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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무천(舞天)의 나라 예(濊)는 원래 어디에 있었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 2009. 3. 26. 06:09

윤여동설 - 무천(舞天)의 나라 예(濊)는 원래 어디에 있었을까? - 최초주장

 

 

 

                                                            

후한서 예(後漢書 濊 : 동예)전

 

  "예(濊)는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옥저, 남쪽으로는 진한과 접했고, 동쪽은 대해에 닿았으며, 서쪽은 낙랑까지이다.
  예, 옥저, 고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필자주 : 고조선을 말한다) 땅이었다.
  옛날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기자는 예의와 농사짓는 법과 양잠하는 법을 가르쳤다. 또 8조의 가르침(八條之敎)을 제정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마침내 서로 도둑질하지 않게 되어 문을 닫지 않게 되었고, 부인들은 정조를 지키게 되었다.
  음식을 먹을 때는 변두( 豆)를 사용한다.
  그 후 40여 대를 지나 조선후 준에 이르러 스스로 왕을 칭했다.
  한나라 초기 매우 혼란할 때 연나라·제나라·조나라 사람으로서 그 지방으로 피난해간 사람이 수만 명이나 되었는데, 연나라 사람 위만이 준(준왕)을 격파하고 스스로 조선의 왕위에 올라 나라가 손자 우거에까지 전해졌다.
  원삭 원년(B.C.128년) 예군 남려(南閭) 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28만구(口)를 이끌고, 요동으로 내속하였으므로, 무제는 그 땅을 창해군(蒼海郡)으로 만들었다가 수년 후에 폐지하였다.

 

☆ 이때 한(漢) 나라에서는 예군 남려가 복속해 오자 요동군에서부터 창해군까지 도로를 개설하다가 중간에 포기했다고 하는데, 지금의 요하 부근에 요동군이 위치하고 있었고, 북한 평양 부근에 위만조선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강원도 강릉 부근에 예국이 위치하고 있었다면 어떻게 한나라에서 사이도 좋지 않은 위만조선의 강역을 가로질러 도로를 개설할 수가 있단 말인가?

 

  원봉 3년(B.C.108)에 이르러 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임둔·현토·진번으로 나누었다.
  소제 시원 5년(B.C.82)에 이르러 임둔과 진번을 폐지하여 낙랑과 현토에 병합했다.
  현토를 다시 구려로 옮겼으며, 단단대령(單單大嶺) 동쪽의 옥저와 예와 맥은 모두 낙랑에 속하게 하였다. 
  뒤에 그 지역이 넓고 멀어 다시 (단단)대령의 동쪽 일곱 개 현을 나누어 낙랑동부도위(樂浪東部都尉)를 설치하였다.
  (예가 한나라에) 내속된 후부터 풍속이 점점 나빠져 금지하는 법도 늘어나 60여개 조에 이르게 되었다.
  건무 6년(A.D.30) (낙랑동부)도위를 폐지하고 (단단)대령 동쪽의 땅을 포기하고, 그 거수(渠帥)로서 현후(縣侯)를 삼고 모두 때때로 조하(朝賀)하도록 하였다.  

  예에는 대군장(大君長)이 없고, 그들의 관직으로는 후(侯)와 읍군(邑君)과 삼로(三老)가 있다.
  노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구려와 같은 종족이라 말하는데, 언어와 법속이 대체로 같다.
  그 사람들의 성품은 우직하고 욕심이 적어 남에게 구걸하지 않는다.
  남녀 모두 곡령(曲領)을 입는다.
  그 풍속은 산천을 중시하고, 산천을 각 부(部)의 경계로 하여 함부로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
  동성간에는 혼인하지 않는다.
  꺼리는 것이 많아서 질병으로 사람이 죽으면 곧 옛 집을 버리고 새로운 곳에 다시 짓는다.
  삼을 심고 누에를 기르며 비단을 짤 줄 안다.
  새벽에 별자리의 움직임을 보고 그 해의 풍년과 흉년을 예측한다.
  해마다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주야로 술 마시며, 노래부르고, 춤추는데 이를 무천(舞天)이라 한다.
  또 호랑이를 신으로 섬겨 제사지낸다.
  읍락을 침범한 사람에게는 서로 벌을 주고, 생구(노비)와 소, 말로서 면책하게 하는데, 이를 책화(責禍)라고 한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죽음으로 죄를 갚도록 한다.
  도둑질하는 사람이 적다.
  보병 전에 능숙하며, 길이가 3장(丈)이나 되는 창을 만들어 혹은 여러 사람이 함께 잡고서 사용하기도 한다.
  낙랑단궁(樂浪檀弓)이 그 지방에서 만들어진다.
  또 무늬 있는 표범이 있고, 과하마(果下馬)가 있으며, 바다에서는 반어(班魚)가 잡힌다. 사신이 올 적에 모두 헌상한다."

