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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왕검성(王儉城)" 그곳은 과연 지금의 어디인가?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6. 15. 22:08

윤여동설 - "왕검성(王儉城)" 그곳은 과연 지금의 어디인가? - 최초주장

 

 

                               

 

우리 역사 5천년의 중심지 왕검성의 위치

 

  왕검성(王險城)이란 고조선의 두번째 도읍의 이름이다.

  첫도읍은 우수하지원의 아사달, 세번째 도읍은 백악산의 아사달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고조선의 도읍들의 위치를 잃어버렸는데, 
 

  우리는 어떻게 하든 고조선의 도읍들과 특히 이 왕검성을 꼭 찾아내야만 한다.
  우리가 이 왕검성의 위치를 꼭 찾아야 하는 것은 이곳이 바로 우리 한민족 5천년 역사의 마음의 고향이기 때문이고, 고구려의 평양성, 고려의 서경으로 이어져 우리의 고대 강역을 밝힐 수 있는 중심점이기 때문이다.
  고조선은 크게 왕검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나눌 수 있는데, 왕검조선은 기원전 2333년 건국되어 기원전 1122년까지 47명의 단군들이 1212년 간 다스린 나라였고, 기자조선은 주 무왕 즉위 원년 기묘년 즉 기원전 1122년부터 기원전 194년까지 929년 간 존속했다고 하며, 위만조선은 기원전 194년부터 기원전 108년까지 87년 간 존속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108년 한 무제에게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되어 우리 고대 강역의 많은 부분이 한(漢)나라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된다.

 

 ☆ 사서들에는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이 기자의 41대손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기자조선의 중심위치나 강역의 크기 그리고 실제 몇 명의 왕대로 이어졌는지는 확실히 전해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준왕이 기자의 41대손이라는 기록을 보고는 기자조선이 41명의 왕대로 이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나 왕위에 올라 있던 그 아버지보다 일찍 죽어 왕위에 오르지 못하는 아들도 있을 수 있고, 형제간에 왕위를 잇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므로 단지 준왕이 기자의 41대손이라고 하여 기자조선이 41명의 왕대로 이어졌다고 확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앞서 천년 제국 왕검조선이 쇠하자 그 땅은 조선, 부여, 숙신, 예, 맥, 옥저, 마한, 진한, 변한 등으로 나누어져 열국시대가 되는데, 왕검성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부여, 서북쪽에는 예, 동북쪽에는 동옥저와 숙신, 동쪽에는 진번국과 임둔국, 동남쪽에는 진한과 변한이, 남쪽에는 마한이 위치했으며, 서남쪽에는 요동이 위치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고조선 멸망 후 열국의 위치]
                                            
                                 개마              숙신
                예                        
                                                                     옥저
                                                      
                                                                             임둔국
         

      부여                  왕검성               진번국      
                                (조선)
      구려                                           

 

          요동                                                            진한

 

                                마한                          변한 
  
  그러다가 위만이 왕검성을 차지하고 왕위에 오름으로써 위만조선이 되고,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쳐 멸망시키고, 그 땅을 네 조각으로 나누어 한사군을 설치함으로써 왕검성은 졸지에 일국의 수도에서 낙랑군의 치소로 전락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옛 사서들은 우리 역사의 중심점인 왕검성의 위치에 대하여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한서 권28하 지리지 제8하 요동군 조를 보면, 요동군이 진나라 때 설치했고 유주(幽州)에 속한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유주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왕검성(중국 기록에는 왕험성이라 했다)에 대하여,
  "臣瓚曰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신찬은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라고 주를 달아 놓았고,
  사기 권115 조선열전 제55를 보면,
  조선을 설명하면서 "括地志云 高(句)麗都平壤城 本漢樂浪郡王險城 又古云朝鮮地也(괄지지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으로서 본래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이라 했고 또 옛 조선의 땅이라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옛 왕험성(왕검성)이 곧 낙랑군의 치소였고, 후대 고구려의 평양성임을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왕험성이 곧 위만이 고조선의 준왕으로부터 빼앗아 도읍했던 왕검성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곳이 일반적인 중국 성들처럼 평평한 평지에 쌓은 성이 아니라 강도 흐르고 산세도 험한 곳에 위치했으며, 한나라 때의 낙랑군 땅을 경유해 흐르던 패수(浿水)의 동쪽에 위치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패수(浿水)는 지금의 어느 강을 말하는 것일까?
  근세 조선시대 학자들은 대개 지금 북한 평양을 지나는 대동강을 패수라고 인식했는데, 이는 조선시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양부 산천조에 대동강을 일명 패강(浿江)이라고도 하고 왕성강이라고도 한다고 기록해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팔도총도에는 대동강의 상류를 평양강, 중류를 구진약수라고 다르게 기록하고 있고, 하류에 아사진을 표기해 놓고 있다.

