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개마대산(蓋馬大山)과 단단대령(單單大嶺)의 위치찾기 - 최초주장
후한서 예(동예) 전을 보면,
“원봉 3년(B.C.108)에 이르러 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 임둔, 현토, 진번으로 나누었다. 소제 시원 5년(B.C.82)에 이르러 임둔과 진번을 폐지하여 낙랑과 현토에 병합했다. (B.C.75에) 현토를 다시 구려로 옮겼으며 단단대령(單單大嶺) 동쪽의 옥저와 예(동예),맥은 모두 낙랑에 속하게 했다.
후에 그 지역이 넓고 멀어 다시 대령(단단대령) 동쪽 7개현을 나누어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하였다.
예(동예)가 한나라에 내속된 후 풍속이 점점 나빠져 금지하는 법도 늘어나 60여개조에 이르게 되었다.
건무 6년(A.D.30)에 도위(낙랑동부도위)를 폐지하고 대령(단단대령) 동쪽의 땅을 포기하고 그 거수로서 현후를 삼고 모두 때때로 조하하도록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같은 책 동옥저전을 보면,
“무제(전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 땅으로 현토군을 만들었다.
뒤에 이맥의 침략을 받아 군(현토군)을 고구려(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옥저를 현으로 고쳐 낙랑동부도위에 속하게 하였다. (후한) 광무제 때에 이르러 도위(낙랑동부도위)의 관직을 없애고 후에 모두 그 거수를 봉하여 옥저후로 삼았는데, 그 땅이 작아 큰 나라 사이에 끼어 핍박을 받다가 마침내 구려(고구려)의 신하가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옥저가 곧 초기 현토군이 설치되었던 곳이었으며, 후일 예(동예)와 옥저가 낙랑동부도위에 속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예(동예) 전의 기록을 보면 낙랑동부도위에 속했던 옥저와 예(동예)가 모두 단단대령이라는 큰 고개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의 낙랑군은 단단대령의 서쪽에 위치했을 것이다.
그리고 후한서 동옥저 전에는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대해까지이고 북쪽은 읍루와 부여, 남쪽은 예(동예),맥과 접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같은 책 예전에는 “예(동예)는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옥저, 남쪽으로는 진한과 접했고, 동쪽은 대해에 닿았으며 서쪽은 낙랑까지이다. 예(동예), 옥저, 고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 땅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곧 진한의 북쪽에 예(동예)가 위치했고, 예(동예)의 북쪽에는 고구려와 옥저가 위치했으며, 다시 옥저의 북쪽에는 읍루와 부여(동부여)가 위치했으며, 옥저와 예(동예) 모두 동쪽으로 바다(대해)에 접하고 있었고, 예(동예)의 서쪽에 낙랑이 위치했음을 알게 한다.
그런데 또 기록을 보면 옥저는 개마대산의 동쪽에 위치했고, 그 남쪽의 예(동예)는 단단대령의 동쪽에 위치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단단대령의 북쪽에 개마대산이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지금 많은 사람들은 개마대산을 한반도의 개마고원이라 하고 단단대령을 한반도의 대관령에 비정하여 역사를 해석함으로서 옥저는 함경남도의 함흥부근, 예는 강원도 강릉 부근이라 하고 진한을 경주부근이라 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짜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후한서의 기록은 한반도에 관한 기록이 아니라 지금의 요하 서쪽에 관한 기록으로서 그림으로 그려보면 위와 같이 된다.
즉 고구려의 개마대산이라는 곳은 지금의 대흥안령을 말하는 것이고, 단단대령이라는 곳은 지금의 칠로도산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단단대령의 동쪽에 위치했다는 예(동예)는 지금의 칠로도산 동쪽에 위치했다는 말이다.
따라서 단단대령의 서쪽에 위치했을 낙랑군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에 위치했다는 말로서 한사군의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부근에 설치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동예)의 남쪽에 위치했고, 진한에서 발전한 신라는 어디에 위치했었으며, 예(동예)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고구려, 신라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백제는 어디에 위치했었을까?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 고대사의 비밀은 절대 풀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