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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조선과 연나라의 국경 만번한은 지금의 어디일까 - 최초주장

윤여동 2009. 8. 6. 18:50

윤여동설 - 고조선과 전국시대 연나라의 국경이었던 만번한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밀운수고 부근 - 최초주장

 

 

 

  삼국지 한(韓) 전을 보면 위략(魏略)의 기록을 주로 달아 놓았는데, 그 기록을 보면,

『위략에 이르기를,

  옛날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가 있었다. (昔箕子之後 朝鮮侯)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연나라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동쪽을 공략하려 하였는데, 조선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주 왕실을 존속시켜주기 위하여 거꾸로 연나라를 공격하려고 하다가 그 대부인 예가 간하여 중지하고, 예로 하여금 서쪽의 연나라를 설득하니 연나라도 중지하고 공격하지 않았다.

  후에 (조선후의) 자손들이 점점 교만하고 포학해져 연나라가 드디어 장수 진개를 보내 그 서쪽을 공격하여 2천여 리(필자주 : 사기 흉노전에는 1천여리라 기록되어 있다)를 빼앗고, 만번한(滿番汗, 滿潘汗이라 하기도 한다)을 경계로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이 점점 약해졌다.     

 진나라가 천하를 병합하고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게 하기 위하여 요동에 이르렀을 때 “조선왕 부(否)”가 왕위에 올랐는데, 진나라가 습격할까 두려워하여 복속하는 체 했으나 조회에 참석하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지 않았다.

  부가 죽고 그 아들 “준(準)”이 왕위에 오른  20여년 만에 진항(陳項: 진승과 항우)이 일어나 천하가 혼란해지자 연나라·제나라·조나라 백성들이 고역을 피하여 점점 준에게로 도망하여 가자 준이 (나라의) 서쪽에 배치했다.

  한(漢)나라는 노관을 연나라의 왕으로 삼고, "요수(遼水)"를 조선과 연나라의 경계로 삼았다.  

 

★ 위 위략 본문 중의 "요수"는 원문에는 패수(浿水) 또는 추수(溴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패수나 추수 모두 요수(遼水)의 오기임이 확실하므로 필자가 고친다.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연나라 사람 위만도 망명하여 호복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왕에게 투항하고 준왕을 설득하여 서쪽 경계에 거처를 구했다.

  그리고는 중국으로부터 망명해오는 사람들을 받아들여 조선의 번병이 되었다.

  준왕이 매우 신임하고 총애하여 박사로 임명하고, 백리 땅을 영지로 주어 서쪽 변방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위만이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 거짓말로 고하기를, "한나라 병사들이 열 군데 길로 쳐들어오고 있으니 대궐로 들어가 왕을 호위해야 합니다" 라고 하고는 곧 돌변하여 준왕을 공격했는데, 준(준왕)이 만(위만)과 전투를 벌였으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고조선이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의 진개에게 2천여리(또는 1천여리)를 빼앗기고 만번한(만반한이라고도 한다)을 국경으로 삼았다는 기록 속 “만번한”의 위치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지 밝히지 못하고 있었다. 

  만번한의 위치를 밝히기 전에 먼저 위만조선의 도읍이었으며, 우리 역사의 중심점인 왕검성의 위치를 찾아 볼 필요가 있는데, 왕검성을 찾기 위해 우선 패수에 대한 기록부터 검토해 보자.  

  왜냐하면 왕검성이 패수의 동쪽 가까이에 바로 위치했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패수(浿水)에 대하여 수경(水經)에는,

  "패수는 낙랑 누방현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浿水出樂浪鏤方縣東南過於臨浿縣東入於海)"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는 지금 북한 평양을 지나는 대동강을 패수라고 인식하고 하고 있다.

  그렇지만 수경에는 패수가 동남쪽으로 흘러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는데, 지금 북한의 대동강은 서남쪽으로 흘러 평양을 지나고 서쪽으로 서해바다로 흘러 들어가므로 수경에서 말하는 패수와 북한 대동강의 흐름은 방향이 전혀 다르다.

