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진번군 23

윤여동설 - 잃어버린 현토성(玄菟城)을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잃어버린 현토성(玄菟城)을 찾았다 - 최초공개 [장가구시 회안성진 : 규모 가로세로 각 약 1.5km 좌표 동경 114도28분01초 북위 40도27분48초] [위 : 무너진 현토성 성벽] 한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네 조각으로 나누어 설치했던 한사군은 낙랑군(樂浪郡), 진번군(眞番郡), 임둔군(臨屯郡), 현토군(玄菟郡)이었다. 그 중 현토군(玄菟郡)은 처음에는 기원전 107년에 옥저 땅에 설치되었으나 기원전 75년에 이르러 그 위치를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게 된다. 이때 옮긴 현토군이 후한서에 기록되어 있는 낙양 동북 4천리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현토군으로서 바로 이 현토군이 고구려, 동부여와 수많은 접촉기록을 남기게 된다. 이때 새로 옮겨진 현토군은 지금의 중..

카테고리 없음 2019.05.07

윤여동설 - 진번군(眞番郡)은 요녕성 능원(凌源) 일원에 설치되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진번군(眞番郡)은 요녕성 능원(凌源) 일원에 설치되었었다 - 최초주장 진번군(眞番郡)의 위치에 대해서는 숙신지역위치설, 고구려지역위치설, 요동지역위치설, 진국설, 맥국설, 대방설, 마한설 등 주장들이 아주 분분한데, 이는 진번군의 치소인 삽현(霅縣)이 장안으로부터 7,640리 떨어져 있었고, 임둔군의 치소인 동이현(東暆縣)이 장안으로부터 6,138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무릉서의 기록 때문에 학자들이 헷갈린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명칭과 거리기록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임둔군의 치소였다는 동이현과 진번군의 치소였다는 삽현의 명칭과 거리가 바뀌어 잘못 기록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옛 진번국이 진번군이 되었다가 맥국으로 변화했다는 진번군맥국설이 정확한 주장으로서,..

카테고리 없음 2018.12.01

윤여동설 - 임둔군(臨屯郡)은 내몽골 고륜기 일원에 설치되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임둔군(臨屯郡)은 대륙의 내몽골 고륜기 일원에 설치되었었다 - 최초주장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원도 강릉대도호부 건치연혁을 보면, “本濊國[一云鐵國 一云蘂國] 漢武帝 元封2年 遣將討右渠 定四郡時爲臨屯”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본래는 예국이다. [한편으로는 철국이라고도 하고 예국이라고도 한다] 한 무제 원봉2년에 장수를 보내 우거를 토벌하고 4군을 정할 때 임둔군이 되었다”라는 뜻이다. 물론 강릉(명주)지역이 본래부터 예국이었다는 설명은 잘못된 것으로서 원래 그곳은 임둔국(臨屯國)으로서 위만조선에 복속되어 있었는데, 기원전 108년에 이르러 한(漢)나라의 침공을 받아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그 땅을 나누어 한4군이 설치될 때 그 임둔국 땅이 임둔군이 되었다. 그랬다가 기원전 82년에 이르러..

카테고리 없음 2018.11.24

윤여동설 - 진번군(眞番郡)의 진짜위치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진번군(眞番郡)의 진짜위치 찾기 - 최초주장 전한서 권6 무제기(武帝紀) 제6 원봉 3년(B.C.108) 조의 주를 보면, “臣瓚曰 茂陵書 臨屯郡治東暆縣 去長安六千一百三十八里 十五縣, 眞番郡治霅縣 去長安七千六百四十里 十五縣(신찬이 무릉서에는 임둔군의 치소는 동이현(東暆縣)으로서 장안에서 6,138리 떨어져 있고 통현은 15현이고, 진번군의 치소는 삽현(霅縣)으로서 장안에서 7,640리 떨어져 있고, 통현이 15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말했다)”라고 임둔군과 진번군의 위치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특히 진번군(眞番郡 필자주 : 사실은 番의 음이 普安反이라 하였으니 진반군이라 읽어야 옳다)의 위치에 대한 정설이 아직까지도 정립되어 있지 못하다. 아직까지 역사학자들조차 진번군의 위치를 정확..

