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북경요동설 74

윤여동설 – 발해 북쪽 북표(北票) 라마동고분군(喇麻洞古墳群) 출토 인골과 혈연적으로 가장 가까운 집단은 지금의 내몽골 석림곽륵맹(錫林郭勒盟) 사람들이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발해 북쪽 북표(北票) 라마동고분군(喇麻洞古墳群) 출토 인골과 혈연적으로 가장 가까운 집단은 지금의 내몽골 석림곽륵맹(錫林郭勒盟) 사람들이다 – 최초주장 [ 위 : 내몽골 석림곽륵맹(錫林郭勒盟)] 요녕성 조양시 북표(北票)의 라마동고분군(喇麻洞古墳群)에서 출토된 인골이 한국인과 혈연적으로 가장 가깝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동부여(東扶餘, 東夫餘) 사람들이 이 라마동고분군 출토 유골과 혈연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일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는 호태왕 비문 영락 20년(A.D.410) 조에, 二十年 庚戌 東扶餘舊是鄒牟王屬民 영락 이십년은 경술년이다.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中叛不貢 중간에 배반하고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王躬率往討 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

카테고리 없음 2023.06.03

윤여동설 – 고대 대마도(對馬島)의 원래 위치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대 대마도(對馬島)의 원래 위치 찾기 - 최초주장     삼국사기 신라본기 실성이사금 7년(A.D.408) 조를 보면,   『봄2월에 ‘왜인(倭人)이 대마도(對馬島)에 병영을 설치하고 병기와 군량을 비축하여 우리나라를 습격하려고 한다’는 말을 왕이 듣고서, 우리가 먼저 정병을 뽑아서 그들의 진영을 격파하고자 하였다.  서불한 미사품이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병기란 흉기요, 싸움은 위험한 일이라고 하였는데,. 하물며 큰 바다를 건너 남의 나라를 치는 일이겠습니까? 만약 실패를 한다면, 그때는 후회한다 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니, 차라리 험한 곳을 의지하여 요새를 설치하였다가 적이 오면 이를 막아 침해를 못하도록 할 것이요, 유리할 때 나가서 사로잡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

카테고리 없음 2023.05.14

윤여동설 – 동옥저와 여국(女國:여인국), 신라와 장인국(長人國), 왜국과 다파나국(多婆那國)의 위치 정리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동옥저와 여국(女國:여인국), 신라와 장인국(長人國), 왜국과 다파나국(多婆那國)의 위치 정리 – 최초공개 삼국지 동옥저 전을 보면,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는데, 대해(큰바다) 가에 산다. 그 지형이 동북은 좁고, 서남은 길다, (강역이) 천리쯤이다. 북쪽은 읍루(挹婁,말갈)와 부여(동부여), 남쪽은 예(동예), 맥과 접했다................... 왕기가 위궁(位宮 : 고구려 동천왕)을 추격하여 동쪽 경계의 끝(동옥저)까지 갔을 때, 그곳의 노인에게 묻기를 ‘바다의 동쪽에 사람이 살지 않는가?’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우리나라 사람이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다가 풍랑을 만나 수 십일을 바람 부는 대로 표류하여 동쪽으로 흘러가서 한 섬에 도착하였는데..

카테고리 없음 2022.07.03

윤여동설 – 한반도에는 어떠한 낙랑(樂浪)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에는 어떠한 낙랑(樂浪)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 최초주장 한반도에는 어떠한 낙랑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낙랑군도 없었고, 최숭이나 최리로 대표되는 낙랑국도 없었다. 왜냐하면 환인의 환국, 환웅의 단국, 왕검의 조선(고조선)과 부여, 예, 개마, 옥저 그리고 위만조선과 삼한이 모두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발해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 환단고기 단군세기 13세 단군 흘달 조를 보면, “갑오16년(B.C.1782) 이해 겨울에 은나라 사람이 하나라를 정벌하니 하나라 걸왕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흘달단제께서 읍차인 말량으로 하여금 구한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돕게 하니 은나라의 탕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어명을 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하나라 걸왕이 조약..

