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왕검성 28

윤여동설 -고조선(왕검조선)의 아사달(阿斯達), 왕검성(王儉城), 장당경(藏唐京)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고조선(왕검조선)의 아사달(阿斯達), 왕검성(王儉城), 장당경(藏唐京)의 위치 - 최초공개     [고조선의 첫 도읍 아사달성(阿斯達城)으로 추정되는 내몽골 영성현 대명진의 대형토성터. 규모는 가로 약2.1km, 세로 약1.6km이고, 좌표는 동경119도08분49초, 북위41도33분59초이다. 성의 내부면적이 약 100만평쯤 된다]   [아사달성으로 추정되는 내몽골 영성 서쪽 대형토성터의 무너진 성벽과 불탑. 중국학자들은 이곳을 요 중경대정부터라고 하고 있는데, 순 엉터리 비정이다]  [왕검조선의 두번째 도읍 왕검성(王儉城 : 평양성)으로 비정되는 하북성 승덕시의 피서산장(열하행궁). 성의 내부가 약 170만평 정도로 매우 넓고 풍광도 아름답다. 과연 옛날 고조선의 단군들과 고구려의 왕들이 살..

카테고리 없음 2020.01.25

윤여동설 - 고조선(왕검조선)의 도읍 왕검성(王儉城)의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조선(왕검조선)의 도읍 왕검성(王儉城)의 위치 - 최초주장  [옛 고조선(왕검조선)의 왕검성 터에 세운 청나라의 열하행궁(피서산장)]   규원사화(揆園史話)를 보면,   “여러 고을 땅의 길흉을 판단하여 도읍을 태백산 동남쪽(필자주 : 원문은 서남쪽인데 필자가 고쳤다. 왕검성과 아사달의 위치를 헷갈려 기록한 듯하다) 우수하벌판에 정하고 임검성(필자주 : 첫도읍 아사달의 오기이다)이라고 했다.....................   우수하가에 산지 10년에 도읍을 백산(白山 : 태백산)의 남쪽, 패수(浿水)의 북쪽으로 옮기니 이곳이 평양(平壤)이며 제2의 임검성(필자주 : 두번째 도읍 왕검성을 말하는 것이다)이다.   지금의 속말 땅은 기후가 춥고 토질이 나빠서 들이 넓기는 하나 농사짓기가 ..

카테고리 없음 2019.01.27

윤여동설 - 위만의 고조선으로의 망명로와 왕검성 공격로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위만의 고조선으로의 망명로와 왕검성 공격로 - 최초주장 삼국지 한(韓) 전을 보면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해오는 과정과 왕검성을 탈취하는 과정을 위략의 기록을 인용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를 보면, “위략에 이르기를,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는 주(周)나라가 쇠약해지고, 연(燕)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을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 역시 스스로 왕을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역격하여 주왕실을 보존시켜 주려고 하였으나 그의 대부 예(禮)가 간하므로 중지하였다. 그리고는 예를 파견하여 서쪽의 연나라를 설득하니 연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조선(朝鮮 : 고조선)을 침공하지 않았다. 그 뒤에 자손이 점점 교만해지고 포악해지자 연나라는 장군 진개를 보내 조선의 서쪽지방을 침공하여..

카테고리 없음 2015.08.09

윤여동설 - 위만조선의 도읍은 한반도에 없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위만조선의 도읍은 한반도에 없었다 - 최초주장 한나라 원정 기록 기술적·논리적 모순점 지적 연합뉴스 | 입력 2015.07.20. 11:42 (인천=연합뉴스) 신민재 기자 = 기원전 108∼107년 중국의 한무제(漢武帝)가 멸망시킨 위만조선의 수도인 왕험성(王險城)이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인하대 연구팀에 의해 제기됐다. 이는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한 뒤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을 설치했기 때문에 한반도 일부가 자신들의 영토였다는 중국 학계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인하대 국제관계연구소는 왕험성이 한반도에 존재했다는 중국 측 주장에 대한 논리적 모순을 밝혀 한반도 북부에 대한 중국의 역사 연고권이 허위임을 증명했다고 20일 밝혔다. 지난 2년간 진행된 이 연구에는 인하대 국..

카테고리 없음 2015.07.20

윤여동설 - 환국, 배달국, 고조선(왕검조선)의 중심지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환국, 배달국, 고조선(왕검조선)의 중심지 찾기 - 최초주장 위 지도를 보면 우리 민족의 중심강역이 지금의 대흥안령 줄기 남쪽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는데, 환국의 중심은 우하량 선사유적지가 있는 능원 부근으로 보이고, 환웅 배달국의 도읍 신시(神市)의 위치는 태백산 신단수 아래라고 하였는데, 내봉골 적봉 부근으로 비정되며, 고조선(왕검조선)의 첫 도읍 아사달의 위치에 대해서는, 규원사화 단군기에, “여러 고을 땅의 길흉을 판단하여 도읍을 태백산 서남쪽(필자주 : 동남쪽의 오기가 아닐까?) 우수하 언덕에 정하고 왕검성이라고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태백산 부근이 고조선(왕검조선)의 중심강역이었음을 알 수 있고, 또 “우수하 가에 산지 10년 만에 도읍을 백산의 남쪽과 패수의 북쪽으..

