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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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위만조선과 한사군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 2008. 6. 17. 20:34

윤여동설 - 위만조선과 한사군은 지금의 어디에 위치했었을까? - 최초공개

 

 

 

[위 : 산의 굴곡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축성된 승덕시 피서산장 성벽]

 

 『조선왕 만(위만)은 옛 연나라 사람이다.
  연(燕)나라가 강성할 때 진번조선을 공략하여 귀속시키고 관리를 두고 요새를 쌓았었다.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멸망 시켰을 때 조선은 요동(遼東)의 외곽에 속하게 되었다.
  한(漢)나라가 흥기하자 그곳이 멀고 수비하기가 어렵다하여 요동의 옛 요새를 다시 수리하고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로 정하여 연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연나라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만(위만)도 1천여 명의 무리와 함께 상투(추결)를 틀고, 만이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요새를 넘어 달아나 패수를 건너 망명하여 진나라의 빈땅인 상하장에서 살았다.
  점차 진번조선과 만이 그리고 연나라, 제나라에서 망명해온 자들을 모아서 왕이 되고 왕험(王險 : 왕검성)에 도읍 하였다.
  한나라 혜제와 여후 때에 이르러 천하가 처음으로 평정되자 요동태수는 만을 외신으로 삼고 약정을 체결하였는데 "만은 외신이 되어 요새너머의 만이들을 통솔하되 변경에서 약탈하지 못하게 하고, 여러 만이의 군장들이 천자를 만나기 위하여 입조하고자 할 때 그를 막아서는 아니된다" 하였다. 이를 듣고 천자도 허락하였다.
  이런 연고로 만은 병사와 재물로써 부근의 소읍을 쳐 항복 시켰다.
  진번(眞番), 임둔(臨屯)도 모두 복속하여 왔으므로 땅이 사방 수천 리에 이르렀다.
  (위만의) 왕위가 아들에게 전해지고 손자인 우거에 이르렀는데, 한나라 사람들이 많이 망명해 갔고 또 조선왕(우거)은 한나라에 입조하지도 않았으며, 진번과 이웃한 여러 나라가 천자를 알현하고 글을 올리려 하였으나 길을 막고 통과시키지 않았다.
   원봉 2년(B.C.109) 한나라는 섭하를 보내어 (조선의) 우거를 회유하였으나 끝까지 수긍하지 않고, 조서를 받들지 않았다.
  섭하는 돌아올 때 국경인 패수에 이르자 사람을 시켜 전송나온 조선의 비왕장을 죽이고 즉시 강을 건너 요새로 돌아와서 천자에게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하였다. 천자는 그것을 잘한 것으로 여겨 나무라지 않고, 섭하를 요동동부도위에 임명하였다.
  조선이 섭하를 원망하여 군사를 갑자기 발동시켜 섭하를 죽여버리자 천자는 죄수들을 모아 조선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 해 가을 누선장군 양복을 보내 병력 5만으로 제나라에서 발해에 배를 띄우게 하고, 좌장군 순체에게는 요동(遼東)을 출발하게 하여 우거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우거가 군사들을 발동시켜 험준한 곳에서 막았다.
  좌장군(순체)의 졸정인 다(多)가 요동병사들을 이끌고 멋대로 선제 공격했다가 패하고, 흩어져 도망해 왔으므로 잡아 군법에 의하여 참수하였다.
  누선장군(양복)이 제나라 군사 7천명을 이끌고 먼저 왕험(왕검성)에 이르렀는데, 성을 수비하고 있던 우거가 누선장군의 군사가 적은 것을 알고 곧 성을 나와 공격하였다.