  패수는 지금의 난하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위만조선이 한반도 평양에 도읍하고 북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나라가 아니라 사실은 지금의 북경 동쪽 난하(패수)를 중심으로 사방 수 천리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나라였다는 말이 되고,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도 난하의 동쪽에 바로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위만조선의 전신은 고조선이었고, 위만은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을 그대로 도읍으로 사용하였으니 고조선 역시 바로 이 난하를 중심으로 대제국을 이루고 있었을 것이고, 그 도읍 왕검성은 난하의 동쪽에 바로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발해에서 난하를 타고 올라가 반가구수고를 지나 계속 올라가면, 중국 하북성 승덕시에 이를 수 있는데,지금 전해지고 있기는 청나라 때 청나라 황제들이 북경의 무더위를 피하기 위한 행궁으로 청나라 때 신축되었다고 하는 열하행궁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연나라가 북경에 도읍하고 지금의 요하 서쪽 지역까지를 차지하고 있던 나라라고 인식하고 있으나 사실 연나라의 중심 강역은 지금의 하북성 남부 지역이었다.

  그렇다면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중심으로 위치하고 있던 고조선과 하북성 남부에 위치했던 연나라와의 국경은 그 중간지역인 지금의 영정하 부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조선이 강할 때는 서쪽, 서남쪽으로 더 진출했을 것이고, 연나라가 강해지면 동쪽, 동북쪽으로 진출했을 것이다. 두 나라는 국경을 접하고 밀고 밀리며 역사를 이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동이족은 요수의 동쪽에 위치했던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수경에는 요수(遼水)에 대하여,

  "대요수는 요새밖 백평산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요새로 들어가 그곳을 통과하여 요동 양평현 서쪽을 지나고, 또 동남쪽으로 흘러 방현 서쪽을 지나고, 또 동쪽으로 안시현(안평현의 오기) 서남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또 원토(현토) 고구려현에 요산이 있고 소요수가 발원하는데, 서남쪽으로 흘러 요대현에 이르러 대요수로 들어간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중국 사람들이 말하는 "새(塞)"란 일반적으로 만리장성을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수경의 기록에는 요수가 새(장성)를 끊고 흐르는 강이라고 기록되어 있는것이다.

  요수는 만리장성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 중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 되는데, 지금 양하, 관청수고, 영정하로 이어지는 강줄기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만번한(滿番汗)의 위치를 찾아보아야 하는데, 지금까지 그 만번한의 위치가 밝혀지지 못했던 것은 만번한(만반한이라고도 한다)이라는 지명의 유래나 위치가 구체적으로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혹시 만번한(滿番汗)이라는 의미가 만이 번현의 칸(한)으로 있던 곳이라는 의미는 아닐까? 즉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한 후  준왕으로부터 사방 백리 땅에 봉해졌던 곳이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한서 요동군 조를 보면,

  "요동군은 진나라가 설치했다.[필자주 :사실은 전국시대 연나라가 설치했다]  

   유주에 속했다. 59,972호이고, 인구는 272,539명이다.

  18현인데, 양평, 신창, 무려(서부도위치소), 망평, 방, 후성(중부도위치소), 요대, 요양, 험독(險瀆), 거취, 고현, 안시, 무차(동부도위치소), 평곽, 서안평, 문(文), 번한(番汗), 답씨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험독은 위만이 기원전 195년에 고조선으로 망명해 와서 준왕으로부터 고조선 서쪽 변경 사방 백리 땅을 영지로 받은 후 설치한 치소였다.

 지금의 북경 일원이 옛 요동군이었고, 이 요동군이 바로 고조선과  전국시대 연나라의 접경지역이었다. 

