 남북은 900여 리이며, 도읍은 고마성이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수서 백제전에는,
  "백제는 (그 강역이) 동서가 450리이고, 남북이 900여 리이다. 남쪽으로는 신라에 닿고, 북쪽에는 고구려가 버티고 있다. 그 나라의 도읍은 거발성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북사 백제전에는,
  "백제의 동쪽은 신라에 이르고, 북쪽은 고구려와 접했다.
  서쪽과 남쪽은 모두 대해에 이르고, 소해의 남쪽에 위치하는데, (그 강역이) 동서의 길이는 450리이고, 남북의 길이는 900여 리이다. 그 도성은 거발성으로 고마성이라고도 부른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구당서 백제국전에는,
  "백제국은 본래 부여의 별종으로서 마한의 옛 땅에 있다. 경사(지금의 서안)에서 동쪽으로 6,200리에 있으며, 대해의 북쪽 소해의 남쪽에 위치한다. 동북쪽은 신라까지이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 월주까지이다. 남쪽은 바다를 건너 왜국에 이르고, 북쪽은 바다를 건너 고구려까지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여러 사서들의 공통적인 기록은 백제의 북쪽은 고구려, 동쪽은 신라, 남쪽은 왜국과 국경을 접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서쪽에 관한 기록은 대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는 서쪽은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백제가 대해의 북쪽, 소해의 남쪽에 위치한다고 기록하고 있고, 그 강역의 크기를 동서 450리, 남북 900여 리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의 서울, 경기 북쪽에는 소해라고 부를 만한 바다나 호수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중국 사서들의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사서의 기록들을 한반도로 끌어들여 해석해 백제가 한반도 남쪽의 서쪽지역인 서울, 경기, 충청, 전라도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인식함으로써 탐라 역시 지금의 제주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으며, 신라의 서쪽에 백제가 있고, 신라의 남쪽에 가야가 있다고 했으며, 마한의 동북쪽에서 백제가 건국되었으며,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기록이 이렇다보니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조차도 이게 웬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하면서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옛 요동은 지금의 북경 부근을 가리키는 것으로 밝혀졌고, 낙랑, 대방 등은 북경 부근의 하북성에 위치했었던 것으로 밝혀졌으며, 낙랑동부도위, 현토군은 내몽골 적봉 부근에 위치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신라는 우리의 생각과 같이 한반도 경주를 중심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가 진황도 쯤에 위치하고 있었어야 삼국사기나 중국 사서들의 기록을 충족할 수 있고, 또 신라의 남쪽에 가야가 있었다고 하고, 백제의 강역은 동서 450리, 남북 900여 리라 기록되어 있으니 결국 가야 역시 한반도가 아닌 요녕성 호로도, 흥성, 수중부근에 위치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고, 마한은 당산, 풍윤부근에 위치했다고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반도 백제의 흔적들과 구분하기 위해 필자가 대륙백제, 대륙신라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고, 반도백제, 반도신라라는 말도 새로 만들어 냈던 것이다. 
    

 

☆ 백제의 건국지 위례성과 미추홀은 난하의 대흑정수고 동쪽으로 비정되고, 백제의 북한산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 도산(都山)으로 비정된다.  

 

  그런데 동성왕 때 백제의 도읍은 웅진이었다.
  웅진은 백제 21대 개로왕(근개루왕이라고도 한다)이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받아 당시 백제의 도읍이었던 한성이 함락되고 잡혀 죽게 되자, 그 동복동생이었던 문주왕이 왕위에 올라 급히 도읍을 옮겼는데 이곳이 웅진이었고, 문주왕, 삼근왕을 지나 동성왕이 왕위에 올라서도 도읍은 그대로 웅진(필자주 : 지금의 청룡하 하류 하북성 노룡 부근)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동성왕은 탐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군사들을 이끌고 한반도 공주가 아닌 하북성 노룡 부근을 출발하여 남쪽의 탐라를 향해 출발했을 것이다.
  지금 하북성 진황도 노룡에서 청룡하, 난하를 타고 내려가면 발해에 도달할 수 있는데, 이 부근이 바로 무진주, 나주로 비정되는 곳이고, 탐라는 발해를 건넌 그 남쪽  산동성 부근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 

  북사 백제전을 보면, "백제의 서남쪽에 사람이 사는 섬이 15군데가 있는데 모두 성읍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수나라가 진(陳)나라를 평정한 해에 수나라의 전함이 표류하여 해동의 탐모라국에 도착했다가 그 전함이 돌아올 때 여창(백제 위덕왕)이 필수품을 매우 후하게 주어 보내고 아울러 사신도 보내 표를 올려 진나라를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탐모라국의 위치에 대하여는 "백제의 남쪽에서 바다로 3월(三月 )을 가면 탐모라국이 있는데, 남북은 1천여 리이고, 동서는 수백 리이며 토산물로는 노루와 사슴이 많은데 백제에 부용되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매우 혼란스러우나 탐모라가 백제의 남쪽에서 배를 타고 3개월(三月)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이는 태산이 있는 지금의 중국 산동성 제남 부근을  말한다고 할 수 있고, 따라서 수나라의 전함도 중국 대륙에서 한반도의 제주도까지 동쪽으로 표류했던 것이 아니라 산동성(지금의 황하하류 황하구에서 산동성 제남 부근)까지 표류했던 것이라고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탐라(탐모라)는 후대 고려시대 삼별초의 최후 거점이 되기도 한 곳인데 우리는 지금까지 삼별초 역시 한반도의 강화도와 진도, 제주 등지로 장소를 옮겨가며 항몽활동을 했던 것으로 역사를 해석했으나, 삼국이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고, 고려 역시 옛 삼국의 땅을 차지하고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탐라(후일의 제주)가 지금의 산동성 제남 부근을 말한다면 우리는 고려사의 기록 모두를 한반도가 아닌 대륙으로 비정해 다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 속의 탐라(탐모라)는 한반도 제주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산동성 제남 부근 지역을 말하는 것이고, 한라산은 지금의 태산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곳에 우리의 제주 즉 옛 탐라가 있었던 것이다.  
   눈을 뜨고 사고를 전환하라. 그래야만 실타래처럼 얽혀버린 우리의 고대 역사를 풀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