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현토군 41

윤여동설 - 잃어버린 현토성(玄菟城)을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잃어버린 현토성(玄菟城)을 찾았다 - 최초공개 [장가구시 회안성진 : 규모 가로세로 각 약 1.5km 좌표 동경 114도28분01초 북위 40도27분48초] [위 : 무너진 현토성 성벽] 한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네 조각으로 나누어 설치했던 한사군은 낙랑군(樂浪郡), 진번군(眞番郡), 임둔군(臨屯郡), 현토군(玄菟郡)이었다. 그 중 현토군(玄菟郡)은 처음에는 기원전 107년에 옥저 땅에 설치되었으나 기원전 75년에 이르러 그 위치를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게 된다. 이때 옮긴 현토군이 후한서에 기록되어 있는 낙양 동북 4천리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현토군으로서 바로 이 현토군이 고구려, 동부여와 수많은 접촉기록을 남기게 된다. 이때 새로 옮겨진 현토군은 지금의 중..

카테고리 없음 2019.05.07

윤여동설 - 진번군(眞番郡)은 요녕성 능원(凌源) 일원에 설치되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진번군(眞番郡)은 요녕성 능원(凌源) 일원에 설치되었었다 - 최초주장 진번군(眞番郡)의 위치에 대해서는 숙신지역위치설, 고구려지역위치설, 요동지역위치설, 진국설, 맥국설, 대방설, 마한설 등 주장들이 아주 분분한데, 이는 진번군의 치소인 삽현(霅縣)이 장안으로부터 7,640리 떨어져 있었고, 임둔군의 치소인 동이현(東暆縣)이 장안으로부터 6,138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무릉서의 기록 때문에 학자들이 헷갈린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명칭과 거리기록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임둔군의 치소였다는 동이현과 진번군의 치소였다는 삽현의 명칭과 거리가 바뀌어 잘못 기록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옛 진번국이 진번군이 되었다가 맥국으로 변화했다는 진번군맥국설이 정확한 주장으로서,..

카테고리 없음 2018.12.01

윤여동설 - 임둔군(臨屯郡)은 내몽골 고륜기 일원에 설치되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임둔군(臨屯郡)은 대륙의 내몽골 고륜기 일원에 설치되었었다 - 최초주장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원도 강릉대도호부 건치연혁을 보면, “本濊國[一云鐵國 一云蘂國] 漢武帝 元封2年 遣將討右渠 定四郡時爲臨屯”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본래는 예국이다. [한편으로는 철국이라고도 하고 예국이라고도 한다] 한 무제 원봉2년에 장수를 보내 우거를 토벌하고 4군을 정할 때 임둔군이 되었다”라는 뜻이다. 물론 강릉(명주)지역이 본래부터 예국이었다는 설명은 잘못된 것으로서 원래 그곳은 임둔국(臨屯國)으로서 위만조선에 복속되어 있었는데, 기원전 108년에 이르러 한(漢)나라의 침공을 받아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그 땅을 나누어 한4군이 설치될 때 그 임둔국 땅이 임둔군이 되었다. 그랬다가 기원전 82년에 이르러..

카테고리 없음 2018.11.24

윤여동설 - 진번군(眞番郡)의 진짜위치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진번군(眞番郡)의 진짜위치 찾기 - 최초주장 전한서 권6 무제기(武帝紀) 제6 원봉 3년(B.C.108) 조의 주를 보면, “臣瓚曰 茂陵書 臨屯郡治東暆縣 去長安六千一百三十八里 十五縣, 眞番郡治霅縣 去長安七千六百四十里 十五縣(신찬이 무릉서에는 임둔군의 치소는 동이현(東暆縣)으로서 장안에서 6,138리 떨어져 있고 통현은 15현이고, 진번군의 치소는 삽현(霅縣)으로서 장안에서 7,640리 떨어져 있고, 통현이 15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말했다)”라고 임둔군과 진번군의 위치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특히 진번군(眞番郡 필자주 : 사실은 番의 음이 普安反이라 하였으니 진반군이라 읽어야 옳다)의 위치에 대한 정설이 아직까지도 정립되어 있지 못하다. 아직까지 역사학자들조차 진번군의 위치를 정확..

