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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王儉城)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11. 26. 07:19

윤여동설 -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王儉城)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 - 최초주장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 왕검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경에는 무엽산이라 했고, 또는 백악이라고도 하는데 백주에 있었다)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 했는데, 고(요임금)와 같은 시대였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단군왕검은) 당고(당요) 즉위 50년 경인(당요즉위 원년은 무진년이므로 50년은 정사년이지 경인년이 아니다. 아마 사실이 아닐 것이다)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에 도읍하고 조선(朝鮮)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는데 궁홀산(일명 방홀산이라고도 한다) 또는 금미달이라고도 했다. 그 나라는 1,500년 간 존속했다.

   주 호왕(무왕) 즉위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로 돌아와 은거하다가 산신이 되었다. 1,908세까지 살았다."

 

  필자는 앞글에서 환인국의 중심지는 중국 하북성 칠로도산 부근, 환웅국의 중심지는 요녕성 노로아호산 부근일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환웅국의 뒤를 이은 왕검조선(고조선)의 중심지는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왕검조선의 첫 도읍에 대하여 두 가지 설을 제기하고 있다.
  하나는 "위서(魏書)"의 기록을 인용하여 아사달이 고조선의 첫 도읍이라 하였고,

  또 하나는 "고기(古記)"의 기록을 인용하여 첫 도읍은 평양성, 두 번째 도읍은 백악산 아사달(궁홀산·금미달), 세 번째 도읍은 장당경, 네 번째 도읍은 아사달로 기록하고 있다.
  중국 기록인 위서는 아사달을 고조선의 첫 도읍이라 한데 반해서 우리 기록인 고기는 아사달을 마지막 도읍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둘 중에 하나는 오기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왕검조선의 도읍은 일반적으로 왕검성(후일의 고구려 평양성)으로 전해지고 있고, 위만이 준왕으로부터 그곳을 빼앗아 다시 도읍으로 사용했으며, 한사군 때 낙랑군의 치소로 사용되었고 고구려가 그곳을 차지한 후 다시 고구려의 평양성이 되었고, 후일에 이르러 고려의 서경이 되었다고 하는 곳이다. 
  중국 사서들에는 왕검성이 아닌 왕험성(王險城)으로 기록되고 있는 곳인데, 우리는 지금 그 왕검성의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하고, 북한의 평양이 옛 왕검조선,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후대 한사군 때 낙랑군의 치소가 어디였는지, 고구려의 평양성이 과연 어디였는지를 찾을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왕검성일 것이고, 부근이 왕검조선의 중심지였을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 조선전에는 도읍 왕험(왕검성)에 대하여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 요동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 라고 설명되어 있어 매우 헷갈린다. 

  험독현이 요동군에 있다고 했다가 왕험성이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창려(昌黎)라는 곳은 한반도 평양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 곳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난하 하류 동쪽 진황도에 위치하고 있다.
  사기의 기록대로라면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 부근에 낙랑군이 위치하고 있었고, 왕검성(왕험성)이 그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역사의 중심지가 한반도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중국 하북성 진황도 부근이라는 말이 된다. 
  어찌된 일일까?
  우리는 지금까지 한반도의 북한 평양이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 낙랑군의 치소,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이라고 배웠고, 대동강을 패수라고 배웠는데, 사기에는 엉뚱하게도 발해건너 진황도 부근에 왕검성이 위치하고 있었고, 낙랑군이 있었고, 고구려의 평양성이 있었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진황도에 가면 지금까지도 고려성(高麗城)이라 부르는 옛 성들이 몇 군데 남아 있고, 그 부근에서는 진나라 때 또는 한나라 시대의 유적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고, 도읍산이라는 의미의 도산(都山), 할아버지 산이라는 의미의 조산(祖山)이 있고, 특히 우리 역사를 찾는데 어쩌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갈석산(碣石山)이라는 이름의 산도 있고, 만리장성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고조선이 멸망하고 위만조선(衛滿朝鮮)과 한(韓)이 남북으로 위치했다가 북쪽의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되었고, 남쪽 한의 서쪽 지역은 마한이었고, 마한의 동쪽에 진한이, 진한의 남쪽에 변한이 위치했었으며, 마한 땅의 동북쪽 지역에서 백제가 건국되었고, 진한 지역에서 신라가 건국되었으며, 변한 지역에서는 가야가 건국되었다.
  그런데 중국 사서들은 한결같이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또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 신라의 서쪽에 백제가 위치하고 있었으며, 신라, 백제의 북쪽에 고구려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지금의 진황도 부근이 옛 진한과 변한 지역이었다는 말이고, 그 서쪽인 지금의 당산지역이 옛 마한 지역이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왕검성은 위만조선의 도읍으로서 북쪽에 위치했었고, 한사군이 설치되자 낙랑군의 치소로 사용되었으므로 이 왕검성은 삼한 지역의 북쪽 지역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 중국 하북성 승덕시에 가면 피서산장(열하행궁)이라 부르는 커다란 성이 있다.
  성의 내부 면적이 170만평에 이를 정도로 대단히 넓은 성이다.