카테고리 없음 2021.11.07

윤여동설 – 삼국과 가야 건국시조의 탄생지 찾기(종합)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삼국과 가야 건국시조의 탄생지 찾기(종합) - 최초공개 고구려의 건국시조 추모왕(주몽왕)은 압록강가에서 북부여 해모수의 후손인 해불리지와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서 입태되었고, 태백산 남쪽 동부여의 우발수에서 태어났다. 성장한 후 졸본부여로 가서 왕위에 올랐다가 그곳에서 죽어 졸본 동쪽 용산(龍山)에 묻혔다. 백제의 건국시조 온조왕은 졸본에서 아버지인 졸본부여의 왕족 우태와 연타발의 딸인 어머니 소서노 사이에서 태어나 어릴 때 그 어머니 소서노의 손에 이끌려 한산 부근으로 가서 성장하였다. 성장한 후 그곳에서 백제를 건국하고 왕위에 올랐으며, 남한성에서 죽어 한산(漢山)에 묻혔다. 신라의 건국시조 혁거세거서간의 아버지는 전해지지 않았고, 어머니는 동부여 해부루왕의 딸인 사소(혹은 파소라고도 한..

카테고리 없음 2021.09.12

윤여동설 – 고조선(왕검조선) 왕검성(王儉城)의 서쪽에 위치했던 부여(夫餘, 扶餘)의 원래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조선(왕검조선) 왕검성(王儉城)의 서쪽에 위치했던 부여(夫餘, 扶餘)의 원래위치 - 최초공개 [옛 부여와 북부여의 도읍성이었을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赤城縣)] [적성고루(赤城鼓樓)]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기(檀君記)를 보면, 고조선(왕검조선)의 초기강역에 대하여, “북쪽으로는 대황(大荒)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알유(猰貐. 필자주 : 흉노를 말한다)를 거느리고, 남쪽으로는 해대(海岱)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창해(蒼海, 필자주 : 대해의 오기이다)에 닿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고조선(왕검조선)의 제후국에 대하여, “천하의 땅을 공적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 치우씨(蚩尤氏)의 후손에게는 남서쪽의 땅을 주었는데, 들이 넓고 바다와 하늘이 푸르러 남국(藍國)이라 하였다......[필..

카테고리 없음 2021.06.26

윤여동설 – 고대의 압록강(鴨淥江), 살수(薩水), 패수(浿水)는 한반도에 없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대의 압록강(鴨淥江), 살수(薩水), 패수(浿水)는 한반도에 없었다 - 최초주장 [낙양동북 3,600리에 위치했던 고대의 요동(遼東)은 지금의 북경 일원] [위 : 북경(요동)에서 하북성 승덕시(평양성)까지의 거리는 고대의 거리단위로 1,000리쯤 된다] [위 : 북경(요동)에서 하북성 당산시 건창영진(남한성)까지의 거리는 고대의 거리단위로 1,000여리쯤 된다] [위 : 요동 동쪽 1천여리에 위치했다고 중국 사서의 기록에 나타나는 고구려와 백제의 위치] 요동(遼東)은 요수(遼水)의 동쪽지역을 말하는 것으로서, 후한서에는 요동(遼東)이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3,600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는 요동동쪽 1천여리에 위치했었다고 중국 사서들에 기록되어 있고, 고구려는..

카테고리 없음 2021.05.15

윤여동설 – 우리의 대륙고대사 진실(眞實)찾기의 지름길 영정하요수설(永定河遼水說)과 북경요동설(北京遼東說)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우리의 대륙고대사 진실(眞實)찾기의 지름길 영정하요수설(永定河遼水說)과 북경요동설(北京遼東說) - 최초주장 고대의 요동(遼東)은 낙양 동북3,600리에 위치한다고 하였고, 요수(遼水)를 건너면 바로 그 동쪽이 요동(遼東)이었다. ☆ 고대의 10리는 지금처럼 4km가 아니라 2.3km였다고 한다. 따라서 고대의 1,000리는 230km가 된다. 그런데 지금 낙양에서 북경까지의 고속도로 거리가 약800km쯤 된다. 환산해보면 약 3,500리쯤 된다. 지금의 북경 부근이 옛 요동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는 요동(遼東) 동쪽 1천여리에 위치해 있었다고 수 많은 사서들에 기록되어 있고, 서진(西晉) 말기에 고구려는 요동(遼東 : 요수 동쪽)을 차지했었고, 백제는 요서..