카테고리 없음 2017.10.15

윤여동설 - 임둔군(臨屯郡)의 진짜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임둔군(臨屯郡)의 진짜위치 - 최초주장 우리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 중에 "임둔군(臨屯郡)"의 명칭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인데, 막상 그 위치가 어디였는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기가 마땅치 않다. 그런데 자치통감 권21 한기(漢紀)13 세종효무황제 원봉 3년(B.C.108) 조의 주를 보면, “臣瓚曰 茂陵書 臨屯郡治 東暆縣 去長安六千一百三十八里 領十五縣(신찬왈 무릉서에는 임둔군의 치소는 동이현이고, 장안에서 6,138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후한서 지제23 군국5에는, 낙양으로부터 동북쪽으로 요동군이 3,600리, 현토군(필자 주 : 초기 동옥저에 설치되었던 곳에서 이동하여 구려의 서북쪽에 다시 설치한 현토군을 말한다)이 4,000리, 낙랑군이 5,000리 떨어져 ..

카테고리 없음 2017.10.07

윤여동설 - 위만조선과 한4군은 북경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위만조선과 한4군은 북경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 최초주장 낙양 동북 3,600리에 위치했던 옛 요동군은 지금의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제75 예전을 보면, “원삭 원년(B.C.128) 예군 남려(南閭) 등이 우거(위만조선의 왕)를 배반하고 28만구를 이끌고 요동(요동군)으로 내속하였으므로 무제(전한 무제)는 그 땅을 창해군(蒼海郡)으로 만들었다가 수년 후에 폐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무제는 요동군에서 예까지 도로를 개설하려고 했고, 이에 드는 비용을 연(燕)과 제(齊)에서 조달토록 했는데, 워낙 비용이 많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연과 제지역이 매우 소란스러웠다고 한다. 그런데 이 창해군은 불과 2년여 만에 폐지되는데, 그 명확한 이유는 전해지지 않았고..

카테고리 없음 2015.07.24

윤여동설 - 창해군 사건 - 위만조선 멸망 - 한사군 설치 - 이군으로 축소 - 삼국(고구려·백제·신라)의 흥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창해군 사건 - 위만조선 멸망 - 한사군 설치 - 이군으로 축소 - 삼국(고구려·백제·신라)의 흥기- 최초주장 후한서 예전을 보면, “원삭 원년(B.C.128)에 예군 남려(南閭) 등이 우거(위만조선의 우거왕)를 배반하고 28만구를 이끌고, 요동으로 내속하였으므로 (한) 무제가 그 땅을 창해군(蒼海郡)으로 만들었다가 수년 후에 폐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사기 권55 유후세가 제25 장량 전에 창해군(倉海郡) 관련 기록이 있고, 전한서 권6 무제기 제6에는,“元朔元年 秋 東夷薉君南閭等 口二十八萬人降 爲蒼海郡 元朔三年 春 罷蒼海郡” 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한서 권24하 식화지 제4하에는, “彭吳穿濊貊 朝鮮 置滄海郡 則燕齊之間靡然發動............. 東置滄海郡“ 이라고 기록되어 있으..

카테고리 없음 2014.02.01

윤여동설 - 위만조선의 기본강역과 주변국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위만조선의 기본강역과 주변국 - 최초주장 기원전 108년에 설치된 초기 전한낙랑군 11현 조선,남감,패수,점선,수성,증지,사망,둔유,누방,혼미,탄열 ☆ 초기 임둔군의 통현은 15개현, 진번군의 통현도 15개현이었다고 하고, 낙랑군의 통현은 11개현으로 나타나는데, 초기 현토군의 통현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소제이후의 전한낙랑군 11현과 낙랑남부도위 7현, 낙랑동부도위 7현 조선,남감,패수,점선,수성,증지,사망,둔유,누방,혼미,탄열[낙랑군] 소명,대방,함자,해명,열구,장잠,제해[낙랑남부도위 : 옛 진번군지역의 일부] 불이,동이,잠대,화려,사두매,전막,부조[낙랑동부도위 : 옛 현토군지역의 일부] 후한낙랑군 18현 조선,감,패수,점선,수성,증지,사망,둔유,누방,혼미,낙도[낙랑군] 소명,대방..

