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갈석산 26

윤여동설 - 조조의 노룡새(盧龍塞)는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조조의 노룡새(盧龍塞)는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공개 [발해 해수면 20m 상승시 발해연안 지형변화도] 조조가 요서 오환을 정벌할 때 지났다는 곳이 그 유명한 “노룡새(盧龍塞)”라는 곳인데, 아직까지 아무도 그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한다. ☆ 많은 사람들이 노룡새의 위치를 아직까지 찾지 못한 것은 지금의 요하 서쪽을 요서군으로 인식하고, 난하부근을 우북평군으로 인식하고는 그 부근에서 노룡새를 찾으려 했기 때문이었는데, 사실 옛 요수는 지금의 영정하로서 원래의 요서군은 지금의 북경 서남쪽 방산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207년 2월에 이르러 조조는 업성을 출발하여 북쪽으로 향하여 5월에 우북평군의 무종(無終)에 도착하게 된다. 그런데 홍수로 요서로 가는 도로가 불통이었기 때문에 난감한 상황이 ..

카테고리 없음 2015.02.08

윤여동설 - 산해경(山海經)은 어디에 대한 기록일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산해경(山海經)은 어디에 대한 기록일까? - 최초주장    산해경(山海經)은 역사이후 기록된 가장 오래된 지리서이다.   원래 요순시대에 기록된 것이 전해졌고, 후진(後晋)의 곽박(郭璞)이 정리하여 지금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 산해경이 워낙 난해하여 이해하기 어렵고 또 너무나 오래된 것이라서 기록 속 옛 지명을 비정하기가 어렵다고들 하고 있는데, 산해경 기록을 유심히 살펴보면 중심점이 남‧북 두 군데로 나타난다.   하나는 해내경을 중심으로 해내동경, 해내서경, 해내남경, 해내북경 또 그 외곽으로 해외동경, 해외서경, 해외남경, 해외북경 또 그 외곽으로 대황동경, 대황서경, 대황남경, 대황북경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하나는 중산경을 중심으로 동산경, 서산경, 남산경, 북산..

카테고리 없음 2015.01.19

윤여동설 - 잃어버린 고대의 갈석산(碣石山)은 과연 지금의 어디일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잃어버린 고대의 갈석산(碣石山)은 과연 지금의 어디일까? - 최초주장 고대의 항산(恒山 : 常山)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에 있는 대무산(大茂山, 일명 신선산, 1,898m)이었다. 옛 항산(상산)은 지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 산서성의 혼원에 있는 항산이 아니라 하북성의 대무산이었는데, 옛 지도들에는 한결같이 항산(상산)의 동쪽 또는 동북쪽 가까이에 갈석산을 그려 넣고 있다. ☆ 현재의 산서성 혼원현의 항산(恒山)은 명나라 때 현악(玄岳)을 항산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현재의 항산은 명나라 이전의 북악인 항산(상산)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고대의 갈석산은 옛 항산(상산)인 지금의 대무산(大茂山) 동쪽 또는 동북쪽 멀지 않은 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 된다. [위 기주협우갈석도 상 연..

카테고리 없음 2012.12.23

윤여동설 - 옛 북악 항산(北岳恒山=常山)은 하북성 보정시에 있는 지금의 대무산(大茂山:神仙山)이었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옛 북악 항산(北岳恒山=常山)은 하북성 보정시에 있는 지금의 대무산(大茂山:神仙山)이었다 - 최초공개 [산서성 북부와 하북성 남부의 고 장성과 두 개의 항산(恒山)이 표시된 근대지도] ☆ 진, 한 이래 지금 하북성의 항산(지금의 대무산)을 북악으로 삼아 제사를 지내 왔으나, 명나라 때에 이르러 산서성의 “현악(玄岳)을 항산(恒山)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또한 청나라 때에도 산서성의 항산에서 북악의 제사를 지냄으로서 명, 청 이후 사람들은 원래의 북악인 지금 하북성 보정시의 옛 항산(현 대무산)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산서성 혼원현에 있는 항산이 원래의 북악이요 항산(상산)이었다고 잘못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갈석산의 위치도 헷갈리게 되어 원래의 갈석산(우공갈석)을 잃어버리게 되었..

