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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우리 역사의 정통성은 남한이 이었다

윤여동 2009. 5. 14. 23:08

윤여동설 - 우리 역사의 정통성은 남한이 이었다

 

 

  우리의 옛 역사는 환인시대, 환웅시대를 지나며 홍산문화(요하문명)를 꽃피웠고, 고조선에 이르러 청동기문화를, 다시 한과 위만조선, 부여시대에 이르러 철기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부여는 다시 고구려가 되고, 고구려는 한사군 중 임둔군, 낙랑군, 구현토군(낙랑동부도위)과 요동군, 대방군을 흡수함으로써 대제국이 되었다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당하고, 발해가 그 땅을 차지하게 되고, 발해는 다시 요·금·원·청·중국으로 이어지게 된다. 

 

  위만조선은 다시 한 무제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고 한사군이 되었다가 고구려에 복속되고,
  한은 다시 삼한(마한, 진한, 변한)으로 나누어지게 되고, 마한에서 백제가, 진한에서 신라가, 변한에서 가야가 건국되었다가 통일신라가 되고,
  통일신라가 쇠약해지자 그 땅에서 견훤의 후백제와 궁예의 태봉이 건국됨으로 해서 잠깐 후삼국으로 나누어지게 되었으나, 왕건이 그 후삼국 모두를 통합하게 되어 고려가 건국되기에 이르고,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으로 이어지고 그 맥이 대한민국으로 이어진다.
 
                                                                                  
                                        |→북부여→졸본부여→고구려→발해→요→금→원→청→중국 
                                        |    
                                        |→위만조선→한사군(낙랑, 진번, 임둔, 현토)
환인→환웅→고조선  → |
                                        |
                                        |→한(삼한)→신라·백제·가야→통일신라→후삼국→고려→조선→한국

 

  위만의 조상은 원래 고조선의 서부지역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의 진개가 침공하여 고조선 땅 1천여리(2천여리라고도 한다)를 빼앗아 갈 때 그 지역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후일 태어난 위만은 연나라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이지만 민족의 풍습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위만은 동이족의 복장을 하고, 상투를 틀고 살았을 것이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진(秦)나라 때에 이르러 폭정으로 살아갈 수가 없자 위만은 조선 유민들을 모아 진나라에 맞서다가 진나라가 멸망하고 한(漢)나라가 서게 되었고, 한나라에서 한 고조 유방과 한 동네에서 한날 한시에 태어난 노관을 연왕에 임명하자 위만은 어쩔 수 없이 연왕 노관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연왕 노관은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한 고조가 죽자 스스로 생명의 위협을 느껴 기원전 195년에 이르러 서쪽의 흉노로 망명해 들어가 버리게 되는데, 이때 위만은 그와는 반대방향인 동쪽의 조선(고조선)으로 망명해 오게 된다. 
  이때 위만이 노관을 따라 흉노로 가지 않고 동쪽의 고조선으로 향한 것은 그가 옛 고조선의 유민이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한나라 초기 고조선과 연나라의 국경은 요수(패수[浿水]였다고 하는 것은 오기이고 추수라고 한 기록도 요수[遼水]의 오기이다)였는데, 이 요수는 지금의 북경 서북쪽 관청수고로 흘러드는 양하(洋河)와 연결되는 영정하를 말하는 것이다.
  위만은 조선으로 망명해 오기 전 아마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지역인 요수 서쪽 즉 요서군 부근에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곳에 남아 있다가는 죽게 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노관이 흉노로 망명해 가자 위만도 급히 조선유민들을 이끌고 요수를 건너 동쪽으로 요동(현 북경), 압록강(밀운수고)를 건너고, 고북구를 통과하여 난평을 지나 난하진에서 패수(난하)를 건너 하북성 승덕시 부근의 왕검성으로 준왕을 찾아가 망명을 요청하면서, 자신의 조상이 본래 고조선 사람임을 밝혔을 것이고, 나라의 서쪽 변경지역에 살게 해 준다면 나라를 지키는 번병이 되겠노라고 맹세하게 된다.
   그리하여 준왕은 위만이 조선 유민이라는 것 하나만을 보고는 충성심이 검증되지도 않은 위만을 박사로 임명하고 서쪽 변경 지역의 사방 백리 땅을 영지로 내려주어, 국가 방어 상 매우 중요한 지역인 한나라와의 변경 방어를 맡기게 된다.
  그러자 위만은 산동반도 부근의 제나라, 산서성 중부의 조나라, 하북성 중부의 연나라로부터 고조선으로 도망쳐 와서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살고 있던 유민들을 그의 세력권 내로 흡수할 수 있었고, 강한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는데, 위만에게 주어진 영지는 지금의 북경 남쪽 대흥 부근으로 비정되고, 이곳이 곧 험독이다.       

