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고구려 초기의 일식관측지는 북경 연경(延慶) 부근 - 최초주장

윤여동 2011. 2. 12. 09:07

 윤여동설 - 고구려 초기의 일식관측지는 북경 연경(延慶) 부근 - 최초주장

 

 

                   [위: 천상열차분야지도 석각]

 

 [조선초에 고구려 석각천문도를 바탕으로 다시 제작했다는 천상열차분야지도]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는 조선 초에 제작된 돌에 새긴 천문도이다.

  그런데 이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구려 평양성에 석각천문도가 있었는데 전쟁통에 잃어버렸고 사본만이 전해져 이를 바탕으로 조선초에 새로 만들었다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고구려 평양성에 돌에 새긴 천문도가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양부 고적 조를 보면, “첨성대 유지(遺址)가 평양부 남쪽 3리에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보면 고구려에서 석각천문도를 바로 이 첨성대에 설치해 두고 천문관측에 활용하다가 멸망했고, 그 후 언젠가 전쟁 중에 잃어버렸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고구려는 졸본에 도읍했던 개국초기부터 평양성에서 멸망할 때까지 계속적으로 천문관측 기록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는 개국초부터 천문관측을 했었고, 그 후에도 도읍이전으로 인하여 위치는 약간씩 바뀌었겠지만 지속적으로 천문을 관측했고, 매우 중요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천문관측 기록 중 일식에 관한 관측기록을 찾아보면, 고구려 전기인 2-3세기 기록이 주로 삼국사기에 나타나는데, 천문학자인 박창범은 그의 저서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김영사)”에서 “삼국사기의 일식관측지는 한반도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수록된 일식 모두를 가장 잘 관측할 수 있는 지구상 위치는 발해만 유역이다. 그리고 서기2-3세기에 주로 나오는 고구려의 일식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만주와 몽고에 이르는 백제보다 북위도의 지역이었다” 라고 밝히고 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은 한반도에 관한 기록이 아니라 발해와 접한 지금의 중국 하북성 난하 중, 하류에 위치하고 있던 대륙백제의 기록이다. 그런데 천문학자인 박창범도 백제의 일식관측 기록이 바로 발해만 유역에서 관측된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 역시 고구려의 건국지가 지금 중국의 북부지역인 하북성 적성 후성진 부근이고 국내성(연경현 영녕진)이나 환도성(북경 북쪽 발해진) 역시 그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주장이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 먼 옛날에 평평한 사막지역이거나 내몽골평원 초원지역 같은 곳에서 밤에 방향을 바르게 찾는 방법으로는 별자리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 

 

  이는 고구려의 전기 도읍인 졸본, 국내성, 환도성이 내몽골과 가까운 하북성 적성, 북경 연경 부근으로 나타나기 때문이고, 후기의 도읍인 평양성, 황성, 장안성은 하북성 승덕시 부근으로 비정된다.

  따라서 고구려 평양성에 석각천문도가 설치되어 있었다면 이는 바로 고구려가 평양성에 도읍하고 있을 때인 후기에 첨성대에 설치한 천문도였을 것이다.

  다만 고구려는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환도성으로 다시 황성, 평양성, 장안성 등으로 도읍을 이전하거나 왕이 옮겨 살았는데, 그때 석각천문도도 함께 옮겼거나 새로 새겨 설치했을 것이다.