카테고리 없음 2012.11.23

윤여동설 - 고구려 태조대왕 때 쌓은 요서10성의 축성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 태조대왕 때 쌓은 요서10성의 축성 위치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 모본왕 2년(A.D.49) 조를 보면, “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우북평이라고도 한다),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습격하였더니 요동태수 채동이 은의와 믿음으로 대하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그로부터 6년 뒤인 태조대왕 3년(A.D.55) 조를 보면, “봄2월에 요서에 10개 성을 쌓아 한나라 병사(한나라의 침공)에 대비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모본왕 때 북평(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습격했을 때 요동군과 요서군의 일부지역을 후한으로부터 빼앗았음을 알 수 있고, 태조대왕 때 이르러 그곳을 수비하기 위하여 요서지역에 10개의 성을 쌓았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물론 이때 태조대왕은..

카테고리 없음 2012.06.10

윤여동설 - 천년의 수수께끼 임유관(臨渝關)을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천년의 수수께끼 임유관(臨渝關)을 찾았다 - 최초공개 삼국사기 온달열전을 보면, “.......이때 후주의 무제가 군사를 출동시켜 요동(遼東)을 침략하니 왕(평원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拜山)의 들판에서 맞받아 쳐 싸우는데, 온달이 선봉이 되어 용감히 싸워 적병 수십명의 목을 베니 여러 군사들이 이긴 기세를 타 용감히 싸워 크게 이겼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를 보면, “평강상호태열제(평원왕)는 담력이 있고 말타고 활쏘는 것을 잘했으니 곧 주몽의 풍모가 있었다. 대덕으로 개원하고 정치를 잘하였다. 대덕18년 병신(A.D.576)에 제(평원왕)는 대장 온달을 보내 갈석산(碣石山), 배찰산(拜察山)을 토벌하고 추격하여 유림관(楡林關)에 이르러 북주를 크게 격파하니 유림진(..

카테고리 없음 2012.06.04

윤여동설 - 천년의 의문 “요택(遼澤)”의 위치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천년의 의문 “요택(遼澤)”의 위치찾기 - 최초주장 요택(遼澤)의 위치는 지금까지 의문의 장소였다. 정확한 요택의 위치를 찾지 못해 우리의 역사해석은 한없는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야만 했다. 그런데 자치통감에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안시성에서 철군할 때의 기록이 일자별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자치통감 권198 당기14 태종문무대성대광효황제 조를 보면, “․(貞觀 十九年 九月) 癸未 敕班师 先拔辽․蓋二州户口渡辽 乃耀兵於安市城下而旋 (서기 645년 9월18일 (안시성에서) 경사로 회군할 것을 명하였다. 요주, 개주 두 주의 백성을 먼저 요수를 건너게 하고 안시성 아래에서 시위하고 개선하였다) ․乙酉 至辽东(9월20일 요동에 이르다) ☆ 안시성에서 요동성까지 2일이 걸렸다. ․丙戌 渡..

카테고리 없음 2012.05.28

윤여동설 - 고죽국(孤竹國)과 백이숙제가 굶어 죽은 수양산(首陽山)의 위치

윤여동설 - 고죽국(孤竹國)과 백이숙제가 굶어 죽은 수양산(首陽山)의 위치 백이숙제의 나라 고죽국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일까? 주(周) 무왕이 은(殷)나라를 멸망시키자 기자(箕子)는 자신을 따르는 은나라 유민(遺民)들을 이끌고 고죽국(孤竹國)으로 갔고, 그러자 주 ..

카테고리 없음 2012.04.29

윤여동설 - 가야는 한반도에 없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가야는 한반도에 없었다 - 최초주장 일반적으로 우리는 가야가 지금 한반도 가야산의 남쪽, 지리산의 동쪽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인식하고 있으나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기록되어 있는 가야의 위치에 대한 기록과는 그 지형이 다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가야의 서북쪽(필자주 : 사실은 서남쪽이다)에 지리산이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한반도의 지리산은 서북쪽이 아닌 서쪽에 위치하고 있고,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가야산이 가야의 동북쪽에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한반도의 가야산은 북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야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으며, 때로는 수교하고, 때로는 전쟁을 했으며, 결국 후대에 이르러 가야를 병합한 것으로 나타나는 가야 북쪽에 위치했었다는 신라의 위치에 대하여, 신라 5대 왕이..