카테고리 없음 2013.03.01

윤여동설 - 한반도 경주에 신라왕릉은 하나도 없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 경주에 신라왕릉은 하나도 없다 - 최초주장 [위 : 경주오릉, 이 고총들을 신라 혁거세왕릉, 알영왕후릉, 남해왕릉, 유리왕릉, 파사왕릉이라고 비정하고 있으나 이는 신라 왕릉들이 아니다] 어느 역사학자가 한반도 “경주에 있는 신라왕릉 중 제대로 명명된 곳이 7기 뿐”이라고 그의 유저 “신라왕릉 연구”에서 주장하였다고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으나, 사실 신라왕릉들이 잘못 비정되었다는 주장은 조선시대부터 꾸준히 제기되어온 것으로서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경주부 능묘 조를 보면, “혁거세릉,미추왕릉,법흥왕릉,태종무열왕릉,진흥왕릉,선덕왕릉,효소왕릉,성덕왕릉,헌덕왕릉,흥덕왕릉,김유신묘,김인문묘,김양묘”에 대한 조성위치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기 때문에 조선시대 사람들은..

카테고리 없음 2012.03.03

윤여동설 - 고대의 요수(遼水)는 지금의 영정하(永定河)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대의 요수(遼水)는 지금의 영정하(永定河) - 최초주장 역사적으로 요수의 위치가 중요한 것은 대개의 경우 우리 고대역사강역의 서쪽 경계가 바로 이 요수였기 때문이다. 요수를 찾으면 우리 선조들이 살았던 역사강역이 과연 어디까지였으며, 그 강을 경계로 중국 세력들과 끊임없이 다투었던 곳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게 되고, 또 어떻게 고구려 초기인 5대 모본왕 때인 서기 49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지까지 습격할 수 있었던 것인지 그 해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의 요수는 지금의 동양하에서 양하로 이어져 관청수고로 흘러 들어갔다가 영정하로 이름을 바꾸어 북경 서쪽을 흐르다가 해하로 다시 이름을 바꾸어 발해로 흘러 들어가는 강 즉 지금의 영정하를 말하는 것이고..

카테고리 없음 2011.10.08

윤여동설 - 후한 요동군 · 현토군 · 낙랑군 위치 찾기

윤여동설 - 후한 요동군 · 현토군 · 낙랑군 위치 찾기 [고대 강대국들의 위치와 그들이 어느 지역을 놓고 다투었는지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역사를 이해하는 지름길입니다] 후한서지리지 제23 군국5를 보면, 상당군, 태원군, 상군, 서하군, 오원군, 운중군, 정양군, 안문군, 삭방군은 병주(幷州)에 속한다고 하였고,[필자 주 : 병주는 낙양의 북쪽 방향에 위치했다고 합니다] 탁군, 광양군, 대군,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 요동군, 현토군, 낙랑군, 요동속국은 유주(幽州)에 속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탁군은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1,800리(?)에 위치해 있었고, 광양군은 낙양동북 2,000리(?)에 위치해 있었으며, 대군은 낙양동북 2,500리, 상곡군 낙양동북 3,200리, 어양군 낙양동..

카테고리 없음 2011.08.19

윤여동설 - 개마대산(蓋馬大山)과 단단대령(單單大嶺)의 위치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개마대산(蓋馬大山)과 단단대령(單單大嶺)의 위치찾기 - 최초주장 후한서 예(동예) 전을 보면, “원봉 3년(B.C.108)에 이르러 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 임둔, 현토, 진번으로 나누었다. 소제 시원 5년(B.C.82)에 이르러 임둔과 진번을 폐지하여 낙랑과 현토에 병합했다. (B.C.75에) 현토를 다시 구려로 옮겼으며 단단대령(單單大嶺) 동쪽의 옥저와 예(동예),맥은 모두 낙랑에 속하게 했다. 후에 그 지역이 넓고 멀어 다시 대령(단단대령) 동쪽 7개현을 나누어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하였다. 예(동예)가 한나라에 내속된 후 풍속이 점점 나빠져 금지하는 법도 늘어나 60여개조에 이르게 되었다. 건무 6년(A.D.30)에 도위(낙랑동부도위)를 폐지하고 대령(단단대령) 동쪽의 땅을 포기하고 그 ..