 

 

 

 

  누선장군의 군사들은 패하고 흩어져 도망하였다.      
  무리를 잃은 양복장군은 10여일 간 산 속에 숨어 있으면서 흩어진 군사들을 불러모아 군대를 다시 편성하였다.
  좌장군은 패수 서쪽에서 조선을 공격하였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천자는 두 장군의 전세가 불리하자, 위산을 사자로 보내어 군사의 위용으로 우거를 회유하도록 하였다.
  우거는 사자를 보자 머리 숙여 사과하고 "항복을 하고 싶었지만 두 장군이 죽일지도 몰라 두려웠다. 이제 신임표인 부절을 보았으니 항복을 청한다"고 하였다.
  우거는 태자를 입조시켜 사죄하고, 말 5천 필을 헌납하며, 군량을 공급하겠다고 하였다.
  태자가 무장한 1만여 군사를 거느리고 패수를 건너려고 하였는데, 사자 위산과 좌장군은 혹시 변란이 있을까 의심하여, 태자에게 "이미 항복을 하였으니 수행하는 군사들에게 무기는 버리라고 명하시오" 하였다.
  태자 역시 사자와 좌장군이 자기를 죽일까 의심하여 패수를 건너지 않고 되돌아가 버렸다.
  위산이 돌아와 천자에게 보고하자 천자는 위산을 주살 하였다.
  좌장군은 패수 강가에 배치된 조선군을 격파하고 앞으로 나아가 성(왕검성) 아래에 도착하여 성의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누선장군 역시 합류하여 성의 남쪽에 주둔하였다.
 

 

[위 :  피서산장의 정문인 여정문]

 

 그러나 우거가 성을 굳게 지켜 수개월이 되어도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좌장군(순체)은 원래 시중이었고, 연(燕)과 대(代 )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군사들이 독하고 날랬으며 교만스러웠다.
  누선장군(양복)은 제나라(현 산동반도부근) 병졸들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 우거와의 전투에서 이미 여러 번 패하여 병졸들을 많이 잃었으므로 병졸들은 겁을 먹고 있었다.
  그리하여 누선장군 양복은 우거왕을 포위하고는 있었으나 항상 화친하기를 원하였고, 좌장군은 빨리 공격하려고 하였다.
  조선의 대신들은 은밀하게 첩자를 보내 상황을 탐지하고는 사람을 누선장군 양복에게 보내 항복을 약속하였으나 말만 오갈 뿐 확실히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좌장군 순체는 누선장군과 함께 여러 차례 조선을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누선장군은 조선이 약속한 항복을 빨리 받아낼 욕심으로 순체와 만나지도 않았다.
  좌장군 역시 조선에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조선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누선장군에게 만 마음이 쏠려 있었다.
  이렇게 두 장군의 마음은 일치하지 못하였다.
  좌장군은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누선장군이 앞서 군사를 잃은 죄가 있어 이제 조선과 사사로이 친선을 맺어 항복하지 못하게 하고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인가 의심스러웠지만 발설하지는 않았다.
  천자가 말하기를 "두 장군이 진격하지 못하므로 위산을 우거에게 사자로 보내어 회유하였었다. 우거가 항복하고 태자를 한나라에 보내기로 했었는데 사자인 위산이 자기가 결정하지 못하고 좌장군과 잘못 상의하여 항복 약속을 그르치고 말았다.
  지금 두 장군이 성을 포위하고는 있으나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 해결되기는 틀렸다." 하고는 제남태수 공손수를 보내어 일을 마치도록 하고, 편의에 따라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였다.          
  공손수가 도착하자 좌장군 순체가 말하기를 "조선이 오래 전에 항복했을텐데 아직 까지 항복하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고는 누선장군이 만나주지도 않는다는 것과 또 자기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모두 말하였다.
  "지금과 같은 사태를 빨리 처리하지 않는다면 커다란 해가 있을까 걱정되고, 누선장군과 조선이 연합하여 나의 군대를 공격하여 큰 해를 입히는 일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공손수 역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여 부절로서 좌장군의 군영에서 작전회의를 한다고 누선장군을 소환하여 그가 오자 좌장군 휘하에 명하여 누선장군을 즉시 체포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런 다음 누선장군의 병력을 좌장군의 휘하에 병합하고 이를 천자에게 보고하였다. 천자는 공손수를 처형해 버렸다.
  좌장군은 병합된 군사로서 조선을 급히 공격하였다.
  조선의 재상 노인과 한음, 이계의 재상 삼과 장군 왕겹 등이 모의하기를 "처음에 우리는 누선장군에게 항복하려고 했었는데. 누선장군은 지금 갇혀있고 좌장군이 혼자 양쪽 군사를 거느리고 있어 우리가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을 것이니 전투상황이 매우 급하고 공포스럽다. 왕(우거왕)은 항복하는 것에 대하여 긍정적이지 못하다" 하고는 한음과 왕겹, 노인은 도망하여 한나라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 죽었다.
  원봉 3년(B.C.108) 여름에 이계의 재상 삼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한나라에 투항하여 왔다.
  그러나 왕검성은 아직도 함락되지 않고, 우거의 대신인 성이(成已)가 한나라군을 다시 공격하였다.
  좌장군 순체는 항복한 우거의 아들 장(위장)과 재상 노인의 아들 최로 하여금 백성들을 회유하여 성이를 죽이도록 함으로써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는 4군으로 만들었다.
  삼을 홰청후에, 한음을 적저후에, 왕겹을 평주후에, 장을 기후(幾候)에 봉하였다. 최는 그 아버지가 죽었고 또 공이 있다고 하여 온양후로 봉하였다.
  좌장군은 소환되어 공을 다투고 서로 시기 질투하고 모략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어 목이 잘려 저자거리에 매달렸다.
  누선장군 역시 열구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좌장군을 기다려야 했는데도 기다리지 않고, 멋대로 먼저 공격하여 많은 병사를 잃었다는 죄목으로 응당 처형되어야 했으나 속죄금을 물고 서민으로 강등되고 말았다.』