카테고리 없음 2013.09.06

윤여동설 - 위만의 옛 도읍 험독(險瀆)의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위만의 옛 도읍 험독(險瀆)의 위치 - 최초주장 사기 조선열전과 전한서 조선전을 보면,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椎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障”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해석해 보면, “연왕 노관이 (한나라에) 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만(위만)도 망명하였는데, 무리 천여명을 모아 추결을 하고 만이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달아나 요새를 넘고 패수를 건너 (조선왕 준에게 망명하고 돌아와 준이 배치해 준), 진고공지상하장에서 살았다” 라는 뜻이다. ☆ 위략에 “(조선왕) 부가 죽고 그 아들 준(準)이 왕위에 올랐다. 그 뒤 20여년이 지나 진항(진승과 항우)이 기병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燕), 제(齊), 조(趙)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점점 준에게 망명해오자 준..

카테고리 없음 2013.03.24

윤여동설 - 한반도 경주에 신라왕릉은 하나도 없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 경주에 신라왕릉은 하나도 없다 - 최초주장 [위 : 경주오릉, 이 고총들을 신라 혁거세왕릉, 알영왕후릉, 남해왕릉, 유리왕릉, 파사왕릉이라고 비정하고 있으나 이는 신라 왕릉들이 아니다] 어느 역사학자가 한반도 “경주에 있는 신라왕릉 중 제대로 명명된 곳이 7기 뿐”이라고 그의 유저 “신라왕릉 연구”에서 주장하였다고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으나, 사실 신라왕릉들이 잘못 비정되었다는 주장은 조선시대부터 꾸준히 제기되어온 것으로서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경주부 능묘 조를 보면, “혁거세릉,미추왕릉,법흥왕릉,태종무열왕릉,진흥왕릉,선덕왕릉,효소왕릉,성덕왕릉,헌덕왕릉,흥덕왕릉,김유신묘,김인문묘,김양묘”에 대한 조성위치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기 때문에 조선시대 사람들은..

카테고리 없음 2012.03.03

윤여동설 - 험독(險瀆)은 지금의 북경남쪽 부근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하여 처음 살았던 험독(險瀆)은 지금의 북경남쪽 부근 - 최초주장     위략에  “(조선왕) 부가 죽고 그 아들 준(準)이 왕위에 올랐다.  그 뒤 20여년이 지나 진항(진승과 항우)이 기병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燕), 제(齊), 조(趙)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점점 준에게 망명해오자 준은 이들을 (고조선의) 서부지역에 살게 하였다.   한나라 때에 이르러 노관으로 연왕을 삼으니 조선과 연나라는 요수(원문은 패수로 되어 있으나 요수의 오기임이 확실하므로 필자가 고쳤다)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관(노관)이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치자 연나라 사람 위만도 망명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조선의) 준(준왕)에게 망명하고는 서쪽 변방에 살게 ..

카테고리 없음 2012.01.06

윤여동설 - 고구려 초기의 일식관측지는 북경 연경(延慶) 부근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 초기의 일식관측지는 북경 연경(延慶) 부근 - 최초주장                     [위: 천상열차분야지도 석각]  [조선초에 고구려 석각천문도를 바탕으로 다시 제작했다는 천상열차분야지도]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는 조선 초에 제작된 돌에 새긴 천문도이다.   그런데 이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구려 평양성에 석각천문도가 있었는데 전쟁통에 잃어버렸고 사본만이 전해져 이를 바탕으로 조선초에 새로 만들었다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고구려 평양성에 돌에 새긴 천문도가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양부 고적 조를 보면, “첨성대 유지(遺址)가 평양부 남쪽 3리에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보면 고구려에서 석각천문도를 바로 ..

카테고리 없음 2011.02.12

윤여동설 - 고대의 태백산(太白山)은 지금의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일 가능성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대의 태백산(太白山)은 지금의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일 가능성- 최초주장 삼국유사에는 환웅천왕이 그를 따르는 사람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太白山) 꼭대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나라를 세우고 그곳을 신시(神市)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왕들이 태백산에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 한민족은 아주 먼 옛날부터 태백산을 신성한 성산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신라의 건국지는 지금의 발해 북쪽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일원이었다. 그리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주몽이 태백산 동남쪽에 위치한 행인국을 쳐서 병합시켰다는 기록도 보이고, 또 신당서 발해전을 보면 발해가 태백산 동북쪽에서 건국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또 신당서 흑수말갈 전에는 속말부의 남..