그렇게 1년이 흐르자 위만은 고조선의 내정을 세밀히 파악할 수 있었고, 준왕의 고조선 정권을 전복시킬 음모를 꾸미게 된다.
  지금으로 말하면 쿠데타를 모의하고는,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 한나라 군이 열 군데 길로 쳐들어온다고 거짓말로 보고하고는 왕궁으로 가서 왕을 호위하겠노라고 하면서 군사들을 이끌고 왕검성에 도착하자마자 창 끝을 준왕에게 겨누고 왕검성을 빼앗아 조선(위만조선)의 왕위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위만은 오갈 데 없던 자신을 받아들여주고 총애하여 영지까지 내려준 준왕의 은혜를 배신으로 갚은 것이다.

 

  한편,
  믿었던 위만에게 졸지에 왕검성을 빼앗기게 된 준왕은 급히 좌우궁인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도망쳐 만리장성 남쪽의 나머지 반쪽 땅인 마한, 진한, 변한을 합하여 목지국(또는 월지국이라고도 한다)에 도읍하고 국호를 한(韓)이라 하고 다시 한왕에 오르게 된다.
  당시 준왕으로서는 기가 막혔을 것이고, 위만을 철천지원수로 여기고 살다가 후손없이 죽고 말았지만 위만조선을 증오하는 마음은 한(韓)에 그대로 이어졌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위만도 죽고, 왕위가 그 아들로 이어졌고, 다시 위만의 손자인 우거로 이어졌을 때인 기원전 128년에 창해군(蒼海郡)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창해군 사건이란 위만조선의 우거왕과 예왕 남려(사서에는 예군 남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게 되어 예왕 남려가 위만조선의 영향권에서 이탈하여 자기 백성 28만 명을 이끌고 요동군에 투항하는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 이때 예군 남려가 28만구를 이끌고 요동군에 투항했다는 기록을 가지고 남려가 실제 28만명을 이끌고 요동군으로 이동해 갔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예왕 남려가 자신의 나라인 예의 땅과 예의 백성을 들어 요동군에 투항했고, 한나라에서는 그 예의 땅을 창해군이라 명명했다는 말이지 실제 28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를 떠나 요동군으로 이동해 갔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자 한 무제는 그 예의 땅을 창해군이라 명명하고, 요동군(지금의 북경 부근)에서부터 창해군까지 도로를 개설하기 시작했는데, 그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연나라, 조나라, 제나라 사람들로부터 세금을 너무 많이 걷게 되어 그 나라의 경제가 피폐하여 졌다고 하고, 따라서 도로건설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고, 창해군도 폐지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때 마한, 진한, 변한은 한(韓)의 땅이었는데,
우리는 지금 한(漢)나라가 요동군에서부터 창해군까지의 도로건설 기록에 대하여, 이때 한(전한) 나라가 요하 부근의 요동군에서부터 압록강을 건너 위만조선의 강역이었을 북한 지역을 가로질러 강원도 강릉 부근의 창해군까지 도로를 개설하려 했다고 역사를 해석하고 있으나, 이는 전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이때 한나라에서는 북경 부근의 요동군으로부터 내몽골 정람기 부근의 남려왕의 예까지 도로를 건설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자 하북성 승덕시 부근에 도읍했던 위만조선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남쪽의 강한 세력인 한(韓)과의 적대적인 관계가 부담인데, 거기에 다시 서북쪽의 예(濊)까지 적대적인 세력이 될 경우 나라 자체의 존망을 위협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강하게 반발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한(漢)나라에서는 창해군을 폐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창해군 사건이 단초가 되어 기원전 108년에 이르러 결국 위만조선이 멸망하게 되고, 한나라에서는 그 땅을 나누어 한사군을 설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소제 시원 5년인 기원전 82년에 이르러 임둔군은 남려의 예가 원래의 예의 땅을 동부여 해부루왕에게 빼앗기자 개마산, 태백산을 넘어  동쪽으로 이동하여 임둔군 땅에 예를 재건하게 되는데, 이를 역사에서는 동예라 하고, 진번군은 맥국이 독립하게 되어 두 군이 폐지되기에 이르고,

  한나라에서는 국경 방어를 위해 현토군을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 옛 현토군의 관할지를 낙랑군에 합하게 된다. 