 

 

삼국지 예전(三國志 濊 : 동예)전 

 

  "예는 남쪽으로는 진한,
  북쪽으로는 고구려·옥저와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대해(大海)에 닿았다.
  지금 조선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 
  백성이 2만 호이다.
  옛날 기자가 조선에서 8조의 가르침(八條之敎)을 만들어 가르치니, 문을 닫지 않아도 백성들이 도둑질하지 않았다.
  그 후 40여 대를 지나 조선후 준(準)이 왕을 참칭하였다.
  (진나라 말기에) 진승 등이 일어나 천하가 진(秦)나라에 반기를 드니,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의 백성 수만 명이 조선으로 피난하였다.

 

☆ 연나라는 하북성 보정, 역현부근, 제나라는 산동반도부근, 조나라는 산서성 태원부근에 위치했던 나라들이다.
아마 그들은 육지로 접한 이웃나라인 동쪽의 조선(고조선)으로 피난했을 것이다. 지금의 영정하 부근으로서 위만이 처음 조선으로 망명하여 자리잡았던 곳인데, 이곳이 험독이다.   

    

 
  연나라 사람 위만이 추결(상투)과 호복(胡服)을 입고 다시 조선으로 와서 왕이 되었다. 
  한 무제가 조선을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네 군(한사군)으로 만들었다.
  이후부터 호족(胡族)과 한족(漢族)을 점점 구별하게 되었다.
  대군장이 없고, 한(漢) 대 이래로 관직으로 후, 읍군, 삼로가 있어 하호(下戶)를 통치했다.
  옛날부터 그 나라의 노인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자기들이) 고구려와 동종이다"
라고 한다.
  그 사람들의 성질은 우직하며, 욕심이 적고, 염치가 있어 구걸하지 않는다.
  언어와 법속은 대개 (고)구려와 같지만 의복은 다름이 있다.
  남녀가 모두 곡령(曲領)을 만들어 입는데, 남자는 넓이가 여러 치 되는 은화(銀花)를 옷에 꿰매어 장식한다.
  단단대령의 서쪽은 낙랑에 속했으며, (단단대)령의 동쪽 일곱 개 현은 (낙랑동부)도위가 통치하는데, 그 백성이 모두 예인(濊人)이다.
  뒤에 도위를 폐지하고 거수(渠帥)로서 현후로 삼았다.  
  지금의 불내예(不耐濊)는 모두 그 종족이다.
  한(漢)나라 말에는 구려에 복속되었다.
  그 풍속에 산천을 중요시하며, 산과 냇물을 각 부락의 경계로 하여 서로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동성끼리는 혼인하지 않는다.
  꺼리는 것이 많아서 질병으로 사람이 죽으면 옛 집을 버리고 새로운 곳에 집을 지어 산다.
  마포가 있고, 양잠을 하여 비단을 짤 수 있다.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그 해의 풍년과 흉년을 예측한다.
  주옥(珠玉)은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해마다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주야로 술 마시며, 노래부르고, 춤추는데 이를 "무천(舞天)"이라 한다.
  또 호랑이를 신으로 섬겨 제사지낸다.
  부락을 함부로 침범하는 사람에게는 벌을 면책하기 위하여 생구(노비)와 소, 말을 부과하는데, 이를 책화(責禍)라 한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죽음으로 그 죄를 갚게 한다.
  도둑질하는 사람이 적다.
  길이가 3장(丈)이나 되는 창을 만들어 혹은 여러 사람이 함께 잡고 사용하기도 하는데, 보병전에 능하다.
  낙랑단궁(樂浪檀弓)이 그 지방에서 만들어진다.
  바다에서는 반어(班魚)의 껍질이 산출되며, 땅은 기름지고 무늬 있는 표범이 많다. 또 과하마(果下馬)가 나는데, 후한의 환제 때 헌상하였다.
 정시 6년(A.D.245)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이 (단단대)령 동쪽의 예가 (고)구려에 복속되자 군사를 일으켜 정벌했는데, 불내후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정시 8년(A.D.247) (위나라의) 대궐에 와서 조공하므로 불내예왕(不耐濊王)으로 봉했다. (불내예왕은) 백성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 계절마다 군에 와서 조알하였다.
  두 군(낙랑과 대방)에 전쟁이 있어 조세를 부과하면, 사람을 시켜 공급하여 주었다. (군의) 백성과 똑같이 대우하였다."