카테고리 없음 2010.07.19

윤여동설 - 험독과 왕험(왕검성)은 같은 곳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험독(險瀆)과 왕험(王險:왕검성)은 같은 곳이 아니다 - 최초주장 사기 조선전을 보면, “조선왕 만(위만)은 옛 연나라 사람이다. 전연 때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빼앗아 관리를 보내 장새를 쌓고 다스렸다.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진번조선 지역을) 요동외요에 속하게 했는데, 한나라가 흥기하자 그 땅이 멀고 지키기가 어렵다 하여 다시 요동고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를 경계로 삼아 연나라에 속하게 했다. 연왕 노관이 (한나라에) 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만(위만)도 무리 수천인을 모아 추결과 만이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도망쳐 요새를 넘고 패수를 건너 (고조선에 망명한 후) 진나라의 옛 빈 땅인 상하장에서 살았다. 점점 진번조선의 만이들과 옛 연나라,제나라 망명자들을 받아들여 왕이 되고 왕..

카테고리 없음 2010.04.04

윤여동설 - 고조선과 연나라의 국경 만번한은 지금의 어디일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조선과 전국시대 연나라의 국경이었던 만번한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밀운수고 부근 - 최초주장     삼국지 한(韓) 전을 보면 위략(魏略)의 기록을 주로 달아 놓았는데, 그 기록을 보면,『위략에 이르기를,  옛날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가 있었다. (昔箕子之後 朝鮮侯)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연나라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동쪽을 공략하려 하였는데, 조선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주 왕실을 존속시켜주기 위하여 거꾸로 연나라를 공격하려고 하다가 그 대부인 예가 간하여 중지하고, 예로 하여금 서쪽의 연나라를 설득하니 연나라도 중지하고 공격하지 않았다.  후에 (조선후의) 자손들이 점점 교만하고 포학해져 연나라가 드디어 장수 진개를 보내 그 서쪽을 공격하여 2천여 리(필자주 : 사기 흉노전에는 1천여..

카테고리 없음 2009.08.06

윤여동설 - 고구려 평양성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 평양성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 - 최초공개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이 과연 지금의 어디인지를 밝히기 위하여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주장이 있어왔다. 지금의 북한 평양이 고구려의 평양성이라는 조선시대부터의 주장으로부터 압록강 북쪽 요양 또는 요하서쪽 조양일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 고구려의 평양성이라는 필자의 주장 등이 있는데, 이처럼 주장들이 많다는 것은 아직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을 정확히 찾지 못했다는 말과 같다. 만약 고구려의 평양성을 정확히 찾을 수만 있다면 우리 고대역사의 거의 전부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곳이 바로 고조선의 왕검성이었기 때문에 고조선의 중심지를 알 수 있게 되고, 위만조선, 한사군의 위치를 찾을 수 있게 되며, 삼한, 삼국..

카테고리 없음 2009.05.25

윤여동설 - 우리 역사의 정통성은 남한이 이었다

윤여동설 - 우리 역사의 정통성은 남한이 이었다 우리의 옛 역사는 환인시대, 환웅시대를 지나며 홍산문화(요하문명)를 꽃피웠고, 고조선에 이르러 청동기문화를, 다시 한과 위만조선, 부여시대에 이르러 철기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부여는 다시 고구려가 되고, 고구려는 한사군 중 임둔군, 낙랑군, 구현토군(낙랑동부도위)과 요동군, 대방군을 흡수함으로써 대제국이 되었다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당하고, 발해가 그 땅을 차지하게 되고, 발해는 다시 요·금·원·청·중국으로 이어지게 된다. 위만조선은 다시 한 무제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고 한사군이 되었다가 고구려에 복속되고, 한은 다시 삼한(마한, 진한, 변한)으로 나누어지게 되고, 마한에서 백제가, 진한에서 신라가, 변한에서 가야가 건국되었다가 통일신라가 되고, 통일신라가 ..

카테고리 없음 2009.05.14

윤여동설 - 낙랑군과 낙랑국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낙랑군과 낙랑국 - 최초주장 대무신왕은 고구려의 3대왕으로서 2대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었다. 유리왕의 장자 즉 다물후 송양의 큰딸이 유리왕과 혼인하여 낳은 아들 도절은 일찍 죽었고, 유리왕의 계비 화희가 낳은 둘째아들 해명은 유리왕이 졸본에서 국내로 도읍을 옮기려 할 때 그를 반대하다가 유리왕으로부터 스스로 자결하라는 명을 받고 죽었다. 그리하여 유리왕이 다물후 송양의 작은 딸을 다시 왕비로 맞아들여 낳은 아들이 바로 대무신왕 무휼이었다. 무휼(대무신왕)은 자라 15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모본호족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고, 또 갈사왕의 손녀를 둘째 왕비로 맞아들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가 바로 호동왕자였다. 이때까지도 원비였던 모본호족의 딸은 아들을 낳지 못했다가 나중에야 아들을 낳게된다. ..

