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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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의 한수(漢水)는 지금의 한반도 한강일까?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1. 15. 06:36

 윤여동설 -  백제의 한수(漢水)는 지금의 한반도 한강일까? - 최초주장

 

 

  백제의 온조왕은 나라를 세우고 13년째인 기원전 6년에 이르러,
  "나라의 동쪽[에는 신라가 있고, 서쪽에는] 낙랑이 있으며,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서 변경을 침공하기 때문에 편안한 날이 적다. 내가 어제 나가서 순행하다가 한수(漢水)의 남쪽 토양이 비옥한 것을 보았으니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구히 편안할 계책을 도모하여야 하겠다" 하고는 다음해 정월 위례성에서 한수 남쪽(하류)으로 도읍을 옮기고 남한성(南漢城)이라고 하게된다.

  이렇게 한수(漢水)는 우리의 삼국 역사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우리는 비류와 온조가 패수와 대수를 건너 한산 부아악에 올랐다는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설화와 고구려 건국설화를 읽고, 졸본을 지금의 환인, 패수를 지금의 대동강, 대수를 지금의 예성강이나 임진강 쯤으로 비정하여 이들이 압록강 북쪽 환인에서 출발하여 남쪽의 압록강을 건너고 또 대동강, 예성강(또는 임진강)을 건너 서울의 북한산 또는 북악산에 올라 지세를 살펴보고 비류는 인천 쪽으로 갔고, 온조는 서울부근에 나라를 세웠는데 그 나라가 곧 백제였다고 하고 있다.
  따라서 백제 역사에 등장하는 한수는 당연히 지금 서울의 한강(漢江)을 말하는 것이라고 인식했고, 비류가 갔다는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찝찔하여 편히 살수가 없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바닷가에 위치한 인천부근이 틀림없다고 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그 미추홀이나 위례성, 남한성, 한성(북한성)을 확실하게 찾을 수 없어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도읍지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왕궁 터를 찾아야 하고, 도읍이나 왕궁의 보호를 위해 쌓았던 성곽을 찾아야 하며, 왕들이 죽어 묻힌 왕릉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도읍지였음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공주에는 무령왕릉과 공산성이 있어 백제의 도읍지였음이 확인되었고, 부여 역시 능산리 고분군과 부소산성이 있어 백제의 도읍지였던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도 백제의 건국지인 위례성을 찾기 위하여 한강 주변을 뒤져 이러한 여러 조건을 충족하는 장소를 찾고 있는 중이다.
  전에는 경기도 광주를 유력하게 생각해서 그곳을 발굴해 보았으나 그곳에서는 백제의 건국을 밝혀줄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고, 몽촌토성을 발굴해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요즈음에는 풍납토성이 가능성이 있다고 발굴작업 중이다.
  풍납토성 주변에는 석촌동 고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범람의 위험이 있는 강가 저지대에 성벽을 돌이 아닌 흙으로 쌓고 왕궁을 세웠을 것이라는 추정은 아무래도 무리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풍납토성은 백제의 위례성이나 남한성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어찌되었든 그것도 이 땅에 살았던 우리 선조들(필자주 : 동국인)의 흔적일 것이니 발굴해보아도 문제될 것은 없겠지만 그곳에서 백제의 건국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유물이 출토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게 좋다.  

  왜냐하면 백제(대륙백제)는 한반도에서 건국되지 않았고, 서울은 백제가 도읍한 적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백제(반도백제)는 4세기 중반에 대륙의 백제에서 왕위찬탈전에서 패한 차자파인 계왕의 태자였던 무광왕에 의하여 익산 금마에 처음 세워졌고, 후일 공주로, 부여로 도읍을 옮겼던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대륙백제)는 원래 마한의 동북쪽 모퉁이에 말갈과 낙랑의 침공이 심한 지역 사방 백리 땅을 얻어 그곳에서 건국되었다.

  따라서 백제(대륙백제라 한다)는 지금의 중국 북경 동쪽 진황도 도산 남쪽에 위치했을 위례성에서 건국되었다가 강을 따라 내려와 넓고 안전한 곳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그곳이 바로 백제의 오백년 도읍 남한성이었다. 지금의 건창영진 부근으로 비정된다.
   온조왕은 북쪽의 말갈과 동쪽 낙랑의 침입을 피해 도읍을 강 남쪽으로 옮긴다고 말했고, 실제로 실행에 옮겼다. 
  북쪽으로부터 침입해오는 적의 침범으로부터 좀더 안전할 수가 있어 온조왕은 나라를 세운지 14년째 되는 기원전 5년 정월에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남한성이라 함으로써 백제 678년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했던 것이다.

  그랬다가 후일 근초고왕이 남한성으로부터 북쪽의 도산(필자주 : 백제 북한산이다) 남쪽 옛 위례성 부근으로 다시 도읍을 옮기게 되자 그곳을 한성(북한성)이라 부르게 되었을 것이고, 한강 하류의 옛 도읍은 남한성이라 부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한반도의 서울 부근에서 백제의 도읍지를 찾고 있으니 찾아질 리가 만무한 것이다. 
  대륙 삼국의 기록을 한반도로 가져와 해석한 결과이다.
  삼국사기 기록 속의 한수는 지금의 난하(옛 패수) 부근에서 찾아야 한다.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아신왕 때 패수(현 난하)를 타고 내려와 백제의 도읍 한성을 포위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냈고, 장수왕 역시 개로왕 때 패수(현 난하)를 타고 내려와 한성(북한성, 옛 위례성 부근)을 함락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 광개토대왕 당시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 동쪽의 황성이었고, 그 아들 장수왕 때 다시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고구려와 백제는 지금의 한반도 서울에서 평양을 공격하고, 평양에서 서울을 공격했던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백제 침략군의 화살에 맞아 죽은 곳은 지금 한반도 북한의 평양성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에 위치한 평양성이었고, 백제의 개로왕이 고구려 군에게 잡혀 죽은 아차산 역시 지금 서울의 아차산이 아니라 지금 중국의 도산(벡제 북한산) 남쪽 부근에 위치했던 아차산인 것이다.
  지금 한반도의 한강이 백제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한수가 아니라 중국 하북성 진황도에 있는 도산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는 강이 한수인 것이다.

  도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는 지금의 사하(沙河)가 바로 백제의 한수로 비정되는 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