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반도백제 23

윤여동설 - 원(元) 지원(至元) 4년(A.D.1267)까지도 존재한 백제는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원(元) 지원(至元) 4년(A.D.1267)까지도 존재한 백제는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 최초주장    원사를 보면,  "세조 지원 4년(A.D.1267) 정월 백제가 그 신하 양호를 보내 내조하여 비단을 차등있게 하사했다(世祖至元四年正月百濟遣其臣梁浩來朝賜以錦繡有差)”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다시피 백제는 서기 660년에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받고 나라가 멸망했고, 견훤의 후백제 역시 936년에 소멸했다.   그런데 백제는 그 후에도 어디선가 명맥을 유지하면서 1267년에 원나라에 사신을 보내자 원 세조인 쿠빌라이 칸이 비단을 하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원사가 없는 사실을 기록했을 리도 없을 것인데, 백제가 멸망한지 600년도 더 지난 1267년까지 백제가..

카테고리 없음 2017.01.21

윤여동설 - 백제의 건국지가 정말 대방고지(帶方故地)였고, 건국시조는 구태(仇台)였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의 건국지가 정말 대방고지(帶方故地)였고, 건국시조는 구태(仇台)였을까? - 최초주장    주서 백제전을 보면,   “백제는 그 선조가 대개 마한의 속국이며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비로소 대방 땅에 나라를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수서 백제전에는,   “동명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자가 있었는데,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비로소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漢)나라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의 딸을 아내로 삼았는데, 나라가 점점 번창하여 동이 중 강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북사 백제전에도,   “동명의 후손에 구태가 있었는데, 매우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비로소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의 딸을 구태에..

카테고리 없음 2015.09.19

윤여동설 - 풍납토성은 백제의 위례성(慰禮城)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풍납토성은 백제의 위례성(慰禮城)이 아니다 - 최초주장 [백제 11대 비류왕의 아들인 근초고왕과 12대 계왕의 아들인 무광왕은 대륙백제의 왕위를 놓고 20여년간 왕위다툼을 하게 되는데, 최종으로 근초고왕이 승리하여 대륙백제의 13대 왕위에 올랐고, 패한 무광왕은 한반도로 도망쳐 지모밀지에 도읍하고 다시 백제(이를 필자는 반도백제라 부른다)를 세운다. 그랬다가 반도백제의 모도왕 때 이르러 대륙백제의 개로왕(근개루왕이라고도 한다)이 두 백제의 통합을 제안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반도백제가 대륙백제를 흡수통합한 후 반도백제 모도왕의 둘째 손자인 모대가 대륙으로 건너가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는데, 이가 곧 동성왕이고, 그 뒤를 이어 동성왕의 이복동생인 무령왕이 대륙으로 건너가 백가의 난을 진압하고 대..

카테고리 없음 2015.07.15

윤여동설 - 공주 의당면 수촌리고분은 무광왕이 세운 반도백제의 왕족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공주 의당면 수촌리고분은 무광왕이 세운 반도백제의 왕족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 - 최초주장         백제 “무광왕(武廣王)”은 아직까지 비밀 속의 왕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아무리 뒤져봐도 백제의 왕 중에 무광왕이라는 왕은 존재하지 않고, 백제의 도읍 중에 지모밀지라는 곳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에 대한 기록은 정사에는 단 한 줄도 나타나지 않고 오직 관세음응험기의 기록 속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百濟武廣王遷都枳慕密地新營精舍(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새로이 절을 지었다)” 라고............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이 관세음응험기라는 기록의 신빙성에 대하여 의심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는다.  그러나 백제 역사를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무광왕이라는 왕이 누구를 말..

카테고리 없음 2011.11.04

윤여동설 - 근초고왕의 아버지 비류왕의 일생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근초고왕의 아버지 비류왕 그는 구수왕의 증손자였다 - 최초공개       지금 역사드라마 “근초고왕”이 방영되고 있어 백제 역사상 가장 넓은 강역을 이루었다는 근초고왕에 대하여 세인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드라마에서는 부여구(후일의 근초고왕)가 젊은 시절 그 아버지인 비류왕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궁에서 쫓겨 나가 소금장사를 하면서 살다가 후일 백제의 13대 왕위에 올라 고구려 고국원왕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하고, 백제의 강역을 중국 요서까지로 넓히는 위대한 왕으로 설정되어 있다.   근초고왕과 그 아버지 비류왕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좀 더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드라마 내용의 어느 부분은 역사적 사실이고, 어떤 내용은 픽션을 가미했구나 하는 것까지 구분하면서 본다면 재미는 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카테고리 없음 2010.11.12

