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요동성 23

윤여동설 - 당 태종 고구려 침공로와 철군로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당 태종 고구려 침공로와 철군로 - 최초주장 당 태종의 고구려를 침공로를 보면, 정관 18년(A.D.644) 10월 14일에 장안을 출발하여 낙양을 거쳐 정주로 와서 군사들을 출발시킨다. 그리고는 유주, 북평을 지나 요택과 요수를 건너 요동성(현 북경부근)을 점령하게 되고, 다시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11개월 만인 645년 9월 18일에 철군을 결정하게 되는데, 철군로를 보면, 안시성에서부터 정주까지는 갔던 길을 되짚어 왔으나 정주(定州)부터는 방향을 바꿔 병주(幷州 : 산서성 태원부근)를 거쳐 장안(현 서안)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림으로 그려보면 위와 같은데, 어느 사람은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양만춘이 쏜 화살에 눈을 맞아 애꾸가 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당 태종이 철..

카테고리 없음 2014.07.04

윤여동설 -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로와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로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로와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로 - 최초주장 수 양제와 당 태종은 직접 고구려를 침공했던 사람들이다. 군사들의 출발지가 탁군(涿郡)과 정주(定州)로 달랐을 뿐 고구려 요동성(遼東城)을 향하여 진군했던 것도 같고, 진군 도중에 갈석산(碣石山)에 올랐던 것도 같으며, 결국 고구려 침공에 실패했던 것도 같다. 삼국사기 고구려 영양왕 22년(A.D.611)조를 보면, “봄2월에 수나라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여름4월에 양제의 행차가 탁군(涿郡 : 지금의 탁주시 부근)의 임삭궁(臨朔宮)에 이르니 사방의 군사들이 모두 탁군으로 모여들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4년(A.D.645) 조를 보면, “봄 정월에 당 태종이 정주(定州)를 떠나서..

카테고리 없음 2012.06.18

윤여동설 - 천년의 의문 “요택(遼澤)”의 위치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천년의 의문 “요택(遼澤)”의 위치찾기 - 최초주장 요택(遼澤)의 위치는 지금까지 의문의 장소였다. 정확한 요택의 위치를 찾지 못해 우리의 역사해석은 한없는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야만 했다. 그런데 자치통감에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안시성에서 철군할 때의 기록이 일자별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자치통감 권198 당기14 태종문무대성대광효황제 조를 보면, “․(貞觀 十九年 九月) 癸未 敕班师 先拔辽․蓋二州户口渡辽 乃耀兵於安市城下而旋 (서기 645년 9월18일 (안시성에서) 경사로 회군할 것을 명하였다. 요주, 개주 두 주의 백성을 먼저 요수를 건너게 하고 안시성 아래에서 시위하고 개선하였다) ․乙酉 至辽东(9월20일 요동에 이르다) ☆ 안시성에서 요동성까지 2일이 걸렸다. ․丙戌 渡..

카테고리 없음 2012.05.28

윤여동설 - 광개토태왕의 정복지 비려 염수와 개선로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광개토태왕의 정복지 비려 염수와 개선로 - 최초주장 호태왕 비문 영락 5년(A.D.395) 을미년 조를 보면, “영락 5년 을미년에 왕이 비려(碑麗)가 붙잡아간 사람들을 돌려보내지 않으므로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3개 부(部) 6, 7백영(營)을 격파하고 셀 수 없을 만큼의 소, 말, 양떼를 노획하고 개선하였다. 양평(襄平) 길을 지나 동쪽으로 ○○성, 역성(力城), 북풍(北豐)을 거쳐 왕이 사냥을 준비시켜 국경도 구경하고 사냥도 즐기면서 돌아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여러 지명이 언급되고 있다. 비려(碑麗), 부산(富山), 부산(負山), 염수(鹽水), 양평(襄平), 역성(力城), 북풍(北豐) 등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카테고리 없음 2012.01.13

윤여동설 - 고구려 “신성(新城)” 위치찾기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 “신성(新城)” 위치찾기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3대 서천왕 조를 보면, “7년(A.D.276) 여름4월 왕이 신성[新城 혹자는 말하기를 신성은 나라 동북에 있는 큰 진이라 한다]에 가서 사냥을 하다가 백록을 잡았다. 가을8월에 왕이 신성으로부터 돌아왔다” 19년(A.D.288) 여름4월에 왕이 신성에 갔다. 겨울 11월에 왕이 신성으로부터 돌아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14대 봉상왕 조를 보면, “2년(A.D.293) 가을8월에 모용외가 와서 침노하였다. 왕이 신성(新城)으로 가서 적을 피하려고 곡림까지 갔는데 모용외가 왕이 달아난 것을 알고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거의 잡히게 되매 왕이 두려워하였다. 이때에 신성성주인 고노자가 기병5백을 거느리고 나와서 왕을 영접..