카테고리 없음 2017.10.15

윤여동설 - 임둔군(臨屯郡)의 진짜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임둔군(臨屯郡)의 진짜위치 - 최초주장 우리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 중에 "임둔군(臨屯郡)"의 명칭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인데, 막상 그 위치가 어디였는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기가 마땅치 않다. 그런데 자치통감 권21 한기(漢紀)13 세종효무황제 원봉 3년(B.C.108) 조의 주를 보면, “臣瓚曰 茂陵書 臨屯郡治 東暆縣 去長安六千一百三十八里 領十五縣(신찬왈 무릉서에는 임둔군의 치소는 동이현이고, 장안에서 6,138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후한서 지제23 군국5에는, 낙양으로부터 동북쪽으로 요동군이 3,600리, 현토군(필자 주 : 초기 동옥저에 설치되었던 곳에서 이동하여 구려의 서북쪽에 다시 설치한 현토군을 말한다)이 4,000리, 낙랑군이 5,000리 떨어져 ..

카테고리 없음 2017.10.07

윤여동설 - 위만조선과 한4군은 북경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위만조선과 한4군은 북경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 최초주장 낙양 동북 3,600리에 위치했던 옛 요동군은 지금의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제75 예전을 보면, “원삭 원년(B.C.128) 예군 남려(南閭) 등이 우거(위만조선의 왕)를 배반하고 28만구를 이끌고 요동(요동군)으로 내속하였으므로 무제(전한 무제)는 그 땅을 창해군(蒼海郡)으로 만들었다가 수년 후에 폐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무제는 요동군에서 예까지 도로를 개설하려고 했고, 이에 드는 비용을 연(燕)과 제(齊)에서 조달토록 했는데, 워낙 비용이 많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연과 제지역이 매우 소란스러웠다고 한다. 그런데 이 창해군은 불과 2년여 만에 폐지되는데, 그 명확한 이유는 전해지지 않았고..

카테고리 없음 2015.07.24

윤여동설 - 백제는 대방고지(帶方故地)에서 건국되지 않았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는 대방고지(帶方故地)에서 건국되지 않았다 - 최초주장 백제의 건국지를 말할 때 일반적으로 “대방고지(帶方故地 : 대방옛땅)” 또는 “패대지간(浿帶之間 : 패수와 대수 사이지역)” 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백제는 대방옛땅에서 건국되지 않았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사이에서 건국되지도 않았으며, 대수와 패수를 건넌 진번(眞番) 남쪽 한산(漢山) 부근에서 건국되었다. ☆ 한사군 중 진번군의 설치위치에 대하여 논란이 있는데, 북한산이 위치하고 있는 그 북쪽 부근이 진번군이었다. 수서 백제전을 보면, “동명의 후손에 구태라는 자가 있었는데,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비로소 대방고지(帶方故地)에 나라를 세웠다. 한 나라 요동태수 공손도의 딸을 아내로 삼았는데, 나라가 점점 번..

카테고리 없음 2014.09.19

윤여동설 - 창해군 사건 - 위만조선 멸망 - 한사군 설치 - 이군으로 축소 - 삼국(고구려·백제·신라)의 흥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창해군 사건 - 위만조선 멸망 - 한사군 설치 - 이군으로 축소 - 삼국(고구려·백제·신라)의 흥기- 최초주장 후한서 예전을 보면, “원삭 원년(B.C.128)에 예군 남려(南閭) 등이 우거(위만조선의 우거왕)를 배반하고 28만구를 이끌고, 요동으로 내속하였으므로 (한) 무제가 그 땅을 창해군(蒼海郡)으로 만들었다가 수년 후에 폐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사기 권55 유후세가 제25 장량 전에 창해군(倉海郡) 관련 기록이 있고, 전한서 권6 무제기 제6에는,“元朔元年 秋 東夷薉君南閭等 口二十八萬人降 爲蒼海郡 元朔三年 春 罷蒼海郡” 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한서 권24하 식화지 제4하에는, “彭吳穿濊貊 朝鮮 置滄海郡 則燕齊之間靡然發動............. 東置滄海郡“ 이라고 기록되어 있으..

카테고리 없음 2014.02.01

윤여동설 - 위만조선의 기본강역과 주변국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위만조선의 기본강역과 주변국 - 최초주장 기원전 108년에 설치된 초기 전한낙랑군 11현 조선,남감,패수,점선,수성,증지,사망,둔유,누방,혼미,탄열 ☆ 초기 임둔군의 통현은 15개현, 진번군의 통현도 15개현이었다고 하고, 낙랑군의 통현은 11개현으로 나타나는데, 초기 현토군의 통현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소제이후의 전한낙랑군 11현과 낙랑남부도위 7현, 낙랑동부도위 7현 조선,남감,패수,점선,수성,증지,사망,둔유,누방,혼미,탄열[낙랑군] 소명,대방,함자,해명,열구,장잠,제해[낙랑남부도위 : 옛 진번군지역의 일부] 불이,동이,잠대,화려,사두매,전막,부조[낙랑동부도위 : 옛 현토군지역의 일부] 후한낙랑군 18현 조선,감,패수,점선,수성,증지,사망,둔유,누방,혼미,낙도[낙랑군] 소명,대방..