  천문관측에 있어 천문도는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참고자료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 혹시 고구려 평양성에 설치되어 있었다는 석각천문도가 옛 고조선이 왕검성에 설치해 놓았던 것을 고구려가 평양성에 도읍한 후 그대로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이는 고조선 때에도 천문관측 기술이 상당히 발전한 상태였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구려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별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는지 고구려 때 조성된 고분에서는 사신도와 함께 천문도가 종종 발견되고 있고, 일본에서 발견된 기토라고분 천문도가 고구려의 천문도로서 지금 중국의 북부지역에서 관측할 수 있는 별자리라는 주장이 있으니[필자주 : 기토라고분 천문도가 기원전 65년경 북위38.4도에서 관측되는 별자리라고 한다는데, 그렇다면 이는 발해 북쪽 북위40도와 41도 사이에 도읍했던 고구려의 별자리가 아니라 고대 한반도의 어느 왕조에서 전파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구려 천문관측의 표준 역할을 했을 석각천문도의 관측지는 지금의 북경 연경부근으로부터 하북성 승덕시에 이르는 부근 지역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는 고구려의 국내성이 연경부근, 평양성이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고구려의 천문관측지가 그 부근이라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천상열차분야지도 제작의 모본이 되었다고 하는 고구려 때의 석각천문도가 전해졌다면 고구려 때의 천문관측지를 좀 더 정확히 밝힐 수 있었을 것인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으니 매우 아쉬운 일이다.

  다만 필자가 고구려 초기의 일식관측지가 북경 연경 부근이라 밝혔고, 석각천문도의 구체적인 관측위치를 북경 연경 부근으로부터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라고 밝혀 주었으니 고구려의 시대별 천문관측지도 이제 머지않아 그 위치를 정확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천문관측 기록]

  “유리왕 13년(B.C.7) 봄 정월 화성이 심성성좌에 머물렀다”

  “민중왕 3년(A.D.46) 겨울11월 혜성이 남쪽에 나타났다가 20일 만에 사라졌다”

 “태조대왕 64년(A.D.116) 봄3월에 일식이 있었다.

   72년(A.D.124) 가을9월 그믐날 경신에 일식이 있었다.”

  “차대왕 4년(A.D.149) 여름4월 그믐날 정묘에 일식이 있었다.

   5월 오성이 동쪽에 모였다.

   일자(日者:천문관측을 담당하는 관리)가 왕이 노할까 두려워 속여 아뢰기를 ‘이것은 왕의 덕이요 나라의 복입니다’하니 왕이 기뻐하였다.

  8년(A.D.153) 겨울12월 그믐날에 객성이 달을 범했다.

  13년(A.D.158) 봄2월 혜성이 북두성좌에 나타났다.

  여름5월 그믐날 갑술에 일식이 있었다.

  20년(A.D.165) 봄정월 그믐날에 일식이 있었다”

 “신대왕 14년(A.D.178) 겨울10월 그믐날 병자에 일식이 있었다”

  “고국천왕 4년(A.D.182) 봄3월 갑인일 밤에 붉은 기운이 태미성좌를 관통하였는데 그 형상이 뱀과 같았다.

  가을7월 혜성이 태미성좌에 나타났다.

  8년(A.D.186) 여름4월 을묘에 형혹성이 심성성좌에 머물렀다.

  5월 그믐날 임진에 일식이 있었다”

  “산상왕 21년(A.D.217) 겨울10월 혜성이 동북방에 나타났다.

  23년(A.D.219) 봄2월 그믐날 임자에 일식이 있었다”

  “서천왕 4년(A.D.273) 가을7월 초하루날 정유에 일식이 있었다”

  “봉상왕 8년(A.D.299) 가을9월 객성이 달을 범하였다”

  “미천왕 원년(A.D.300) 12월에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16년(A.D.315) 가을8월 혜성이 동북방에 나타났다”

  “고국원왕 6년(A.D.336) 봄3월 큰 별이 서북방으로 흘러 떨어졌다”

  “소수림왕 13년(A.D.383) 가을9월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다” 

 “양원왕 10년(A.D.554) 12월 그믐날에 일식이 있었다.

  11년(A.D.555) 11월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평원왕 23년(A.D.581) 봄2월 그믐날에 별이 비오듯 떨어졌다”

  “보장왕 2년(A.D.643) 9월15일 밤이 밝기는 하였으나 달이 보이지 않았으며, 뭇별들이 서쪽으로 흘러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