  한편 옛 현토군의 관할지를 이관받은 낙랑군(치소는 조선현 :현 하북성 승덕시 부근)에서는 단단대령(칠로도산) 동쪽 7개 현을 따로 떼어 낙랑동부도위(치소는 동이현)를 설치하게 되고, 지금의 무령산 남쪽인 흥륭, 밀운, 평곡 일원에 낙랑남부도위(치소는 소명현)를 설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 전한서 권28하 지리지 제8하의 낙랑군 조에는, “무제 원봉 3년(B.C.108)에 처음으로 설치했는데, 유주에 속했다. 62,812호이고, 인구는 406,748명이다. 운장이 있고, 25개 현이다. 조선현, 남한현, 패수현, 함자현, 점제현, 수성현, 증지현, 대방현, 사망현, 해명현, 열구현, 장잠현, 둔유현, 소명현(남부도위 치소), 누방현, 제해현, 혼미현, 탄열현, 동이현, 불이현(동부도위 치소), 잠태현, 화려현, 사두매현, 전막현, 부조현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또 세월이 흘러 전한 말기 낙랑군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기원전 57년에 신라가 진한 땅(요녕성 호로도, 금주시 부근)에서 건국되기에 이르고,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에 졸본부여(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 부근)의 국호를 고구려로 바꿈으로 해서 고구려가 건국되기에 이르고, 기원전 18년에 마한의 동북쪽 변두리인 옛 진번 땅(도산부근)에서 백제가 건국되며, 진한의 남서쪽인 변한 땅(호로도 흥성 부근)에서 가야가 건국되는 것이다.
  역사 기록에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했었다는 수많은 기록들은 바로 신라가 실제 낙랑군 일부를 차지했기 때문일 것이고, 신라의 서쪽에 백제가 있었고, 남쪽에 가야가 있었다는 말은 진황도 도산 일원에 백제가 위치하고 있었고, 요녕성 호로도 흥성 부근에 가야가 위치했었기 때문일 것이며, 마한의 동북쪽에서 백제가 건국되었다는 말은 당산, 풍윤 부근에 도읍하고 있던 마한의 동북쪽인 도산 부근에서 백제가 건국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기록이 사서에 남겨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위만조선의 땅을 거의 차지하게 되는 고구려와 한의 마한 땅에서 건국된 백제와 한의 진한 땅에서 건국된 신라 그리고 한의 변한 땅에서 건국된 가야 이 네 나라가 4국시대의 막을 열었다가 가야가 신라에 복속되어 삼국시대가 되었고, 결국 백제와 고구려도 멸망하게 되어 백제 땅과 고구려 땅의 남쪽 일부가 신라에 편입되어 통일신라가 되고, 그 북쪽 고구려 땅은 발해가 되었다가 요·금·원·청으로 이어지고, 남쪽의 신라는 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북한은 자기들이 고조선의 왕검성을 차지하고 있고, 고구려의 맥을 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우리 역사의 정통성을 이었다고 주장하며 국호도 “조선”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지금의 북한 평양은 고조선의 왕검성도 아니고, 고구려의 평양성도 아니다. 
  반면에 남한은 남한이 고조선과 한의 맥을 동시에 이었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고, 신라의 맥을 고려가 이었고, 고려의 맥을 조선이 이었으며 조선이 한반도 서울에 도읍하고 500년을 이었고, 그 맥이 대한민국으로 이어졌으므로 우리 역사의 정통성이 남한에 있다고 주장하며 국호를 “한국(대한민국)”이라 하고 있다.

 

☆ 남한이 고조선과 한의 맥을 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옛날 환인국의 맥을 환웅국이 이었고, 환웅국의 맥을 왕검조선이 이었으며, 왕검조선의 맥을 기자조선이 이었는데,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이 왕검성을 위만에게 빼앗기고 그 남쪽 땅으로 옮겨 다시 한을 세우고 한왕에 올랐으므로 한이 우리 역사의 정통 맥이고, 다시 삼국시대를 지나 통일신라, 고려, 조선으로 이어졌고, 서울이 조선의 500년 도읍이었으므로 당연히 남한 정부에 정통성이 있다는 것이고,
  북한이 고조선, 고구려의 맥을 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금의 북한 평양을 옛 고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보고 북한이 왕검성과 평양성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고조선의 정통성을 북한정권이 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사실 북한 평양은 고조선의 왕검성도 아니고, 위만조선의 왕검성도 아니며, 낙랑군의 치소도 아니고, 고구려의 평양성도 아니다. 고조선의 왕검성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에 위치했다.

    
  

  그런데 사실 고조선,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었고, 한의 도읍 목지국(월지국)은 지금의 당산, 풍윤 부근이었다. 
  고려 때까지 우리 고대 역사의 중심은 한반도가 아닌 난하를 중심으로 한 대륙이었고, 북경 부근까지가 우리의 옛 땅이었다.
  그러다가 조선 태조 이성계 때에 이르러 대륙을 떠나 한반도 한양으로 도읍을 옮겨 비로소 한반도가 우리 역사의 중심지가 되었고, 지금의 서울을 중심으로 조선 500년이 이어졌고, 대한민국으로 그 맥이 이어졌다.
  초립동이도 우리 역사의 정통성이 어디로 이어졌는지 판단할 수 있는 일이다.
  대륙역사를 알지 못하니 그에 따라 역사의 정통성까지도 시비에 휘말리게 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