 

  이상은 사마천의 사기 조선전 전문인데, 위만조선의 건국에서부터 멸망까지의 과정을 요약하여 기록하고 있어 위만조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이 기록 속에는 위만이 연나라로부터 도망쳐 패수(浿水)를 건너 고조선으로 망명한 후 준왕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아 스스로 왕위에 올라 왕험성(王險城 : 왕검성)에 도읍하고, 주변국을 복속시켜 사방 수천리에 이르는 강역을 차지하게 되는 과정과, 한 무제가 보낸 육군인 순체와 수군인 양복이 위만조선을 침공한 공격루트가 잘 기록되어 있어 위만조선의 도읍인 왕험성(왕검성)의 위치를 찾을 수 있게 한다.
  사실 우리는 지금 이 위만조선의 도읍 왕험성(왕검성)의 위치를 아직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데, 만약 위만조선의 도읍인 왕검성의 위치를 확실하게 찾는다면 그곳이 바로 왕검조선의 단군들이 도읍했던 왕검성일 것이고, 준왕이 위만에게 빼앗겼던 왕검성일 것이며, 전한낙랑군의 치소이고, 또 고구려의 평양성, 고려의 서경일 것이기 때문에 우리 상고사와 고대사의 중심점을 알 수 있어 지금까지 우리 역사와 관련하여 어디를 말하는지 아리송하기만 했던 옛 기록 속의 산과 강 그리고 각 지명들과 성들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한반도 북한 평양을 왕검성으로 인식함으로써, 한반도 북부에 위만조선이 위치했었고, 한반도 남부에 삼한이 위치했으며, 삼국과 고려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한 무제가 한반도 북부에 위치하고 있었던 위만조선을 침공할 때 육군인 순체는 지금의 요하 동쪽인 요동을 출발하여 북한 평양을 향하여 진군했고, 수군인 양복은 산동반도를 출발하여 동쪽으로 항해하여 황해바다를 건너 대동강을 타고 올라왔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런데 위 사기 조선전에는 수군인 양복이 황해바다를 건넌 것이 아니라 발해에 배를 띄웠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산동반도에서 한반도를 향해서 항해하려면 당연히 황해(서해)를 건너야 하는데, 왜 양복은 발해에 배를 띄워야만 했던 것일까?
  또한 육군인 순체는 요동을 출발하여 왕험성(왕검성)으로 가기 위해 패수 서쪽에서 동쪽의 조선군을 공격하여 간신히 격파하고 패수를 건너 왕험성의 서북쪽을 포위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한반도의 지리적 상황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내용들이다.
  왜냐하면 육군인 순체가 패수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공격해 들어갔다는 것은 패수가 북쪽에서 남쪽 방향으로 흐르는 강이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인데, 지금 평양을 지나는 대동강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 서해바다로 들어가고 있어 사기 조선전 기록 속 패수의 흐름과 방향이 맞지 않고, 또 지금 평양성은 대동강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순체가 지금의 요동을 출발하여 압록강을 건너고 청천강을 건너 왕험성(왕검성)을 공격하려 했다면 대동강을 건널 이유가 없는데 순체는 패수를 건너 동쪽으로 진군하여 왕험성(왕검성)의 서북쪽을 포위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기 조선전에서 언급되고 있는 왕험성(왕검성)은 지금의 북한 평양이라 할 수 없고 대동강을 패수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기 조선전에서 말하는 위만조선의 도읍 왕험성(왕검성)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이고, 육군인 순체가 출발했던 요동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이며, 수군인 양복은 산동반도에서 발해에 배를 띄워 어느 방향으로 항해하여 어느 강을 타고 올라가 왕검성의 남쪽에 도착했던 것일까?