카테고리 없음 2012.02.25

윤여동설 - 우공갈석(禹貢碣石)은 북경 서남쪽 지금의 보정시 낭아산(狼牙山)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대의 우공갈석(禹貢碣石)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낭아산(狼牙山) - 최초공개           우공갈석은 상산(항산) 구문현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고, 중국 역사상 9명의 황제들이 올랐다는 유명한 산이다.  진(秦) 시황이 올랐고,   진 2세 호해가 올랐다고 하며,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침공하기 전인 기원전 110년에 올랐고,  소설 삼국지에 등장하는 조조 즉 위 무제가 올라 “관창해(觀滄海)”라는 시를 읊었다 하고,   진(晉) 선제 사마의가 공손연을 토벌할 때 창려를 거쳐 갈석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진시황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북위 문성제,   북제 문선제가 올랐고,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 올랐다고 하고,   당 태종 역시 고구려를 침공할 때 올라 “춘..

카테고리 없음 2010.08.22

자료 - 갈석산은 어떻게 생겼을까?

자료 - 갈석산은 어떻게 생겼을까? [위: 당토명승도회에 그려진 갈석의 모습, 조조의 시 관창해라는 시가 쓰여져 있다] 뾰족한 바위 모습이 매우 신비롭다. 중국의 황제들이 올라 바다를 바라보았다는 갈석산은 지금 진황도 창려의 갈석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갈석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혹시 상상으로 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주변이 물로 둘러싸여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운해를 그려 놓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렇듯 그 형태가 전해지고 있는 갈석을 지금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혹시 언젠가 지진 등으로 인하여 무너져 버린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는데, 필자는 지금 북경 서남쪽 태행산맥 부근에서 이 갈석을 찾아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위 : 하북성 진황도 창려현..

카테고리 없음 2009.08.21

윤여동설 - 고조선과 연나라의 국경 만번한은 지금의 어디일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조선과 전국시대 연나라의 국경이었던 만번한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밀운수고 부근 - 최초주장 삼국지 한(韓) 전을 보면 위략(魏略)의 기록을 주로 달아 놓았는데, 그 기록을 보면, 『위략에 이르기를, 옛날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가 있었다. (昔箕子之後 朝鮮侯)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연나라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동쪽을 공략하려 하였는데, 조선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주 왕실을 존속시켜주기 위하여 거꾸로 연나라를 공격하려고 하다가 그 대부인 예가 간하여 중지하고, 예로 하여금 서쪽의 연나라를 설득하니 연나라도 중지하고 공격하지 않았다. 후에 (조선후의) 자손들이 점점 교만하고 포학해져 연나라가 드디어 장수 진개를 보내 그 서쪽을 공격하여 2천여 리(필자주 : 사기 흉노전에는 1천여리라 기록되..

카테고리 없음 2009.08.06

윤여동설 - 한반도의 차 시배지는 과연 어디일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의 차 시배지는 과연 어디일까? - 최초주장 삼국사기에는 지리산에 대하여, 신라본기 42대 흥덕왕 3년(828) 12월 조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문종이 인덕전에서 그를 불러 차등을 두어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사신 대렴이 차 종자를 가지고 왔으므로 왕이 지리산(地理山)에 심게 하였다. 차(茶)가 선덕왕(선덕여왕) 때부터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매우 유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 삼국사기에는 지리산(地理山)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 한반도의 지리산은 지이산(智異山)이라 쓰고 지리산이라 읽는다.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지리산(智異山)이 진주목의 서쪽 1백리에 위치한 산이라고 하였으나 지금 한반도 ..

카테고리 없음 2009.07.27

윤여동설 - 우리 역사의 정통성은 남한이 이었다

윤여동설 - 우리 역사의 정통성은 남한이 이었다 우리의 옛 역사는 환인시대, 환웅시대를 지나며 홍산문화(요하문명)를 꽃피웠고, 고조선에 이르러 청동기문화를, 다시 한과 위만조선, 부여시대에 이르러 철기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부여는 다시 고구려가 되고, 고구려는 한사군 중 임둔군, 낙랑군, 구현토군(낙랑동부도위)과 요동군, 대방군을 흡수함으로써 대제국이 되었다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당하고, 발해가 그 땅을 차지하게 되고, 발해는 다시 요·금·원·청·중국으로 이어지게 된다. 위만조선은 다시 한 무제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고 한사군이 되었다가 고구려에 복속되고, 한은 다시 삼한(마한, 진한, 변한)으로 나누어지게 되고, 마한에서 백제가, 진한에서 신라가, 변한에서 가야가 건국되었다가 통일신라가 되고, 통일신라가 ..