카테고리 없음 2021.05.08

윤여동설 –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의 현장 위화도(威化島)의 진짜위치를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의 현장 위화도(威化島)의 진짜위치를 찾았다 – 최초공개 [위 : 북경시 회유구] [위 : 위화도 태조봉(太祖峰) 추정지 : 지금의 북경 회유구 대라산(大羅山, 해발 약95m) 좌표 동경116도44분03초 북위40도18분04초] 신증동국여지승람 권지53 평안도 의주목(義州牧) 산천(山川) 조를 보면, “어적도(於赤島)는 난자도(蘭子島)의 북쪽에 있는데, 둘레가 17리이다. 그 땅이 평평하고 넓어서 밭 60여경(頃)을 일구었다. 검동도(黔同島)는 의주(義州)에서 서쪽으로 15리 떨어져 있는데, 둘레가 15리이다. 압록강이 여기에 이르러서 3갈래로 나누어지는데, 이 섬이 두 섬사이에 있으며, 삼씨량(三氏梁)이 있다. 모든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반드시 이 섬의 북쪽을 지나는데..

카테고리 없음 2021.02.06

윤여동설 – 유주(幽州), 영주(營州), 병주(幷州)의 진짜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유주(幽州), 영주(營州), 병주(幷州)의 진짜위치 - 최초공개 후진의 석경당이 거란에게 할양했다고 하는 연운16주(燕雲十六州)는, 유주(幽州), 탁주(涿州), 단주(檀州), 계주(薊州), 순주(順州), 영주(營州), 평주(平州), 울주(蔚州), 삭주(朔州), 운주(雲州), 응주(應州), 신주(新州), 규주(嬀州), 유주(儒州), 무주(武州), 환주(寰州)를 말하는 것인데, 아직까지도 그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지 않고 있고, 연운16주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요5경 즉 거란의 상경임황부, 중경대정부, 남경석진부(연경), 동경요양부(요동), 서경대동부의 정확한 위치도 아직까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요사(遼史)를 보면, 연운16주(燕雲十六州)에 포함되어 있는 유주(幽州)와 영주(營州)에..

카테고리 없음 2021.01.08

윤여동설 – 고구려 왕릉 조성지 고국(故國)에 대한 새로운 가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 왕릉 조성지 고국(故國)에 대한 새로운 가설 - 최초주장     고대 왕조시대에 왕릉은 당시의 도읍 부근에 조성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필자도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왔고, 따라서 고구려의 왕릉들도 당시의 도읍 부근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생각하여 시대에 따라 변화된 당시 고구려의 도읍 부근에서 해당 왕릉들을 찾으려고 하였다.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홀본)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后城鎭)이고,   국내성은 지금의 북경시 연경구 영녕진(永寧鎭)이며,   고구려의 환도성(丸都城), 안시성(安市城)은 지금의 북경 북쪽 회유 발해진(渤海鎭)이고,   고구려의 평양성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으로 밝혀졌다.    그리..

카테고리 없음 2020.06.28

윤여동설 - 전연 모용황의 고구려 환도성 침공로 “북도평활(北道平闊) 남도험협(南道險狹)”은 남과 북이 바뀌어 잘못 기록되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전연 모용황의 고구려 환도성 침공로 “북도평활(北道平闊) 남도험협(南道險狹)”은 남과 북이 바뀌어 잘못 기록되었다 - 최초주장 [고구려 목저성(木底城)으로 추정되는 지금 관청수고 서쪽의 진변성(鎭邊城)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6대 고국원왕 12년(A.D.342) 조를 보면, “봄2월 환도성(丸都城)을 보수하고 또 국내성(國內城)을 쌓았다. 가을8월 왕이 환도성으로 옮겨왔다. 겨울10월 연나라(전연) 임금 황(모용황)이 용성(龍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입위장군 한(모용한)이 황(모용황)에게 청하기를, “고구려를 먼저 빼앗은 다음 우문을 쳐부수어야만 중원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고구려로 가는 길에는 두 길이 있는데, 북쪽 길은 평탄하고 넓으며(北道平闊), 남쪽 길은 험하고 좁았다..