카테고리 없음 2013.03.01

윤여동설 - 한반도 경주에 신라왕릉은 하나도 없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 경주에 신라왕릉은 하나도 없다 - 최초주장 [위 : 경주오릉, 이 고총들을 신라 혁거세왕릉, 알영왕후릉, 남해왕릉, 유리왕릉, 파사왕릉이라고 비정하고 있으나 이는 신라 왕릉들이 아니다] 어느 역사학자가 한반도 “경주에 있는 신라왕릉 중 제대로 명명된 곳이 7기 뿐”이라고 그의 유저 “신라왕릉 연구”에서 주장하였다고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으나, 사실 신라왕릉들이 잘못 비정되었다는 주장은 조선시대부터 꾸준히 제기되어온 것으로서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경주부 능묘 조를 보면, “혁거세릉,미추왕릉,법흥왕릉,태종무열왕릉,진흥왕릉,선덕왕릉,효소왕릉,성덕왕릉,헌덕왕릉,흥덕왕릉,김유신묘,김인문묘,김양묘”에 대한 조성위치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기 때문에 조선시대 사람들은..

카테고리 없음 2012.03.03

윤여동설 - 낙랑군과 낙랑국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낙랑군과 낙랑국 - 최초주장 대무신왕은 고구려의 3대왕으로서 2대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었다. 유리왕의 장자 즉 다물후 송양의 큰딸이 유리왕과 혼인하여 낳은 아들 도절은 일찍 죽었고, 유리왕의 계비 화희가 낳은 둘째아들 해명은 유리왕이 졸본에서 국내로 도읍을 옮기려 할 때 그를 반대하다가 유리왕으로부터 스스로 자결하라는 명을 받고 죽었다. 그리하여 유리왕이 다물후 송양의 작은 딸을 다시 왕비로 맞아들여 낳은 아들이 바로 대무신왕 무휼이었다. 무휼(대무신왕)은 자라 15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모본호족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고, 또 갈사왕의 손녀를 둘째 왕비로 맞아들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가 바로 호동왕자였다. 이때까지도 원비였던 모본호족의 딸은 아들을 낳지 못했다가 나중에야 아들을 낳게된다. ..

카테고리 없음 2009.04.21

윤여동설 - 고인돌과 미송리형 토기는 고조선 고유문명의 흔적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인돌과 미송리형 토기는 고조선 고유문명의 흔적 아니다 - 최초주장 지금 학자들은 비파형동검과 미송리형토기 그리고 고인돌을 고조선의 대표적인 3대 표지유물이라 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곳은 모두 고조선의 강역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 중 고인돌과 미송리형토기는 고조선을 대표하는 표지 유물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비파형동검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의 요하서쪽 홍산문화권 지역이고,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곳은 한반도 남부지역이며, 미송리형토기는 압록강변인 평안북도 의주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학자들이 고인돌이나 미송리형 토기를 고조선의 표지유물로 규정하게된 것은 북한 평양이 고조선의 도읍 왕..

카테고리 없음 2009.04.10

윤여동설 - 낙랑군과 낙랑동부도위,낙랑남부도위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낙랑군과 낙랑동부도위, 낙랑남부도위의 위치 - 최초공개    "낙랑(樂浪)"에 대하여 누차 언급하는 것은 이 낙랑의 위치를 정확히 찾는 것이 바로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 강역을 찾는 지름길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낙랑군은 기원전 108년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한사군을 설치할 때 그 도읍인 왕검성(왕험성이라고도 한다)을 낙랑군의 치소로 삼았기 때문에, 낙랑군의 위치를 정확히 찾을 수 있다면 지금까지도 그 위치에 대하여 논란이 많은 고조선(왕검조선)의 도읍 왕검성과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을  정확히 찾을 수 있고, 고조선(왕검조선)과 위만조선의 강역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나머지 임둔군, 진번군, 현토군의 위치도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전한서 ..

