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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황룡국(黃龍國)은 고구려의 졸본,국내성 부근 - 최초주장

윤여동 2011. 9. 16. 21:07

 윤여동설 - 황룡국(黃龍國)은 고구려의 졸본,국내성 부근 - 최초주장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유리왕 20년(A.D.1) 봄정월 태자 도절이 죽었다.

    22년(A.D.3) 겨울10월 왕이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23년(A.D.4) 봄2월에 왕의 아들 해명을 세워 태자를 삼고 전 국내의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7년(A.D.8) 봄 정월에 왕의 태자 해명이 옛 도읍에 남아 있었는데 힘이 세고 용감하였다.

  황룡국(黃龍國) 왕이 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강궁을 선물하였더니 해명이 그 사신 앞에서 활을 잡아당겨 꺾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힘이 센 것이 아니라 활 자체가 단단하지 못하다’ 하니 황룡왕이 무안해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황룡왕에게 말하기를 ‘해명은 자식으로서 효성이 없으니 청컨대 나를 위해 죽여주시오’ 하였다.

  3월에 황룡왕이 사신을 보내 태자와 만나기를 청하여 태자가 가려고 하였더니 어떤 사람이 만류하면서 말하기를 ‘오늘 이웃 나라에서 이유없이 만나기를 청하니 그 의중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태자가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죽이려하지 않는다면 황룡왕이 나에게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하면서 드디어 황룡국으로 갔다.  

 황룡왕이 처음에는 죽이려고 생각하였으나 만나서는 감히 해치지 못하고 예절을 갖추어 돌려보냈다. 

  28년(A.D.9) 봄3월에 왕이 사람을 보내어 해명에게 이르기를 ‘내가 도읍을 옮긴 것은 백성들을 안정시킴으로써 나라의 위업을 공고히 하려는 것인데 네가 나를 따르지 않고, 힘이 센 것만을 믿고 이웃나라에 원한을 맺었으니 자식된 도리가 어찌 이와같으랴’ 하고는 칼을 주고 자살하라 하였다.

  태자가 즉시 자살하려 하니 어떤 사람이 말리면서 말하기를 ‘대왕의 장자가 이미 죽어 태자께서 후계자가 되었는데, 이제 왕의 사자가 한번 왔다하여 자살을 한다면 그것이 거짓이 아닌 줄 어찌 알겠습니까?’ 하였다.

  태자가 말하기를 ‘지난번에 황룡왕이 강궁을 보내왔기에 나는 그들이 우리나라를 얕볼까 염려하여 활을 잡아당겨 꺾었던 것인데, 뜻밖에 부왕의 견책을 당하게 되었다. 이제 부왕이 나를 불효하다 하여 칼을 주어 자살하라 하시니 아버지의 명령을 피할 수 있겠느냐?’ 하면서 여진(礪津) 동쪽 벌판으로 가서 창을 땅에 꽂아 놓고 말을 타고 달려와 그 창에 꽂혀 죽으니 이때 나이가 21세였다.  태자의 예로서 (여진) 동쪽벌판에 장사지내고 그곳에 사당을 세우고 그 지명을 창원이라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태자 해명이 죽게 된 경위를 알 수 있게 한다.

  물론 이때 유리왕이 태자인 해명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황룡국왕이 보낸 활을 부러뜨렸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태자 해명이 외척과 결탁하여 졸본에서 국내로 도읍을 옮기는 것에 반대하고 졸본에 머무르며 국내로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여기에서는 그를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 초기 황룡국의 위치를 찾아보려 하는 것이다.

  기록 속에서 고구려와 황룡국은 쉽게 오갈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곳이었는데, 졸본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적성현 후성진 부근으로 비정되고, 국내성은 지금의 연경 영녕진(永寧鎭) 부근이었다.

  따라서 황룡국은 졸본과 국내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을 것이다.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장북현 지금의 원 중도유지터가 옛 황룡국 왕성으로 비정되는 곳으로서, 거란지리지도 상 황룡부로 표시된 곳이다.    

  그리고 화랑세기 필사본을 보면, 가야국 수로왕의 왕비 황옥이 황룡국여자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황옥이 가야로 온 때가 서기 48년이라 하였다.

  이를 보면 황룡국이 고구려 초기인 유리왕 말기 또는 대무신왕대에 멸망하게 되자, 황룡국의 왕족이었던 황옥이 그 난을 피해 가야로 왔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