카테고리 없음 2009.04.21

윤여동설 - 위만조선의 도읍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위만조선의 도읍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 - 최초공개 원봉 2년(B.C.109) 한나라는 섭하를 보내어 (조선의) 우거를 회유하였으나 끝까지 수긍하지 않고, 조서를 받들지 않았다. 섭하는 돌아올 때 국경인 패수(필자 주 : 이때 한나라와 위만조선의 국경이 패수일 수는 없고 살수이어야 맞다. 만약 패수일 경우 패수 동쪽에 바로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이 위치했었다는 말이 된다. 사실이 이러했다면 위만조선은 도읍을 동쪽으로 멀리 옮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인데, 위만조선은 멸망할 때까지 왕검성에 도읍하고 있었다)에 이르자 사람을 시켜 전송나온 조선의 비왕장을 죽이고 즉시 강을 건너 요새로 돌아와서 천자에게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하였다. 천자는 그것을 잘한 것으로 여겨 나..

카테고리 없음 2008.12.05

윤여동설 -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王儉城)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王儉城)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 - 최초주장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 왕검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경에는 무엽산이라 했고, 또는 백악이라고도 하는데 백주에 있었다)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 했는데, 고(요임금)와 같은 시대였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단군왕검은) 당고(당요) 즉위 50년 경인(당요즉위 원년은 무진년이므로 50년은 정사년이지 경인년이 아니다. 아마 사실이 아닐 것이다)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에 도읍하고 조선(朝鮮)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는데 궁홀산(일명 방홀산이라고도 한다) 또는 금미달이라고도 했다. 그 나라는 1,500년 간 존..

카테고리 없음 2008.11.26

윤여동설 - 고구려의 네번째 도읍 평양성의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의 네 번째 도읍 평양성의 위치 - 최초주장 고구려의 평양성은 옛 고조선의 왕검성(왕험성이라고도 한다)이었고, 위만조선의 도읍이었으며,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에는 한사군의 한 군이었던 낙랑군의 치소로 활용되다가 대무신왕이 전한 낙랑군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고구려에 편입시켰다. ☆ 사기 조선전의 주에는, "括地志云 高(句)麗都平壤城 本漢樂浪郡王險城 又古云朝鮮地也(괄지지에는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성인데 본래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이다. 또 고조선 땅이라고도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조선의 왕검성이 곧 낙랑군의 치소였고, 고구려의 평양성 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고구려가 동천왕 때 위나라 관구검의 침공을 받고 도읍인 환도성이 함락되어 불타버리자 247년 2월에 급히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

카테고리 없음 2008.07.29

윤여동설 - 위만조선과 한사군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위만조선과 한사군은 지금의 어디에 위치했었을까? - 최초공개   [위 : 산의 굴곡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축성된 승덕시 피서산장 성벽]  『조선왕 만(위만)은 옛 연나라 사람이다.  연(燕)나라가 강성할 때 진번조선을 공략하여 귀속시키고 관리를 두고 요새를 쌓았었다.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멸망 시켰을 때 조선은 요동(遼東)의 외곽에 속하게 되었다.  한(漢)나라가 흥기하자 그곳이 멀고 수비하기가 어렵다하여 요동의 옛 요새를 다시 수리하고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로 정하여 연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연나라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만(위만)도 1천여 명의 무리와 함께 상투(추결)를 틀고, 만이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요새를 넘어 달아나 패수를 건너 망명하여 진나라의 빈땅인 상하..

카테고리 없음 2008.06.17

윤여동설 - "왕검성(王儉城)" 그곳은 과연 지금의 어디인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왕검성(王儉城)" 그곳은 과연 지금의 어디인가? - 최초주장                                  우리 역사 5천년의 중심지 왕검성의 위치   왕검성(王險城)이란 고조선의 두번째 도읍의 이름이다.  첫도읍은 우수하지원의 아사달, 세번째 도읍은 백악산의 아사달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고조선의 도읍들의 위치를 잃어버렸는데,      우리는 어떻게 하든 고조선의 도읍들과 특히 이 왕검성을 꼭 찾아내야만 한다.   우리가 이 왕검성의 위치를 꼭 찾아야 하는 것은 이곳이 바로 우리 한민족 5천년 역사의 마음의 고향이기 때문이고, 고구려의 평양성, 고려의 서경으로 이어져 우리의 고대 강역을 밝힐 수 있는 중심점이기 때문이다.  고조선은 크게 왕검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카테고리 없음 2008.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