윤여동설 - 백제 무광왕(武廣王)과 모도왕(牟都王)은 어디에서 왕위에 올랐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 무광왕(武廣王)과 모도왕(牟都王)은 반도백제의 왕들이었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왕들은 대륙백제의 왕들이었다 - 최초주장      백제 역사는 아직까지도 풀지 못한 비밀들이 많이 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삼국사기 기록 속의 백제가 한반도에서 건국되었다고 인식한다.   그리고는 첫 도읍 위례성이 천안 직산이다 아니다 풍납토성이다 하면서 한반도에서 백제의 초기 도읍지를 찾고 있고,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를 충남 부여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삼국사기 기록 속의 백제는 대륙백제로서 한반도에서 건국된 나라가 아니라 지금의 발해 북쪽 중국 하북성에서 건국된 나라였다.   그리고 관세음응험기에는 “백제 무광왕(武廣王)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새로 절을 지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남제..

카테고리 없음 2010.09.13

윤여동설 - 익산 미륵사지는 선화공주가 지은 절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익산 미륵사지는 선화공주가 지은 절이 아니다 - 최초주장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이다. 그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던 것이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으로 재주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항상 마를 캐다가 파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서동이라고 불렀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공주 선화(善花 혹은 善化)가 매우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머리를 깎고 서울로 가서 마을 아이들에게 마를 먹이니 이내 아이들이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를 지어 아이들로 하여금 부르게 하였다. 善花公主主隱 他密只稼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遣去如 (선화공주님은 남모르게 애인 만들어 놓고, 서동의 방..

카테고리 없음 2009.03.17

윤여동설 - 익산 미륵사탑출토 사리봉안기의 비밀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익산 미륵사탑출토 사리봉안기의 비밀 - 최초공개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새로이 절을 지었다. 그런데 정관 13년(A.D.639) 기해년 겨울 11월에 벼락이 떨어져 제석정사에 불이 났다" 라는 관세음응험기 기록 속의 무광왕(武廣王)에 대하여, 우리는 정관 13년인 서기 639년이 삼국사기 기록 속의 백제 무왕 재위기간이라 하여 백제 무광왕이 바로 백제 30대 무왕(武王)과 동일 인물일 것이라 생각한다. ☆ 지금 학자들은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절을 지은 시기와 절에 벼락이 떨어져 불탄 시기를 동일시기로 보고 있으나 절을 지은 시기와 불탄 시기를 왜 동일시기로 보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절을 지은 지 수백년 후에 절에 벼락이 떨어져 불탔다면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절..

카테고리 없음 2009.01.21

윤여동설 - 한반도 역사의 진실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에서는 어떠한  고대역사가 전개되었을까? - 최초주장       필자는 지금까지 고조선으로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 역사의 중심은 한반도가 아니라 발해 북쪽 중국 하북성에 있는 난하를 중심으로 한 그 부근 지역이라 하였고, 한반도는 이성계의 조선이 대륙에서 건국된 후 바로 도읍을 한반도의 한양으로 옮김으로서 비로소 우리 역사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고려 시대로부터 그 이전 한반도에는 어떠한 역사가 펼쳐졌던 것일까?   한반도에도 구석기 유물로부터 신석기, 청동기, 철기시대의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고, 소량이지만 삼국시대, 고려시대의 유물들도 출토되고 있다.   다만 구석기 시대에 대해서는 너무도 오랜 옛날의 일이라 언급하지 않겠고, 고조선시대쯤부터는 많은 수는 아니라 하더라도 ..

카테고리 없음 2008.10.24

윤여동설 -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는 발해 북쪽, 북경 동쪽 하북성 당산시 난주(난현)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는 발해 북쪽, 북경 동쪽 하북성 당산시 난주(난현) - 최초주장     백제26대 성왕은 서기 538년 봄에 이르러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는 국호까지도 남부여(南扶餘)로 바꾼다.  따라서 엄격한 의미에서는 백제는 기원전 18년부터 537년까지로 끝나고, 538년부터는 남부여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인데, "남부여"라는 국호는 "옛 졸본부여의 영광을 남쪽 땅에 재현하겠다"는 명분을 세워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길 때만 잠깐 언급했을 뿐 실제 국호로 사용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백제의 성왕은 왜 이때에 이르러 사비로 도읍을 옮겨야 했던 것일까?   학자들은 그 이유를 백제가 고구려의 압박 때문에 도읍인 웅진이 위험하다고 보고 더 남쪽으로 도읍을 옮겼을 것이라고 추정..