카테고리 없음 2020.06.15

윤여동설 - 고구려 국내(國內), 질산(質山), 좌원(坐原) 그리고 현토군(玄菟郡), 요동군(遼東郡)의 위치

윤여동설 - 고구려 국내(國內), 질산(質山), 좌원(坐原) 그리고 현토군(玄菟郡), 요동군(遼東郡)의 위치    [고구려 질산과 좌원 추정지,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회래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2대 유리왕 조를 보면,    “22년(A.D.3) 겨울10월 왕이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12월 왕이 질산북쪽(質山陰)에서 사냥하면서 닷새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6대 태조대왕 조를 보면,    “55년(A.D.107) 가을9월 왕이 질산남쪽(質陽)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자주색 노루를 잡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8대 신대왕(新大王) 조를 보면,    “4년(A.D.168) 한(後漢)나라 현토군 태수 경림(耿臨)이 침입하여 우리..

카테고리 없음 2020.02.22

윤여동설 - 고려의 도읍 개경 송악산에 나타나는 어린아이 형상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려의 도읍 개경 송악산에 나타나는 어린아이 형상 - 최초공개 [고려의 도읍 개경으로 비정되는 하북성 관성현과 그 북쪽의 송악] [개경 북쪽 송악산에 나타나는 어른(엄마?)과 무릎에 앉은 것처럼 보이는 어린아이 형상] 신증동국여지승람 개성부 상 산천 조를 보면, “송악(松嶽: 송악산)”이 개성부의 북쪽 5리에 있는데, 처음 이름은 부소(扶蘇: 부소산) 또는 곡령(鵠嶺)이라 하였다. 신라의 감간 팔원이 풍수에 능하였는데, 부소군에 이르러 살펴보니 산의 형승에서 어린아이(童)가 나타나므로(新羅監干八元善風水到扶蘇郡見山形勝而童) 강충(필자주 : 고려 태조 왕건의 선조)에게 말하기를 ‘만약 군(郡)을 산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암석이 드러나지 않게 하면 삼한을 통합할 인물이 출현할 것이다’ 하..

카테고리 없음 2019.11.02

윤여동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속 “백제의 동쪽에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 말갈(靺鞨)이 있다”는 온조왕의 말은 잘못된 기록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속 “백제의 동쪽에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 말갈(靺鞨)이 있다”는 온조왕의 말은 잘못된 기록 - 최초주장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조를 보면, “2년(B.C.17) 봄 정월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말갈이 우리의 북부국경에 연접하여 있으며, 그곳 사람들이 용기가 있고, 거짓이 많으니 우리는 병기를 수선하고 곡식을 저장하여 그들을 방비할 계책을 세워야 한다”하였다. 3년(B.C.16) 가을9월 말갈이 북부 국경을 침범하므로 왕이 강력한 군사를 거느리고 급격히 쳐서 그를 크게 패하게 하니 적들이 살아 돌아간 자가 열에 한 둘에 지나지 않았다. 8년(B.C.11) 봄2월 말갈적군 3천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하였다. 왕이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더니 열흘이 지나 적..

카테고리 없음 2019.08.31

윤여동설 - 세 부여(북부여, 졸본부여, 동부여)의 진짜위치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세 부여(북부여, 졸본부여, 동부여)의 진짜위치 찾기 - 최초주장 동명왕의 졸본부여가 북부여를 병합하자, 북부여의 해부루가 유민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이동하여 예(창해군)의 땅을 빼앗아 차지하고 동부여를 건국하게 되고, 동부여에게 그 땅을 빼앗긴 예는 다시 동쪽으로 개마산을 넘어 임둔군 땅으로 이동하여 그 땅을 빼앗아 예(동예)를 부활시키게 된다. 초기 현토군은 옥저가 되고, 진번군은 맥국이 되며, 진한은 신라가 되고, 변한은 가야가 된다. 한편 기원전 58년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부여로 와서 아들 없이 딸만 셋을 둔 졸본부여왕의 둘째 공주와 혼인한 후 그 왕위를 물려받은 주몽은 기원전 37년에 이르러 그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게 되고, 후일에 이르러 고구려는 낙랑군을 축출하고 옥저, 동예, 맥..