 

    

  예(濊)는 원래 고조선에 복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조선이 멸망하고 군사력에서 우위에 있는 위만조선이 건국되자 그에 복속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만조선의 3대 우거왕 때인 기원전 128년에 이르러서는 우거왕과 예왕 남려(南閭) 사이에 심각한 의견 충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자 예왕 남려는 위만조선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1천리쯤 떨어진 한나라의 요동군에 사신을 보내 복속하겠다고 했을 것이고, 한나라는 이게 웬떡인가 싶어 그 예의 땅을 "창해군(蒼海郡)"이라 명명하고는 요동군에서부터 창해군까지 도로를 건설하려고 시도하게 된다.  
  자치통감에는 이 때의 상황에 대하여 
  "원삭 원년(B.C.128)에 군 남려 등 28만 명이 투항하여 창해군을 설치했는데, 여기에 사용된 인력과 비용이 남이를 개척할 때와 비슷하여 연(燕)나라와 제(齊)나라 지역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 기록 때문에 지금까지도 학자들 간에 논란이 많다.
  어느 사람은 어떻게 28만 명이라는 대규모 인원이 예에서 적국인 위만조선의 강역을 지나 요동군까지 2천리를 이동하여 갈 수가 있느냐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예가 위만조선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요동군에 복속했던 것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필자가 판단하기에는 이때 남려가 이끄는 예의 백성 28만 명이 한나라의 요동군에 복속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었을 것이나 다만 그것이 예의 백성 28만 명이 직접 예를 떠나 요동군으로 실제 이동해 갔다는 말이 아니라 예왕 남려가 자기나라인 예의 백성들과 함께 요동에 복속하기를 원했다는 말이고, 연나라, 제나라 지역에서 소동이 일어났다는 것은 요동군에서 창해군까지 도로를 개설하기 위하여 그 지역에서 과도하게 세금을 징수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이 많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때 설치했다는 창해군이 과연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었는데, 예(창해군)의 원래 위치는 지금의 내몽골 정람기 부근에 위치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예는 그 후 해부루가 이끄는 동부여에게 그 땅을 빼앗기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진한의 북쪽 옛 임둔군 땅에 자리잡게 되는데, 역사에서는 동쪽으로 이동한 예라 하여 동예라 부르기도 한다. 

  예가 그 땅을 동부여에게 빼앗긴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후한서 부여국전에 "부여국은 현토의 북쪽 1천리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하였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땅이 2천리인데, 본래는 예의 땅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를 확인해 볼 수 있고, 또 삼국지 부여전에도 "그 나라 노인들은 자기들이 옛날 다른 곳으로부터 망명해 온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 나라의 옥새에 濊王之印(예왕지인) 이란 글자가 있고, 나라 가운데에 예성이라 부르는 옛성이 있으니 아마 이곳이 본래는 예의 땅이었으나 부여가 그곳을 차지하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자기들 스스로 망명해온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예가 그 땅을 동부여에게 빼앗겼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그 위치를 몰랐던 창해군은 북경 북쪽 내몽골 정람기 일원에 설치되었던 것으로서, "창해군(蒼海郡)"이라는 명칭은 그들이 살던 내륙의 큰 호수이름을 따서 창해군이라고 명명했다고 할 수 있다.    
  예 사람들은 원래 자존심이 강하고, 이미 그 시절에 동성간에는 혼인을 하지 않을 정도로 혼인제도에 있어 앞서 있었고, 별자리를 관찰하여 그 해의 풍년과 흉년을 점칠 수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수준의 천문 지식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농경 민족이 대개 그러했듯 가을에 추수를 마치면 온 국민이 식량을 주신 하늘에 제사지냈는데, 예에서는 이를 "무천(舞天)"이라 했다는 것이다.  
 

  이는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과 같은 것으로서, 밤을 새워 남녀가 모여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였다고 하고, 한(韓)에서도 그 명칭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해마다 5월에 밭에 씨뿌리기를 마치고,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주야로 술자리를 베풀고 무리 지어 노래부르고 춤춘다. 춤을 출 때는 수십 명이 줄을 지어 서서 땅을 밟는데 절도가 있다. 10월에 추수를 끝내면 또 이와 같이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우리의 선조들은 이로써 힘들었던 한해의 농사일을 마치고, 겨울동안 힘을 축적했다가 다음해 봄에 또 씨뿌리기를 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낙랑단궁(樂浪檀弓)이 만들어 졌다고 하는데, 맥궁(貊弓), 각궁(角弓)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전통 활이다.
  생김새는 아마 지금의 국궁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 이 예(동예)도 후일에 이르러 고구려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게 되어 자주성을 잃게 됨으로써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되고, 고구려와 신라가 국경을 맞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