 

한사군의 위치

 

 

낙랑군

 

  한 무제는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네 개 군으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소위 한사군이다.
  어느 사람은 사기 조선전에 한사군의 구체적인 명칭이 기록되지 않았고 한참 후세에 만들어진 전한서에 한사군의 구체적인 명칭이 언급되었다고 하여 실제 한사군은 설치된 적도 없는데 중국 사람들이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한사군이란 명칭을 억지로 만들어 전한서에 기록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솔직하게 이는 정말 말도 되지 않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사마천도 사기 조선전에 한사군의 구체적인 명칭을 기록하지 않았을 뿐 "조선을 평정하고는 4군으로 만들었다" 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평정하고 그 땅을 나누어 4개 군을 설치했다는 것을 사마천도 알고 있었지만 다만 사마천은 그 네 개 군의 구체적인 명칭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는 그를 기록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사마천은 사기를 지으면서 네 군의 구체적인 명칭은 적지 않고 다만 위만조선을 나누어 네 군으로 만들었다는 것까지만 기록했던 것이고, 전한서에서는 그 네 군의 이름을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토군이라고 구체적으로 기록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한사군이 지금의 어디에 설치되었었는지 아직까지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는데 있다.
  지금 우리는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설치되었다고 역사를 해석하며 낙랑군이 북한 평양 부근을 말하는 것이라고 인식한다.
  이는 우리가 지금 한반도에 살고 있어 우리의 고대 역사를 한반도를 중심으로 해석하려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의 역사가 왜곡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병도가 우리 고대역사를 왜곡했다고 욕을 많이 먹고 있으나 사실 우리의 역사는 이병도가 왜곡한 것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일제 강점기 훨씬 이전에 쓰여진 한치윤의 해동역사나 안정복의 동사강목 그리고 정약용의 아방강역고를 보면 이들은 우리의 모든 역사를 한반도를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는 일제 강점기 훨씬 이전인 조선시대에 이미 우리의 역사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정립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병도 역시 조선시대 사람들의 역사 인식을 뛰어 넘지 못하고 답습했을 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 사서들에는 한결같이 "낙랑군 수성현은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북한 평양 부근이 낙랑군이었다고 알고 있는 우리의 역사 인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낙랑군의 위치를 한반도 평양 부근이 아닌 하북성 부근으로 비정하고 그 부근에서 패수를 찾아야 하고, 왕험성(왕검성)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 진황도 서쪽을 흐르는 강은 난하라는 강인데, 바로 이 강이 우리 역사의 중심강인 패수(浿水)로 비정되는 강이고, 왕험성(왕검성) 역시 이 강의 동쪽 가까이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 되는데, 난하 중류에 위치한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 바로 왕험성(왕검성)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그렇다면 살수, 압록강, 요수는 지금의 난하 서쪽에서 찾아야 하고 요동군 역시 지금의 요하 동쪽 요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난하 서쪽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고, 한 무제의 명을 받은 수군의 양복이 평양성을 공격하기 위해 발해에  배를 띄웠다는 기록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이때 육군인 순체는 북경(필자주 : 이곳이 요동군이었다) 부근으로부터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향하여 동북쪽으로 행군했다는 말이고, 수군인 양복은 산동반도에서 발해를 서북쪽으로 가로질러 난하(필자주 : 이 강이 패수였다)를 타고 올라갔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일반적인 역사인식과는 아주 다른데,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지금까지 우리 고대 역사의 중심이 대륙이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왕험성(왕검성)도 찾을 수 없었고, 낙랑군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낙랑군은 전한낙랑군과 후한낙랑군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한 낙랑군은 기원전 108년에 설치되어 서기 37년까지 145년간 존속하다가 고구려 대무신왕의 침공을 받아 그 땅을 빼앗기고 멸망하게 된다.    그런데 그로부터 7년 후인 서기 44년에 후한의 광무제가 고구려를 침공하여 살수 이남 땅을 탈환하여 다시 낙랑군을 부활시키는데, 필자는 이를 후한낙랑군이라 부른다. 후한낙랑군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 일원을 말하는 것이고, 치소는 흥륭이었을 것이다.     
 