카테고리 없음 2011.08.11

윤여동설 - 고구려 태조대왕의 동부여 유화태후릉 참배루트를 밝힌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 태조대왕의 동부여 유화태후릉 참배루트를 밝힌다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6대 태조대왕 69년(A.D.121) 조를 보면,  “겨울 10월 왕이 부여(동부여)에 가서 태후의 사당에 제사지냈다(冬十月 王幸扶餘 祀太后廟)” 라고 기록되어 있고,   “11월 왕이 부여로부터 돌아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태후란 고구려의 건국시조 주몽왕(추모왕)의 어머니인 유화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태조대왕이 직접 동부여까지 가서 유화태후의 능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앞서 주몽이 동부여에서 무슨 큰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잡히면 죽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졸본부여로 급히 도망치게 되는데, 이때 주몽은 어머니인 유화와 임신한 부인 예씨를 동부여에 그대로 남겨..

카테고리 없음 2011.03.01

윤여동설 - 옥저(북옥저,남옥저,동옥저)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옥저(북옥저,남옥저,동옥저)의 위치 - 최초공개 옥저는 셋이 있었는데, 북옥저와 남옥저 그리고 동옥저였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이 옥저의 위치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후한서 동옥저전을 보면,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대해까지이고 북쪽은 읍루와 부여, 남쪽은 예맥과 접했다” “(한)무제가 조선(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땅으로 현토군을 만들었다. 뒤에 이맥의 침략을 받아 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옥저를 현으로 고쳐 낙랑동부도위에 속하게 하였다” “또 북옥저가 있는데 일명 치구루라고도 하는데, 남옥저에서 8백여리 떨어져 있다. 그 풍속은 모두 남옥저와 같으며, 국경의 북쪽(필자주 ; 원본은 남쪽으로 되어 있으나 오기이므로 필자가 바로 잡았다)으로 읍루와 접..

카테고리 없음 2011.01.24

윤여동설 - 고구려 졸본, 국내성과 작위 속 요동군개국공의 의미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 졸본, 국내성과 고구려 왕들에게 주어진 작위 속 “요동군개국공”의 의미 - 최초주장 고구려 왕들에게 주어진 작위를 보면 한결같이 “요동군개국공”이란 문구가 들어가 있다. 북위에서 장수왕에게 보낸 작위는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이었고, 문자왕에게 보낸 작위는 “사지절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이었으며, 안장왕에게 보낸 작위는 “안동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이었으며, 안원왕에게 보낸 작위는 “사지절 산기상시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이었으며, 북제에서 양원왕에게 보낸 작위는 “사지절 시중 표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이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고구려 왕들에게 주어진 작위에는 대개 “..

카테고리 없음 2011.01.12

윤여동설 - 고려 사신들의 연경(燕京) 사행로를 밝힌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려 사신들의 연경(燕京) 사행로를 밝힌다 - 최초주장 삼국사기 권제37 잡지 제6 지리4 고구려 백제 조를 보면, 『통전에 이르기를 “주몽이 한나라 건소2년에 북부여[필자주 : 동부여의 오기이다]로부터 동남방[필자주 : 서남쪽의 오기이다]으로 가서 보술수를 건너 흘승골성에 이르러 자리잡고 국호를 구려라 하고 고로써 성씨를 삼았다” 고 하였으며, ☆ 삼국사기 찬자들이 인용했다고 밝히고 있는 통전의 기록이란 통전 권186 변방2 동이하 고구려 조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곳에는 “朱蒙棄夫餘 東南走渡普述水 至紇升骨城 遂居焉 號曰句麗 以高爲氏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주몽이 부여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달아나 보술수를 건너 흘승골성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국호를 구려라 하고 고로서 성씨를 삼았다” ..

카테고리 없음 2010.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