카테고리 없음 2011.10.21

윤여동설 - 건안성(평곽)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난평 부근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건안성(평곽)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난평 부근 - 최초주장 645년 당 태종 고구려 침공시 난공불락의 요새 안시성을 먼저 쳐야 되느냐 안시성을 그대로 두고 건안성을 치고 평양성으로 향할 것이냐를 놓고 작전회의를 할 때, 이세적이 말하기를 “건안은 남쪽(필자주 : 북쪽의 오기일 것이다)에 있고, 안시는 북쪽(필자주 : 남쪽의 오기일 것이다)에 있는데, 우리의 군량은 모두 요동에 있습니다. 이제 안시를 넘어 건안을 치다가 만약 고구려 사람들이 우리의 군량 수송로를 끊게 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했다는 기록이 있음을 보면 안시성과 건안성은 모두 요동성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고, 안시성이 남쪽(원문은 북쪽으로 되어 있다)에, 건안성이 북쪽(원문은 남쪽으로 되어 있다)에 위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카테고리 없음 2011.10.17

윤여동설 - 고대의 요수(遼水)는 지금의 영정하(永定河)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대의 요수(遼水)는 지금의 영정하(永定河)     - 최초주장         역사적으로 요수의 위치가 중요한 것은 대개의 경우 우리 고대역사강역의 서쪽 경계가 바로 이 요수였기 때문이다.   요수를 찾으면 우리 선조들이 살았던 역사강역이 과연 어디까지였으며,   그 강을 경계로 중국 세력들과 끊임없이 다투었던 곳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게 되고,   또 어떻게 고구려 초기인 5대 모본왕 때인 서기 49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지까지 습격할 수 있었던 것인지 그 해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의 요수는 지금의 동양하에서 양하로 이어져 관청수고로 흘러 들어갔다가 영정하로 이름을 바꾸어 북경 서쪽을 흐르다가 해하로 다시 이름을 바꾸어 발해로 흘러 들어가는..

카테고리 없음 2011.10.08

윤여동설 - 요(거란)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는 지금의 북경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요(거란)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는 지금의 북경(北京) - 최초주장 요사지리지 동경도를 보면, 『요나라 태조(太祖: 야율아보기)가 나라를 세우고 발해를 공격하여 홀한성(忽汗城: 발해상경용천부)을 함락하고 그 왕 대인선을 사로잡았다. 동단왕국(東丹王國)을 세우고 태자 도욕(圖欲)을 인황왕(人皇王)으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신책(神冊) 4년(A.D.919)에 요양(遼陽) 옛 성(요동성)을 수리하고, 발해사람과 중국인으로 동평군(東平郡)을 만들어 방어주(防禦州)로 삼았다. 천현(天顯) 3년(A.D.928) 동단국 백성들을 (요양으로) 옮겨 살게 하고 남경(南京: 필자주 : 요나라에서는 옛 요동성을 남경요양부라 했다가 후일 동경요양부로 또 고쳤다)으로 승격시켰다. (남경)성의 이름은 천복성(天..

카테고리 없음 2011.09.30

윤여동설 - 황룡국(黃龍國)은 고구려의 졸본,국내성 부근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황룡국(黃龍國)은 고구려의 졸본,국내성 부근 - 최초주장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유리왕 20년(A.D.1) 봄정월 태자 도절이 죽었다. 22년(A.D.3) 겨울10월 왕이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23년(A.D.4) 봄2월에 왕의 아들 해명을 세워 태자를 삼고 전 국내의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7년(A.D.8) 봄 정월에 왕의 태자 해명이 옛 도읍에 남아 있었는데 힘이 세고 용감하였다. 황룡국(黃龍國) 왕이 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강궁을 선물하였더니 해명이 그 사신 앞에서 활을 잡아당겨 꺾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힘이 센 것이 아니라 활 자체가 단단하지 못하다’ 하니 황룡왕이 무안해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황룡왕에게 말하기를 ‘해명은 자식으로서..