카테고리 없음 2009.05.14

윤여동설 - 신라 김씨왕들은 정말 흉노족 김일제의 후예들일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신라 김씨왕들은 정말 흉노족 김일제의 후예들일까? - 최초주장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9년(A.D.65) 조를 보면, "봄3월 밤에 금성 서쪽 시림 숲 속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자 왕이 날이 새자마자 호공을 보내어 둘러보게 하였더니, 호공이 돌아와 나무 가지에 조그마한 금괴가 걸려 있고 하얀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고 보고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궤를 가져와 열었더니 그 속에 어린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는데, 용모가 기이하고 위품이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자식을 주시는 것이 아니겠는가?'하고는 거두어 길렀다. 그가 자라니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으므로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씨로 하였다."..

카테고리 없음 2009.04.23

윤여동설 - 고인돌과 미송리형 토기는 고조선 고유문명의 흔적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인돌과 미송리형 토기는 고조선 고유문명의 흔적 아니다 - 최초주장 지금 학자들은 비파형동검과 미송리형토기 그리고 고인돌을 고조선의 대표적인 3대 표지유물이라 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곳은 모두 고조선의 강역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 중 고인돌과 미송리형토기는 고조선을 대표하는 표지 유물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비파형동검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의 요하서쪽 홍산문화권 지역이고,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곳은 한반도 남부지역이며, 미송리형토기는 압록강변인 평안북도 의주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학자들이 고인돌이나 미송리형 토기를 고조선의 표지유물로 규정하게된 것은 북한 평양이 고조선의 도읍 왕..

카테고리 없음 2009.04.10

윤여동설 - 전한낙랑군 - 낙랑국 - 후한낙랑군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낙랑의 위치를 찾아라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전한낙랑군 - 낙랑국 - 후한낙랑군의 위치 싫든 좋든 우리 고대 역사와 “낙랑(樂浪)”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왜냐하면 옛날 고조선 · 위만조선의 도읍이 왕검성(왕험성이라고도 한다)이었고, 한사군 때 전한낙랑군의 치소가 왕검성이었으며, 또 고구려의 평양성과 고려의 서경 역시 같은 장소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왕검성 즉 낙랑군의 치소를 정확히 찾는다면 우리 고대 역사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낙랑(樂浪)" 이란 말이 원래 어디에서 유래하였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즐거울락(樂)”과 “물결랑(浪)” 자로 이루어진 것을 보면 경치가 좋은 내륙의 큰 강 또는 호수주변이나 큰 바다를 끼고 있는 ..

카테고리 없음 2009.04.03

윤여동설 -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라?

윤여동설 -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라? 우리나라 사람 중 대부분은 가야가 경남 김해 부근에 위치했다고 인식하고, "임나" 하면 "임나가라(임나국)"와 "임나일본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임나일본부에 대하여 일본학자들은 고대의 왜국이 한반도 남쪽 가야지역으로 진출하여 그곳에 임나일본부라는 것을 설치하고 한반도 남부를 일정기간 통치했다고 주장하고, 우리 학자들은 말도 되지 않는 주장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삼국유사 기이 제1 오가야 조를 보면,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를 5가야로 기록하고 있는데, 수로왕의 금관가야까지 합하면 6가야가 된다. 그리고 일연이 살았던 고려시대의 본조사략이라는 사서에는 "태조 천복 5년(A.D.940) 경자년에 5가야의 이름을 고쳤다. 첫째는 ..

카테고리 없음 2009.03.30

윤여동설 - 익산 미륵사지는 선화공주가 지은 절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익산 미륵사지는 선화공주가 지은 절이 아니다 - 최초주장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이다. 그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던 것이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으로 재주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항상 마를 캐다가 파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서동이라고 불렀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공주 선화(善花 혹은 善化)가 매우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머리를 깎고 서울로 가서 마을 아이들에게 마를 먹이니 이내 아이들이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를 지어 아이들로 하여금 부르게 하였다. 善花公主主隱 他密只稼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遣去如 (선화공주님은 남모르게 애인 만들어 놓고, 서동의 방..

카테고리 없음 2009.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