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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위만의 고조선으로의 망명로와 왕검성 공격로 - 최초주장

윤여동 2015. 8. 9. 11:09

윤여동설 - 위만의 고조선으로의 망명로와 왕검성 공격로 - 최초주장

 

 

 

  삼국지 한() 전을 보면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해오는 과정과 왕검성을 탈취하는 과정을 위략의 기록을 인용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를 보면, “위략에 이르기를,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는 주()나라가 쇠약해지고, ()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을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 역시 스스로 왕을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역격하여 주왕실을 보존시켜 주려고 하였으나 그의 대부 예()가 간하므로 중지하였다. 그리고는 예를 파견하여 서쪽의 연나라를 설득하니 연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조선(朝鮮 : 고조선)을 침공하지 않았다.

  그 뒤에 자손이 점점 교만해지고 포악해지자 연나라는 장군 진개를 보내 조선의 서쪽지방을 침공하여 2천여리를 빼앗아 만번한(滿番汗)을 경계로 삼자 조선이 약해졌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遼東)에 이르자 이때 조선왕 부()가 왕위에 올라 있었는데, 진나라의 습격을 두려워하여 정략상 진나라에 복속하는 체 하였으나 조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부가 죽고 그 아들 준(: 준왕)이 왕위를 이었다.

  그 후 20여년이 지나 중국에서 진승과 항우가 기병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 (), ()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점점 준왕에게 망명해 오자 준왕은 그들을 고조선 서쪽지역에 살게 하였다.

  한()나라 때에 이르러 노관으로 연왕을 삼으니, 조선과 연나라는 패수(浿水)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이때 패수가 고조선과 연나라의 국경이었다는 것은 오기로 보이고, 요수를 국경으로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해 온 후 자리잡은 곳이 요동군 험독현이었는데, 요동군이란 요수의 동쪽에 위치한 군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노관이 한()나라에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한 뒤 연나라 사람 위만도 만이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왕에게 투항하고는 서쪽변방에 살게 해주면 중국의 망명자들을 모아 조선의 번병이 되겠노라고 준왕을 설득하였다. 준왕은 그를 믿고 총애하여 박사에 임명하고 규를 하사하며, 백리 땅을 봉해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이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준왕에게 보내 속여 말하기를, “한나라 군대가 열군데 길로 쳐들어오고 있으니 왕궁에 들어가 숙위하기를 청합니다하고는 드디어 창끝을 돌려 준왕을 공격하였다. 준왕은 위만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게 하는데, 이때 고조선의 준왕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있다가 졸지에 왕검성을 위만에게 빼앗기고는, 근신들과 좌우 궁인들을 이끌고 도망쳐 마한의 월지국에 이르러 다시 한왕에 오르게 되는데, 이후 위만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원래 위만이 살았던 연()나라는 지금의 어디 부근이었으며, 위만은 어느 길을 따라 고조선으로 망명했으며, 망명한 뒤에는 고조선의 서쪽 어디쯤에서 살다가 왕검성을 공격하여 빼앗아 조선의 왕위에 올랐던 것일까?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었고, 연나라의 도읍 연경(燕京)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역현(易縣) 부근을 말하는 것이며, 옛 요동은 지금의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해 와서 처음에 살았던 곳은 요동군 험독현(險瀆縣)으로서 지금의 북경 부근이었을 것인데, 옛 요수였던 영정하 부근이 아닐까 싶다. [필자는 북경 남쪽 영정하 동쪽에 험독현이 위치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랬다가 세력이 점점 강해지자 역심이 발동하여 고조선의 준왕이 오갈데 없는 저에게 베풀어준 은혜를 배반하고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에 위치하고 있던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중국 사서에는 왕험성(王險城)이라 기록되어 있다]을 빼앗아 준왕을 내쫓고 고조선의 왕위에 오르는 것인데, 역사에서는 이를 위만조선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 사건은 지금의 북경 부근에서 일어났던 사건이었지, 한반도 평양 부근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한서 권28하 지리지 제8하 요동군 조를 보면, 요동군의 속현으로 양평, 신창, 무려, 망평, , 후성, 요대, 요양, 험독(險瀆), 거취, 고현, 안시, 무차, 평곽, 서안평, , 번한, 답씨가 기록되어 있고, 그 중의 한 개 현이 바로 험독현이었는데, 험독현은 응소의 말을 인용하여 조선왕 만의 도읍이었고, 물에 의지하여 험했기 때문에 험독이라 한다고 설명되어 있고 또 후한서 지제23 군국5를 보면, 요동속국에 험독(險瀆)이 포함되어 있는데, 요서와 근접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결국 험독현은 당시의 요동군과 요서군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