 

 
  그런데 수경에는 패수에 대하여 "浿水出樂浪鏤方縣東南過於臨浿縣東入於海(패수는 낙랑 누방현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패수가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강임을 알 수 있는데, 지금 북한의 대동강은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서해바다로 들어간다.
  수경에서 말하는 패수는 동남쪽으로 흐르는 강인데 비해 대동강은 서남쪽으로 흐르는 강으로서 강물의 흐름이 반대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하북성 진황도 서쪽으로는 난하라는 큰 강이 흐르고 있는데,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흘러 발해로 들어간다.
  지금 난하는 하북성 장가구시와 승덕시의 경계에 위치한 동후정(東후頂:해발2,293m)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장가구 고원(沽源)을 지나 내몽골 정남기를 지나고 다륜 동쪽을 지나 동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승덕시 곽가둔에서 소난하와 합류하고, 승덕시 서쪽 쌍난에서 이손하와 합류하며 승덕시 남쪽에서 다시 무열하와 합류하고, 승덕현에서 노우하와 합류하고, 흥륭 부근에서 발원한 유하와 합류하고 또 평천 부근에서 발원한 폭하와 합류하여 반가구수고로 들어가 만리장성을 끊으며 흘러 당산시 천서를 지나고 천안을 지나고 진황도 노룡 부근에서 청룡하와 합류하여 창려 서쪽을 지나 동쪽으로 물길방향을 돌려 발해로 들어가는데, 수경에서 말하는 패수는 바로 이 난하의 흐름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왕검성(왕험성)은 바로 이 난하의 동쪽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된다.

 

 

 

   수서 고(구)려전을 보면, "도읍은 평양성으로서 장안성이라고 하는데, 동북이 6리이고 산의 굴곡을 따라 쌓았으며 남쪽으로는 패수에 닿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한서지리지와 수서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패수는 왕험성(왕검성)의 서쪽과 남쪽을 지나 흐르는 강이라는 말이 되고, 왕험성은 산의 굴곡을 따라 쌓은 구불구불한 성으로서 성 내부가 매우 넓은 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난하 동쪽 가까이에서 이러한 지리적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위치와 규모에 알맞은 성을 찾으면 그 성이 바로 왕검성(왕험성)인 것이다.

 

☆ 어느 사람은 사기 조선전 집해 서광의 말 즉 "昌黎有險瀆縣也(창려는 험독현에 있다)"라는 기록을 인용하여 험독이 곧 왕검성으로서 지금의 진황도 창려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이는 창려가 험독현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지 험독이 곧 창려라는 말은 아니고, 지금의 진황도 창려는 바닷가에 너무 가까이 치우쳐 있어 대제국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의 위치로는 적당치 않고 사서들의 기록을 충족하지 못한다. 그리고 험독은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해 와서 처음에 고조선의 서쪽 국경 부근에서 살 때의 치소였던 곳이지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왕험성)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중국 하북성 승덕시에는 청나라 황제들의 여름 궁전으로 사용했던 피서산장(열하행궁)이 있는데, 산의 굴곡을 따라 성을 쌓았고, 내부면적이 170만평에 이를 정도로 매우 큰 성이며, 성 내부에 커다란 호수와 산이 있어 풍경도 아름답고 여름철에는 시원하여 청나라 황제들은 북경의 무더위를 피해 이곳으로 와서 여름철을 지냈는데,  승덕시 피서산장의 서쪽과 남쪽으로 바로 이 난하가 지난다.
  중국 사서들에 기록된 왕험성(왕검성)의 위치와 성곽의 형태, 규모 등이 유사한 곳이다.
  기원전 108년 한 무제는 순체와 양복으로 하여금 위만조선을 침공하게 했는데, 육군을 이끄는 순체는 요동에서 출발하게 하고, 수군을 이끄는 양복은 제(현 산동반도)에서 발해에 배를 띄우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까지 우리는 수군인 양복이 위만조선을 침공하면서 왜 발해에 배를 띄웠다고 기록되어 있는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위만조선의 도읍인 왕검성(왕험성)이 지금의 북한 평양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라면 당연히 산동반도에서 배를 띄워 서북쪽으로 발해를 가로질러 건너 난하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따라서 지금의 난하가 패수라면 그 서쪽에서 살수를 찾아야 하고, 압록강, 요수도 찾아야 하며 요동의 위치도 새로이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는 고대의 요동이 지금의 요하 동쪽이 아니라 영정하 동쪽인 북경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고, 그곳에 요수(지금의 영정하)가 흐르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요동 동쪽 1천여리에 고구려와 백제가 위치하고 있었다는 중국 사서들의 기록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까?  
  자,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우리의 상고, 고대 역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