  물론 지금은 그 성이 청나라 때 신축되어 청나라 황제들이 북경의 무더위를 피하기 위하여 여름철에 북경의 자금성을 떠나 이곳 승덕시의 피서산장(열하행궁)으로 와서 한 여름철을 지낸 후 날씨가 시원해지면 다시 북경으로 돌아갔다고 하여 열하행궁 또는 피서산장이라고도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사실 이 곳이 바로 고조선의 왕검성, 낙랑군의 치소, 고구려의 평양성, 고려의 서경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역사적으로 이곳 왕검성을 차지하는 나라는 예외없이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
  고조선이 그랬고, 위만조선이 그랬으며, 고구려가 그랬고, 발해가 그랬으며, 고려가 그랬고, 청나라가 그랬다.
  그곳은 북쪽으로는 내몽골, 몽골의 고원 초원지대로 뻗어 나아갈 수 있는 길목이고, 남쪽으로는 당산, 진황도를 지나 발해로 진출할 수 있으며, 서남쪽으로는 연산산맥이 병풍 두르듯 높고 길게 뻗어 있어 중국세력의 침공을 방어하기 좋으며, 동쪽으로는 요하를 건너 드넓은 만주벌판을 지배할 수 있는 지리적 요충지이다.  
  옛날 고조선의 단군들은 바로 이러한 명당에 자리잡고 수천년간 천하를 호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곳이 옛 왕검성이었음을 잃어버리고는 필자가 수십번, 아니 수백번 그 부근이 우리 역사의 중심지인 왕검성이었다고 말해 줘도 잘 믿으려 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필자가 지금까지의 역사 상식을 잠시 접어두고 속는 셈치고 필자의 주장에 따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고조선의 왕검성으로 비정하고 역사를 다시 해석해 보라고 권유해도 아직까지 그것을 연구하여 논문을 발표한 학자는 없는 듯하다.

 

☆ 지금의 요하 서쪽인 요녕성 의무려산 부근과 내몽골 적봉 홍산 부근이 우리의 고조선 역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여럿있고, 갈석산이 있는 진황도 창려가  왕검성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도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 고조선의 왕검성이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오직 필자 혼자 뿐인데, 왜 필자에게만 그 부근이 왕검성으로 보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곳이 왕검성으로 보이지 않는 것일까?
  필자가 보기에는 그곳에 청나라의 역사가 덧씌워져 있어 그 내면을 잘 볼 수 없기 때문이라 판단되고, 우리가 지금 한반도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 고대 역사의 진실을 찾으려면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발상의 전환인데,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 발상의 전환을 하지 못해 생각 자체가 한반도를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의 생각이 모자란 것은 모르고, 역사의 진실도 모른 채 김부식이 어쨌고, 일연이 어쨌다고 그들을 비난하기에 바빠 지금 우리 역사에 정설은 없고 가설만이 난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삼국사기는 비교적 정확한 기록이고, 삼국유사도 우리 역사의 보물창고이다.

  어설픈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비난받아야 할 책들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