카테고리 없음 2009.04.07

윤여동설 - 전한낙랑군 - 낙랑국 - 후한낙랑군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낙랑의 위치를 찾아라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전한낙랑군 - 낙랑국 - 후한낙랑군의 위치 싫든 좋든 우리 고대 역사와 “낙랑(樂浪)”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왜냐하면 옛날 고조선 · 위만조선의 도읍이 왕검성(왕험성이라고도 한다)이었고, 한사군 때 전한낙랑군의 치소가 왕검성이었으며, 또 고구려의 평양성과 고려의 서경 역시 같은 장소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왕검성 즉 낙랑군의 치소를 정확히 찾는다면 우리 고대 역사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낙랑(樂浪)" 이란 말이 원래 어디에서 유래하였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즐거울락(樂)”과 “물결랑(浪)” 자로 이루어진 것을 보면 경치가 좋은 내륙의 큰 강 또는 호수주변이나 큰 바다를 끼고 있는 ..

카테고리 없음 2009.04.03

윤여동설 - 무천(舞天)의 나라 예(濊)는 원래 어디에 있었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무천(舞天)의 나라 예(濊)는 원래 어디에 있었을까? - 최초주장 후한서 예(後漢書 濊 : 동예)전 "예(濊)는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옥저, 남쪽으로는 진한과 접했고, 동쪽은 대해에 닿았으며, 서쪽은 낙랑까지이다. 예, 옥저, 고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 땅이었다. 옛날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기자는 예의와 농사짓는 법과 양잠하는 법을 가르쳤다. 또 8조의 가르침(八條之敎)을 제정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마침내 서로 도둑질하지 않게 되어 문을 닫지 않게 되었고, 부인들은 정조를 지키게 되었다. 음식을 먹을 때는 변두( 豆)를 사용한다. 그 후 40여 대를 지나 조선후 준에 이르러 스스로 왕을 칭했다. 한나라 초기 매우 혼란할 때 연나라·제나라·조나라 사람으로서 그 지방으로 피난해간 사..

카테고리 없음 2009.03.26

윤여동설 -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윤여동설 -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고구려 대무신왕에게는 호동이라는 아주 잘 생긴 왕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가 전설이 되어 전해지고 있어 우리는 그들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지금까지 매우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어쩌면 그들의 사랑은 애초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앞서 전한 왕실의 외척이었던 왕망은 서기 9년 1월 10일에 이르러 쇠약해진 전한(前漢)을 없애버리고 새로운 나라인 신(新)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에 오르는데, 이 혼란기를 틈타 낙랑군태수(조선사람이 그 땅을 되찾아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였던 최리는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던 한사군의 한 군이었던 전한낙랑군 땅과 낙랑동부도위 땅을 ..

카테고리 없음 2009.01.29

윤여동설 - 최리의 낙랑국은 중국 하북성 승덕시 일원에 위치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최리의 낙랑국은 중국 하북성 승덕시 일원에 위치하고 있었다 - 최초주장 낙랑국(樂浪國) 전한(前漢) 때 처음으로 낙랑군(樂浪郡)을 두었다. 응소(應邵)는 이것이 "고조선국(古朝鮮國)"이라 했다. 신당서(新唐書)의 주에는, "평양성(平壤城)은 옛 한(漢)나라의 낙랑군(樂浪郡)"이라고 했다. 국사(國史 : 삼국사기)에는, "혁거세 30년에 낙랑 사람들이 신라에 투항해 왔다. 또 제3대 노례왕(弩禮王 : 유리왕) 4년에 고구려의 제3대 무휼왕(無恤王 :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망시키니 그 나라 사람들은 대방(帶方: 북대방)과 함께 신라에 투항해 왔다. 또 무휼왕(無恤王) 27년에 광호제(光虎帝 : 후한 광무제)가 사자를 보내어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삼으니, 살수(薩水) 이남의 땅은 다..

카테고리 없음 2009.01.23

윤여동설 - 이부란 소제 시원5년 이후의 낙랑군과 현토군을 말하는 것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삼국유사 이부(二府) 조의 새로운 해석이부란 소제 시원 5년 이후의 낙랑군과 현토군을 말하는 것 - 최초주장 이부(二府) 전한서(前漢書)에 이르기를,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B.C.82) 기해년에 두 외부(外府)를 두었다. 이것은 조선(朝鮮)의 옛 땅인 평나(平那)와 현토군(玄토郡) 등을 평주도독부(平州都督府)로 삼고, 임둔(臨屯)·낙랑(樂浪) 등 두 군(郡)의 땅에 동부도위부(東部都尉府)를 둔 것을 말함이다."라고 했다. [내가 알기로는 전한서 조선전에는 진번·현토·임둔·낙랑 등 네 군郡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이 글에는 평나(平那)가 있고 진번이 없으니 대개 한 지방을 두 이름으로 불렀던 것 같다] 기원전 108년에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는 그 땅을 나누어 네 군을 ..

카테고리 없음 2009.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