카테고리 없음 2011.09.16

윤여동설 - 고구려의 살수(薩水)는 지금의 북경 동북쪽 조하(潮河)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의 살수(薩水)는 지금의 북경 동북쪽 조하(潮河)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0년(A.D.37) 조를 보면,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켰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27년(A.D.44) 조를 보면,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여 그 땅을 취하여 군현으로 만드니 살수(薩水)이남 지역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고구려 대무신왕이 최리의 낙랑국을 쳐서 멸망시키고 그 낙랑국 땅을 차지하자 7년 뒤에 후한의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옛 낙랑국 땅의 일부인 살수이남 땅을 고구려로부터 다시 탈환하여 낙랑군을 부활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하여 필자는 전한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

카테고리 없음 2011.03.06

윤여동설 - 당 태종 고구려 요동 침공시의 주둔지 마수산(馬首山)을 찾았다

윤여동설 - 당 태종 고구려 요동 침공시의 주둔지 마수산(馬首山 : 말머리산)을 찾았다 [마수산으로 비정되는 곳으로서 말이 구유에 입를 넣고 먹이를 먹고 있는 것 같다. 하필 그곳에 도로가 나고 건물이 지어져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없어 안타깝다]   서기 645년 당 태종은 고구려 침공을 하기 위하여 정주(定州)를 출발하여 요택을 지나고, 요수를 건너 "마수산(馬首山)"에 진을 쳤다고 사서들은 전한다.     그리고는 고구려의 요동성(遼東城) 공격에 나서게 되는데, 요동성이 견고하여 함락 시킬 수가 없자 성 밖에 흙을 져 날라 메꾸어 결국 요동성을 함락 시키고는 그곳을 요주로 바꾸게 되는데, 요동성이 함락될 때 고구려군 1만여명이 죽고, 1만여명의 군사와 남녀백성 4만여명이 포로로 잡혔고, 군량 50만석..

카테고리 없음 2010.10.11

윤여동설 - 환도성(丸都城)과 안시성(安市城)은 같은 곳이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환도성(丸都城)과 안시성(安市城)은 같은 곳이다 - 최초주장 [학자들이 환도산성으로 비정하고 있는 집안 부근의 산성자산성 환도산성 표지석과 성벽인데 사실 이곳은 환도성이 아니다] 삼국유사 왕력 고구려 16대 국원왕(고국원왕) 조를 보면, “임인년(A.D.342) 8월 안시성으로 도읍을 옮기니 이것이 환도성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흥법 순도조려 조에도, “상고해보면 고구려의 도읍은 안시성이며, 이곳을 혹은 안정홀(安丁忽 , 필자주 : 安寸忽의 오기인가?)이라고도 하는데 요수 북쪽에 있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우리를 매우 헷갈리게 한다. 왜냐하면 환도성은 서기 198년 고구려 산상왕 2년 2월에 처음으로 쌓았다고 하고, 서기 209년 산상왕 13년 10월에 국내성(국내위나암)으로부터 옮..

카테고리 없음 2010.05.30

윤여동설 - 수 양제 고구려 침공 때의 좌12군, 우12군의 행군로는?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수 양제 고구려 침공 때의 좌12군, 우12군의 행군로는? - 최초공개 수 양제는 611년 2월 조서를 내려 고구려 침공을 공식화 하고, 군사를 탁군(涿郡)으로 모이도록 발표한 후, 자신도 도읍인 장안을 떠나 4월에 탁군의 임삭궁에 도착한다. 그리고는 전쟁 준비를 완벽하게 한 후 612년 정월에 이르러 군사들을 탁군에서 출발 시키게 되는데, 총 군사의 수효는 1,133,800명으로서 출발에만 40일이 소요되었고, 늘어선 군사들의 깃발이 960리에 이르렀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이 소위 말하는 수 양제 고구려 2차 침공이다. 이때 수 양제는 고구려 침공에 총 24군(여기에서의 한 개 군이 정확히 몇 명으로 구성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을 동원하였는데, 좌12군, 우12군으로 나누..

카테고리 없음 2010.04.11

윤여동설 - 고구려 안시성(安市城)을 찾았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 안시성(安市城)을 찾았다 - 최초주장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안도 용강현(龍岡縣) 건치연혁 조를 보면, “고황룡국(古黃龍國)으로서 고구려가 병합하였고, 고려에서는 황룡성(군악이라고도 했다)이라 하였다. 후에 지금 이름(용강)으로 고치고 현으로 만들었는데, 본조(조선)에서는 그대로 따랐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평안도 용강이 옛날에는 황룡국이었음을 알 수 있고, 성곽 조를 보면, “안시성(安市城)은 오석산(烏石山)에 있는데, 현의 치소와는 5리 떨어져 있으며, 험하고 견고하기가 비할 데가 없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만2천5백80척이며 안에는 샘 열 개가 있는데 합쳐 흐르고 군창이 있다. 세상에서 이 성을 당 태종이 친히 치려하였으나 함락 시키지 못하였다고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

카테고리 없음 2010.03.08

윤여동설 - 당 태종이 고생하며 건넌 "요택(요동늪)"을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당 태종이 고생하며 건넌 “요택(요동늪)”을 찾았다 - 최초공개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와 철군할 때 고생 하며 건넜다고 전해지는 요택(요동늪)은 과연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요택이 지금의 요하 하류의 저습지를 말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엉터리 중의 엉터리 주장이다. 왜냐하면 고대의 요수는 지금의 요하를 말하는게 아니라 북경 서쪽을 흐르는 영정하이었고, 북경 부근이 옛 요동군이었기 때문이다. 서기 645년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 기록을 보면, 이때 당 태종은 정주(定州)에서 출발하여 요동을 향하여 가다가 (필자주 : 이때 갈석산에도 올랐다고 한다) 요택(요동늪)을 통과하고, 요수(遼水)를 건너 요동성에 도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학자들은 이러한 기록을..