진번군과 임둔군

 

  진번군과 임둔군은 한사군의 두 군으로서 진번군은 후일의 맥국이고, 백제의 건국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며, 임둔군은 예(동예)와 관련 있는 군이다. 
  우리는 지금 대방군을 황해도라 하고, 진번군을 서울 부근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한사군이 한반도가 아닌 대륙의 난하를 중심으로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진번군 역시 난하 부근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기 조선전을 보면,
  위만이 기원전 194년에 준왕으로부터 왕험성(왕검성)을 빼앗아 왕위에 오른 후 "진번, 임둔도 복속해 왔으므로 땅이 사방 수천 리에 이르렀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왕험성(왕검성)이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었으므로 그 부근에 진번군과 임둔군도 위치했을 것이다.
  자치통감 권21 한기13 세종효무제 원봉 3년(B.C.108) 조의 주를 보면,
  "樂浪郡治朝鮮縣 蓋以右渠所都爲治所也
  臣瓚曰 茂陵書 臨屯郡治東暆縣去長安六千一百三十八里 領十五縣
  玄莵郡本高句麗也旣平朝鮮倂開爲郡治沃沮城 後爲夷貊所侵徙郡句驪西北
  眞番郡治霅縣去長安七千六百四十里 領十五縣 余據後廢臨屯眞番二郡"
  (낙랑군의 치소는 조선현으로서 우거가 도읍하고 다스리던 곳이다.
  신찬은 무릉서를 인용하여 말하기를, 임둔군의 치소는 동이현으로서 장안에서 6,138리 떨어져 있고 15개현을 다스렸다.
  현토군은 본래 고구려이다. 조선을 평정하고 군의 치소를 옥저성에 두었는데, 후에 이맥의 침략을 받아 군을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
  진번군의 치소는 잡현(삽현) 으로서 장안에서 7,640리 떨어져 있고 15개현을 다스렸는데 얼마 후 임둔과 진번 두 군을 폐했다고 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임둔봉니가 요녕성 금주(錦州市) 부근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봉니라는 것은 문서를 받은 곳에서 개봉하는 것이므로 금주 부근은 임둔군에서 보내온 문서를 받은 곳이지 그곳이 곧 임둔군이라 할 수는 없으나, 그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임둔군이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다. 

