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발해 북쪽 북표(北票) 라마동고분군(喇麻洞古墳群) 출토 인골과 혈연적으로 가장 가까운 집단은 지금의 내몽골 석림곽륵맹(錫林郭勒盟) 사람들이다 – 최초주장
[ 위 : 내몽골 석림곽륵맹(錫林郭勒盟)]
요녕성 조양시 북표(北票)의 라마동고분군(喇麻洞古墳群)에서 출토된 인골이 한국인과 혈연적으로 가장 가깝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동부여(東扶餘, 東夫餘) 사람들이 이 라마동고분군 출토 유골과 혈연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일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는 호태왕 비문 영락 20년(A.D.410) 조에,
二十年 庚戌 東扶餘舊是鄒牟王屬民
영락 이십년은 경술년이다.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中叛不貢
중간에 배반하고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王躬率往討
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軍到餘城 而餘擧國駭服
군대가 부여성에 도착하자 부여의 온 나라가 놀라 항복했다
獻出...
...을 바쳤다
王恩普覆 于是旋環
왕이 은혜로움을 널리 펼치고 개선하여 돌아왔다
又其慕化隨官來者
또 그를 (호태왕의 은혜로움을) 사모하여 따라온 관리도 있었다
味仇婁鴨盧 卑斯麻鴨盧 椯社婁鴨盧 肅斯舍鴨盧 ☆☆☆鴨盧
미구루압로 비사마압로 타사루압로 숙사사압로 ...압로였다
凡所攻破城六十四 村一千四百
무릇 공격하여 빼앗은 곳이 64개 성 1천4백개촌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 광개토태왕(호태왕, 영락태왕)이 동부여를 정벌하고 개선할 때 스스로 호태왕을 따라왔던 동부여 압로(鴨盧, 필자주 : 압로가 무슨 의미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구루압로 비사마압로 타사루압로 숙사사압로 ...압로(味仇婁鴨盧 卑斯麻鴨盧 椯社婁鴨盧 肅斯舍鴨盧 ☆☆☆鴨盧) 등이 바로 그들인데, 그렇다면 호태왕은 개선한 후 따라온 동부여 압로들을 고구려 땅 어딘가에 배치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지금의 요녕성 북표시가 바로 고구려 호태왕이 동부여를 정벌하고 개선할 때 따라온 동부여 압로들을 배치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동부여는 한반도의 압록강 북쪽에 위치했던 나라가 아니라 지금의 북경 북쪽 방향인 내몽골 석림곽륵맹(錫林郭勒盟) 부근에 위치했던 나라였고, 그 중심지는 석림호특, 정람기, 다륜 부근이었다.
그리고 고구려의 졸본성(卒本城)은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后城鎭), 국내성(國內城)은 북경시 연경구 영녕진(永寧鎭), 환도성(丸都城)은 북경시 회유구 발해진(渤海鎭), 평양성(平壤城)은 하북성 승덕시(承德市)로 밝혀졌고,
백제는 하북성 당산(唐山), 진황도(秦皇島) 일원에, 신라는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일원에, 가야는 요녕성 호로도시(葫蘆島市) 일원에 위치했고, 동예, 맥, 옥저 등의 나라도 발해 북쪽 대륙에 위치했으며, 고대의 왜국(倭國)도 지금의 요동반도(遼東半島)에 위치했으며, 지금의 북경(北京)이 고대의 요동(遼東)으로 밝혀졌다.
지금의 발해 북쪽 대륙이 우리의 상고사와 고대사의 중심 강역이었다.
역사적 사실이 이러하다면,
한반도의 평양은 고조선의 왕검성, 고구려 평양성, 고려 서경이 될 수 없는 것이고, 경주는 신라의 천년도읍 서라벌이 아닌 것이며, 공주는 백제의 웅진이 될 수 없고, 당나라 소정방은 황해(서해)를 건너 한반도 부여까지 온 일도 없으며, 개성은 고려의 도읍 개경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북표 라마동고분군 출토유골의 DNA와 지금 내몽골 석림호특, 정람기, 다륜 부근 사람들의 DNA와 비교해 보기를 제안한다.
아마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