  

  위만은 기원전 195년에 노관이 흉노로 망명해 가버리자 무리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향하여 고조선의 준왕에게 망명했는데, 이때 그는 준왕에게 나라 서쪽변경에 살게 해주면 국경을 지키는 번병이 되겠노라 맹세했기 때문에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을 총애하여 그에게 벼슬을 내려주고, 나라 서쪽 변경 사방 백리 땅을 영지로 내려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위만은 그곳에서 살면서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 유민들을 끌어 모아 세력이 강해지자 배은망덕하게도 오갈 데 없는 자신을 받아 주고, 벼슬과 영지까지 내려준 고조선의 준왕을 배반하고 도읍인 왕검성을 공격하여 빼앗은 후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고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전국시대에는 고조선과 연나라의 국경이 만번한이었고, 진나라를 지나 한나라 때에 이르자 고조선과 연나라의 국경은 요수(遼水)가 된다.  

  전한서의 기록을 보면, 진나라가 멸망하고 한나라가 서자 옛날 춘추전국시대로부터 진나라 때까지 연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만번한(만반한) 지역이 너무 멀어 지키기가 어렵다 하여 요동의 옛날 요새를 수리해서 쌓고 국경을 삼아 그 땅을 연나라에 소속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한나라가 만번한에서 요수로 국경을 후퇴시켜 정했다는 말이다.

  이는 진나라 말기 또는 한나라 초기에 그 만번한 땅을 이미 고조선에게 다시 빼앗겼다는 말일 것이므로 한나라와 고조선은 요수를 국경으로 삼았을 것이고, 후대에도 중국 세력과 동이의 경계는 대개의 경우 이 요수를 국경으로 삼게 된다.

  따라서 만번한이라는 곳은 요수의 동쪽에 위치했었고, 고조선이 그 땅을 탈환했던 곳이었을 것인데, 그곳은 바로 지금의 북경 동북쪽 밀운수고 부근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기나 전한서의 기록을 보면,

  “한나라가 흥기하자 그곳이 멀고 수비하기가 어렵다하여 요동고새(요동의 옛 장성)를 다시 수리하고 요수(원문에는 패수로 기록되어 있는데, 요수의 오기이므로 필자가 고친다)를 경계로 정하여 연나라에 속하게 했다.

  연나라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 버리자 위만도 1천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상투를 틀고, 만이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요새를 넘어 달아나 요수를 건너 망명하고는(고조선의 준왕으로부터 망명 허락을 받고 다시 돌아와) 진나라의 빈 땅인 상하장에서 살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 속에서 “요수의 동쪽에 위치”했었으며, “진나라 빈 땅인 상하장”의 위치가 곧 “만번한”부근이었고, “요동”이었던 것이다.

  秦故空地 上下鄣(진나라의 빈 땅인 상하장)이란 두 장성의 사이지역으로서

상장은 전국시대 연나라가 쌓은 장성을 말하는 것이고, 하장은 원래 중국 세력들과 동이족의 경계를 가르던 옛 고죽국 부근의 옛 장성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 두 장성 사이지역에서 위만이 살았기 때문에 위만이 진나라의 빈땅인 상하장에서 살았다라고 기록했을 것이다.

  이 상장과 하장 사이 지역은 춘추전국시대 연5군 중 요동군지역이었는데, 진(秦)나라 말기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고조선이 그 땅을 탈환하였으므로 한(漢)나라가 서자 한나라는 옛 만번한 지역인 요동을 포기하고 국경을 후퇴시켜 요수를 고조선과의 국경으로 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고조선의 준왕은 기원전 195년에 위만이 망명해 오자 요수 동쪽이며, 두 장성의 사이지역인 요수 부근의 요충지를 위만에게 영지로 내려 주었고, 그리하여 사람들은 진고공지 상하장이라고도 표현했던 것이며, 요동이라고도 불렀던 것이다.

  너무 늦은 것 같지만 이제라도 “만번한”과 “진고공지 상하장” 그리고 “요동군”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내었으니 그 후의 우리 역사는 그리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