카테고리 없음 2018.12.09

윤여동설 - 예(濊)와 맥(貊) 그리고 동부여(東扶餘,東夫餘)의 상호관계도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예(濊)와 맥(貊) 그리고 동부여(東扶餘,東夫餘)의 상호관계도 - 최초주장 [북부여의 해부루가 졸본부여 동명왕에게 쫓겨 북쪽 예(창해군)의 땅으로 도망쳐 그곳을 점거하고 동부여를 세우자, 그 땅을 빼앗긴 예는 동쪽으로 개마대산(현 대흥안령, 칠로도산)을 넘어 임둔(명주) 지역으로 옮겨 가서 그 땅을 차지하고 다시 예(동예)를 세우게 되고, 동예에게 그 땅을 빼앗긴 임둔은 그 후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전해지지 않았다. 동화되어 소멸했는지, 다른 곳으로 이주해 가서 다시 나라를 세웠는지 알 수 없다. 혹시 그 땅을 잃자 그곳을 떠나 베링해를 건너 아메리카로 가서 인디언, 인디오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임둔→임뎐→인디언으로 변화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예(동예)의 서남쪽에 맥국(貊國)이 위치하고..

카테고리 없음 2018.08.11

윤여동설 - 위만조선 때 진번국(眞番國)과 임둔국(臨屯國)의 진짜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위만조선 때 진번국(眞番國)과 임둔국(臨屯國)의 진짜위치 - 최초공개 삼국유사 위만조선 조를 보면, “연왕(燕王) 노관이 한(漢 : 전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匈奴)로 들어가니 연(燕)나라 사람 위만도 망명하고자 무리 1,000여명을 모아 동쪽으로 도망쳐 요새를 넘고 패수(浿水)를 건너 진(秦)나라의 옛 빈터인 상하장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그리고는 차츰 진번(眞番), 조선(朝鮮)의 오랑캐들과 옛 연나라, 제나라에서 망명해 온 사람들을 모아 왕이 되고, 왕검성에 도읍했다. 위만은 군사의 위력으로 이웃의 조그만 나라들을 침략하여 항복시켰다. 이에 진번(眞番)과 임둔(臨屯)이 모두 복종해 와서 그에게 예속되니 땅이 수천리나 되었다. 위만은 아들에게 왕위를 전하고, 손자 우거에 이르렀다........

카테고리 없음 2018.06.08

윤여동설 - 고구려와 발해의 “책성(柵城)”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와 발해의 “책성(柵城)”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고구려 6대 태조대왕 4년(A.D.56) 조를 보면,   “가을 7월 동옥저(東沃沮)를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을 만들고, 동쪽으로는 창해(滄海)까지, 남쪽으로는 살수(薩水)에 이르기까지 국경을 확장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46년(A.D.98) 조를 보면,   “봄3월 왕이 동쪽으로 ”책성(柵城)“을 순행하다가 책성 서쪽 계산에 이르러 흰 사슴을 잡았다. 다시 책성으로 와서 신하들과 함께 잔치를 베풀어 술을 마시면서 책성 관리들에게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고 그들의 공적을 바위에 새겨놓고 돌아 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50년(A.D.102)년 조를 보면,   “가을8월 사신을 보내 ”책성(柵城)“ ..

카테고리 없음 2018.04.29

윤여동설 - 여진(말갈) 동쪽의 대해(大海)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여진(말갈) 동쪽의 대해(大海) 찾기 - 최초주장 [여진(말갈) 동쪽 대해 흔적] 고려의 윤관장군이 여진(숙신,읍루,물길,말갈)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아홉 개의 성을 쌓았는데, 우리는 지금 그를 "고려 동북9성"이라 한다. 그리고 이때 공험진의 선춘령(先春嶺)에 정계비를 세웠는데, 그 비석에 "高麗之境(고려지경)"이라고 새겼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사를 보면 이때 윤관장군이 여진으로부터 빼앗은 지역이, “동쪽으로는 대해(大海)에 닿았고, 서북방으로는 개마산을 끼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장주와 정주 두 고을에 닿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지금 한반도에 살고 있고, 고려의 도읍 개경을 황해도 개성으로 인식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고려의 동북쪽을 두만강 방향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고, 여진이 연해..

카테고리 없음 2018.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