카테고리 없음 2010.03.01

윤여동설 - 위만조선의 도읍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위만조선의 도읍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 - 최초공개 원봉 2년(B.C.109) 한나라는 섭하를 보내어 (조선의) 우거를 회유하였으나 끝까지 수긍하지 않고, 조서를 받들지 않았다. 섭하는 돌아올 때 국경인 패수(필자 주 : 이때 한나라와 위만조선의 국경이 패수일 수는 없고 살수이어야 맞다. 만약 패수일 경우 패수 동쪽에 바로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이 위치했었다는 말이 된다. 사실이 이러했다면 위만조선은 도읍을 동쪽으로 멀리 옮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인데, 위만조선은 멸망할 때까지 왕검성에 도읍하고 있었다)에 이르자 사람을 시켜 전송나온 조선의 비왕장을 죽이고 즉시 강을 건너 요새로 돌아와서 천자에게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하였다. 천자는 그것을 잘한 것으로 여겨 나..

카테고리 없음 2008.12.05

윤여동설 - 한반도 북한 평양은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 북한 평양은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이 아니다 - 최초주장 피서산장 옥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조를 보면, 『서기 666년 겨울12월 (당)고종이 이세적으로 요동도행군대총관 겸 안무대사를 삼고, 사열소상 백안륙과 학처준으로 이를 보좌케 하고, 방동선과 설필하력으로 요동도행군부대총관 겸 안무대사를 삼고 기타 수륙군 모든 부대의 총관들과 전량사들인 두의적, 독고경운, 곽대봉 등은 모두 이세적의 지휘를 받게 하고 하북 여러 주들의 조세는 모두 요동으로 보내어 군용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26년 정묘(A.D.667) 가을9월 이세적이 신성을 함락시키고 설필하력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앞서 이세적이 요수(遼水)를 건너와서 모든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신성은 고구려 서쪽 변경의 요충이기 때문에 이..

카테고리 없음 2008.04.09

윤여동설 - 요사지리지가 말해주는 요 동경요양부의 위치를 찾아라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요사지리지가 말해주는 요 동경요양부의 위치를 찾아라 - 최초주장 우리는 지금 요나라의 동경요양부를 압록강 서북쪽 중국 요녕성 요양(遼陽)으로 비정하여 역사를 해석하고 있는데, 그것은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사서들은 말해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상식을 잠시 접어두고 객관적 입장에서 아래 요사의 기록에 따라 요 동경의 위치를 찾아보자. 요사 권38, 지제8, 지리지 2 동경도(東京道)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는 본래 조선(朝鮮)의 땅이다. 주(周)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석방하여 감옥에서 풀어주자 (기자는) 조선으로 갔고, (무왕은) 이로 인하여 그를 (조선에) 봉했다. (기자가) 범금팔조(犯禁八條)로서 백성들을 교화하니, (백성들이) 예의를 숭상하고 농사와 양잠으로 부유해져 대..

카테고리 없음 2008.03.26

윤여동설 - 고려는 천리장성을 한반도에 쌓지 않았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려는 천리장성을 한반도에 쌓지 않았다? - 최초주장       고려는 9대 덕종 2년인 서기 1033년 8월에 이르러 거란의 침공을 막기 위하여 평장사 유소에게 명하여 천리장성을 쌓게 했는데, 서해 바닷가의 옛 국내성과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의 중간지역으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威遠), 흥화(興化), 정주(靜州), 영해(寧海), 영덕(寧德), 영삭(寧朔), 운주(雲州), 안수(安水), 청새(淸塞), 평로(平虜), 영원(盈遠), 정융(定戎), 맹주(孟州), 삭주(朔州) 등 13주를 거치고 요덕(耀德), 정변(靜邊), 화주(和州) 등 3성에 대어 동쪽으로 바다에 닿으니 길이가 1천여 리에 뻗치고, 돌로 성을 쌓았으며, 높이와 두께가 각각 25척(성벽의 높이가 7-8m이고, 성벽의 두..

카테고리 없음 2007.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