카테고리 없음 2008.10.12

윤여동설 - 백제 역사의 미스테리가 풀렸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 역사의 미스테리가 풀렸다 - 최초주장       지금까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백제는 매우 미스테리한 나라였다.   왜냐하면 백제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같은 기록들에 부딪치기 때문이었다.  ☆ 옛 사서의 백제 관련 기록들을 모두 한반도에 비정하여 해석하려했기 때문에 미스테리하게 느껴졌을 것인데, 사실 백제는 한반도에서 건국된 나라가 아니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동쪽에 (신라가 있고,서쪽에) 낙랑이 있으며, 북쪽에 말갈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 신라의 서쪽에 백제가 위치했다고도 기록되어 있고, 신라의 남쪽에는 가야가 있다고도 했고, 마한의 동북쪽에 백제가 위치하고 있었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 사서들은 백제가 요동 동쪽 1천여 ..

카테고리 없음 2008.08.11

윤여동설 - 새로 그려보는 백제 초기의 왕위 계승도

윤여동설 - 새로 그려보는 백제초기의 왕위 계승도 시조 온조왕 ↓자 ?(실명) : 아버지인 온조왕보다 일찍 죽었다. ↓자 2대 다루왕 ↓자 ?(실명) : 아버지인 다루왕보다 일찍 죽었다 ↓자 3대 기루왕 ↓자 ?(실명) : 아버지인 기루왕보다 일찍 죽었다 ↓자 4대 개루왕 ↓자 5대 초고왕 ↓자 6대 구수왕 ↓자 ?(실명) : 아버지인 구수왕보다 일찍 죽었다 ↓자 7대 사반왕 : 약 10세쯤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8대 고이왕에게 왕위를 찬탈 당했다. ☆ 백제 초기의 왕위 계승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잘못되었음이 확실하다. 따라서 그 진실을 찾아야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데, 비록 필자의 추정이 진실까지는 못된다 하더라도 그 진실에 한발자국 다가갈 수는 있을 것이다. ..

카테고리 없음 2008.05.29

윤여동설 - 일본 국보 스타하치망인물화상경 명문의 비밀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일본 국보 스타하치망 인물화상경 명문의 비밀 - 최초공개                                                          지금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우전팔번(스타하치망)신사 인물화상경(隅田八幡神祠 人物畵像鏡)에는 우리 역사와 관련된 명문이 새겨져 있어 한·일간에 그 명문의 해석을 놓고 주장들이 분분하다.  왜냐하면 그 명문에 "사마"와 "남제왕"이라는 두 사람의 왕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남제왕의 신분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고, 사마란 백제 무령왕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칠지도 명문과 함께 이 명문 역시 아직까지 명쾌하게 해독되지 못하고 있는데,   기록을 보면,"癸未年八月 日十六王年男弟王在意紫沙加宮時斯麻念長壽遣開中費直 穢人今..

카테고리 없음 2008.05.16

윤여동설 - 고구려가 백제(大陸百濟)를 백잔(百殘)이라 부른 이유는?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는 왜 백제(大陸百濟)를 백잔(百殘)이라 불렀을까? - 최초주장 광개토대왕 비문 영락 6년 병신년 조를 보면,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倦)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OO新羅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이라고 새겨져 있다. ☆ 위 기사 중 괄호 속의 글자는 원래 倦(게으를 권)자였으나 지금까지 이 글자가 글자 모양이 비슷한 倭(왜)자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신묘년 기사의 해석을 놓고 한·일 간에 논란이 많았는데, 사실 이 조문은 왜와는 아무 관련도 없다. 압록강 너머 집안에 있는 호태왕 비는 413년 10월에 광개토대왕이 죽자 아들인 장수왕이 그 다음해인 414년 갑인년 9월 29일에 아버지인 광개토대왕 평생의 훈적을 새겨 능 앞에 세운 훈적비로서 당시 고구..

카테고리 없음 2008.02.20

윤여동설 - 근초고왕을 알면 백제(대륙백제)가 보인다(1)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근초고왕을 알면 백제(대륙백제)가 보인다 (1) - 최초주장    백제 13대 근초고왕은 비밀의 왕국 백제의 역사를 밝히기 위해 매우 중요한 왕이다.  지금 우리는 그가 백제 역사상 가장 넓은 강역을 이루었고, 고구려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했으며, 백제 최초의 역사서도 만들었고, 이때부터 백제가 비로소 중국과 교류하게 되었다고 알고 있다.  따라서 그가 백제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아직까지도 근초고왕에 대하여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고, 그와 관련된 거의 모두가 논란 중에 있다.   즉 근초고왕의 이름이 무엇이고, 왕비는 누구이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그의 업적이 왜 20년 간이나 아무 것도 기록되지 않았고, 앞 왕이었던 계왕과는 무슨 관계이며, 중국으로부터 받은 ..