 

☆ 진번군은 북한산 북쪽에 설치되었던 군이고, 임둔군은 예(동예)의 땅에 설치되었던 군이다. 따라서 두 군에 대한 장안으로부터의 거리기록은 바꾸어 잘못 기록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진번군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진번군은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도산 북쪽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 땅은 원래 마한의 동북쪽에 해당하는 곳이었고, 상고시대 환국과 환웅국의 땅이었고, 진번국이었으며, 맥국이었던 곳이다.
   그 후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되는 과정에서 진번국은 진번군이 되었고, 그 중심지는 영성, 능원, 건평부근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임둔군은 지금의 내몽골 오한기, 고륜기 부근으로 비정되고, 후일 이 땅은 예(동예)가 되는데, 진번군과 임둔군은 기원전 82년과 기원전 75년에 폐지되고, 한사군 중 낙랑군과 현토군 두 군만 남게 된다.
  진번군과 임둔군을 폐지한 이유는 진번군은 맥국으로 독립했을 것이고, 임둔군은 동예가 차지하고 독립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후일에 이르면 마한의 동북쪽인 북한산(도산) 남쪽에서 백제가 건국되고, 호로도 금주(錦州)부근의 진한 땅에서 신라가, 변한 땅에서 가야가 건국되며, 졸본부여는 고구려가 된다.
  그리고 낙랑군의 남쪽에는 대방군이 설치되기도 하는데, 대방군의 위치는 지금의 북경 동쪽 우교수고, 준화 부근으로 비정된다.

 

현토군

 

  현토군은 기원전 108년에 설치된 다른 세 군보다 1년 늦은 기원전 107년에 설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는 위만조선이 왕검성을 함락 당한 후 동옥저를 근거지로 하여 한나라에 투쟁함으로써 그 잔여세력을 완전히 평정하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현토군은 원래 옥저성(동옥저)에 치소를 두었는데, 지금의 내몽골 옹우특기 부근으로 비정된다. 그러다가 기원전 82년과 기원전 75년에 이르러 진번군과 임둔군이 폐지되자 한나라는 국경 방어에 구멍이 생기게 된다.
  그러자 한나라에서는 현토군의 관할지역을 낙랑군에 이관하고 치소를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겨 동부여와 졸본부여의 방어를 담당하게 되는데, 이때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긴 현토군의 치소는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회안성진 부근으로 비정된다.
  그리하여 이 현토군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고구려, 동부여와 많은 접촉 기록을 남기게 된다.

 

낙랑동부도위

 

  후한서 예전을 보면, "소제 시원 5년(B.C.82)에 이르러 임둔과 진번을 폐지하여 낙랑과 현토에 병합했다. 현토를 다시 구려로 옮겼으며 단단대령 동쪽의 옥저와 예(동예), 맥은 모두 낙랑에 속하게 하였다. 뒤에 그 지역이 넓고 멀어 다시 단단대령 동쪽 일곱 개 현을 나누어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동옥저전에도,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 땅으로 현토군을 만들었다. 뒤에 이맥의 침략을 받아 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옥저를 현으로 고쳐 낙랑의 동부도위에 속하게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 역사적 사실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낙랑군의 치소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낙랑동부도위란 승덕시의 동쪽 방향에 설치했을 것이다.
  예(동예)는 지금의 내몽골 오한기, 고륜기 일원을 말하는 것이고, 동옥저는 내몽골 옹우특기 일원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되므로 결국 단단대령이란 지금의 칠로도산을 말한다고 할 수 있는데, 지리적 상황을 감안하여 생각해보면, 기원전 82년에 이르러 어쩔 수 없이 현토군과 진번군의 남은 땅을 이관 받자 낙랑군에서는 그곳이 높은 산맥인 칠로도산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직할 통치가 어렵다고 보고 옛 관할지였던 7개 현을 별도로 관할하는 낙랑동부도위를 새로이 설치하고 치소를 불내성(불이성이라고도 한다)에 두어 다스리게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다가 이 낙랑동부도위는 서기 30년에 이르러 고구려 대무신왕의 침공을 받아 고구려에게 그 땅을 빼앗기게 되어 폐지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