카테고리 없음 2008.01.29

윤여동설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난하 부근 대륙삼국의 역사서이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난하 부근 대륙삼국의 역사서이다 - 최초주장 세상이 또 한번의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용틀임을 하고 있는 이때 우리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할 때다. 우리는 지금 조선시대 사람들처럼 한반도만이 우리 역사의 전부라고 인식하며 웅크리고 살 것인지, 우리 선조들이 내몽골 부근까지를 차지하고 주변 세력들과 끊임없이 다투고 경쟁하며 역사를 이어온 민족이었다고 자부하며 활개펴고 살 것인지 선택해야할 기로에 서 있다. 그런데 우리 역사를 논하려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제외하고는 단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삼국사기는 김부식을 비롯한 고려의 학자들이 인종의 명을 받아 1145년에 편찬한 신라· 고구려· 백제 ..

카테고리 없음 2007.12.06

윤여동설 - 백제의 한수(漢水)는 지금의 한반도 한강일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의 한수(漢水)는 지금의 한반도 한강일까? - 최초주장 백제의 온조왕은 나라를 세우고 13년째인 기원전 6년에 이르러, "나라의 동쪽[에는 신라가 있고, 서쪽에는] 낙랑이 있으며,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서 변경을 침공하기 때문에 편안한 날이 적다. 내가 어제 나가서 순행하다가 한수(漢水)의 남쪽 토양이 비옥한 것을 보았으니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구히 편안할 계책을 도모하여야 하겠다" 하고는 다음해 정월 위례성에서 한수 남쪽(하류)으로 도읍을 옮기고 남한성(南漢城)이라고 하게된다. 이렇게 한수(漢水)는 우리의 삼국 역사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우리는 비류와 온조가 패수와 대수를 건너 한산 부아악에 올랐다는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설화와 고구려 건국설화를 읽고, 졸본을 지금의 환인, 패수를..

카테고리 없음 2007.11.15

윤여동설 - 한반도 최초의 절은 백제 무광왕이 세운 제석정사일 가능성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 최초의 절은 백제 무광왕이 세운 제석정사일 가능성 - 최초주장 [불에 타 폐허가 되었다는 제석사지에 깨어진 탑의 심초석만 남아 있다] [반도백제 무광왕릉과 왕비릉으로 추정되는 익산 쌍릉] 삼국사기 기록 상 우리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중에서 불교가 맨 처음 전래된 나라는 고구려로서 17대 소수림왕 2년인 372년으로 기록되고 있다. 기록을 보면, "2년(A.D.372) 여름 6월 진(前秦)나라왕 부견이 사신과 중 순도를 파견하여 불상과 경문을 보내왔으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 토산물로서 답례했다" "4년(A.D.374) 중 아도가 왔다" "5년(A.D.375) 봄 2월 처음으로 초문사를 창건하여 순도가 있게 하고, 이불란사를 창건하여 아도가 있게 하니 이것이 해동불법의 시초이다" 라고..

카테고리 없음 2007.11.01

윤여동설 - 백제 멸망 후 그 땅을 나누어 당나라가 설치한 5도독부의 추정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어떻게 나누어 5도독부를 설치했었을까? - 최초공개    서기 660년 7월 18일 백제의 의자왕은 늙은 몸을 이끌고 태자와 대신·장군들을 이끌고 사비성에서 소정방에게 항복함으로써 678년 백제 왕조는 사직을 문닫게 되고, 의자왕과 그의 아들들, 신하와 장군 등 93명과 백성 1만2천여 명이 당나라로 끌려가게 된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조에는 왕과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 및 대신·장군 88명과 백성 12,807명을 당나라 장안으로 호송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는 원래 5부, 37군, 2백 개성, 76만 호로 되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지역을 나누어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漣)·덕안(德安)의 5도독부로 나누어 통치하..

카테고리 없음 2007.10.17

윤여동설 - 동성왕은 웅진 대궐 동쪽 어디에 임류각을 세웠을까?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동성왕은 웅진 대궐 동쪽 어디에 임류각을 세웠을까? - 최초공개 [위 : 한반도 충남 공주 공산성 내에 복원해 놓은 임류각 ㅋㅋ] [위: 웅진 공산(公山) 추정지(진황도 노룡현)] [위 : 웅진성 동쪽 임류각 추정지]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22년(A.D.500) 조에는, "봄에 대궐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길이나 되고 또 연못을 파고 진기한 새를 길렀다. 잘못을 간하는 신하들이 상소문을 올렸으나 답하지 않고 다시 잘못을 간하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대궐문을 닫아버렸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학자들은 동성왕 때 백제의 도읍이 웅진이었으므로 그 웅진이 지금의 충남 공주였고, 백제의 왕궁이 그곳의 공산성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공산성 동쪽에서 임류각을 찾으려 노력했다...

카테고리 없음 2007.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