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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의 네번째 도읍 평양성의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7. 29. 23:29

윤여동설 - 고구려의 네 번째 도읍 평양성의 위치 - 최초주장

 

 

  고구려의 평양성은 옛 고조선의 왕검성(왕험성이라고도 한다)이었고, 위만조선의 도읍이었으며,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에는 한사군의 한 군이었던 낙랑군의 치소로 활용되다가 대무신왕이 전한 낙랑군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고구려에 편입시켰다.

 

☆ 사기 조선전의 주에는, "括地志云 高(句)麗都平壤城 本漢樂浪郡王險城 又古云朝鮮地也(괄지지에는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성인데 본래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이다. 또 고조선 땅이라고도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조선의 왕검성이 곧 낙랑군의 치소였고, 고구려의 평양성 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고구려가 동천왕 때 위나라 관구검의 침공을 받고 도읍인 환도성이 함락되어 불타버리자 247년 2월에 급히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수서 고구려 전을 보면 평양성에 대하여,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성으로서 장안성이라고도 하는데, 동북이 6리이고 산의 굴곡을 따라 (성을) 쌓았으며 남쪽으로는 패수에 닿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구당서 고구려 전에는 고구려의 위치에 대하여,
  "그 나라의 도읍은 평양성인데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이다. 장안에서 동쪽으로 5천1백 리에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당서에는 평양성의 위치와 형태에 대하여,
  "그 나라의 왕이 살고 있는 곳은 평양성인데 장안성이라고도 부른다. 한나라 때의 낙랑군으로 경사에서 5천리 남짓 떨어져 있다. 산의 굴곡을 따라 성곽을 쌓았으며, 남쪽은 패수까지이다. 왕은 그 좌측에 궁궐을 지어 놓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장안이나 경사란 당나라의 도읍이었던 지금의 서안을 말하는 것으로서 고구려의 평양성이 서안에서 5천여 리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고구려의 평양성을 북한 평양이라 한다.
  중국 사서들에 기록되어 있는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이 과연 지금의 북한 평양이고, 서안으로부터 5천여 리 떨어져 있으며, 그곳이 한나라 때의 낙랑군이었을까?  

 

  앞서 전한의 무제는 기원전 108년에 순체와 양복이라는 두 장군을 보내 위만조선을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하게 되는데, 이때 수군인 양복으로 하여금 제(지금의 산동반도)에서 발해에 배를 띄우게 하고, 육군인 순체에게는 요동으로부터 출발하게 한다.
  그리고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네 조각으로 나누어 4군을 설치한 후 왕검성을 낙랑군의 치소로 활용하게 되는데,  

 

☆ 사기 조선전의 주에 "昌黎有險瀆縣也(창려는 험독현에 있다)"는 기록과 "遼東險瀆縣朝鮮王舊都(요동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라는 기록 그리고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라는 기록을 그대로 진황도 창려에 적용해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이 곧 고조선의 왕검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창려는 해변에 너무 가까이 위치하고 있고, 역사 기록들 모두를 충족하지 못한다. 

 

   또한 평양성이 남쪽으로 패수에 닿았다고 했으므로 평양성 가까이 패수(浿水)가 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진황도와 당산시의 경계를 가르며 지나는 큰 강은 난하이고, 이 강이 바로 패수로 비정되는 강이다. 
  이 난하가 패수라면  이 난하의 동쪽과 북쪽이라는 지리적 위치를 동시에 충족하는 곳에 평양성이 위치했을 것이다.
  발해에서 난하를 타고 올라가 보면 만리장성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로지르는 곳에 위치한 반가구수고를 지나야 하고, 더 올라가면 승덕시 남쪽을 지나게 되는데, 바로 이 하북성 승덕시에 청나라 황제들이 북경의 더위를 피하여 여름철에만 행궁으로 사용했다는 피서산장(열하행궁)이 있다.   
  그리고 후세 수 양제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침공하면서 육군은 탁군(현 탁주시)에서 출발시켰고, 수군은 동래(현 산동반도)에서 출발시켰으며,

  당 태종은 고구려를 침공하면서 육군은 탁군보다도 더 먼 정주(현 정주시)에서 출발시켰고, 수군은 역시 동래(현 산동반도)에서 출발시켰는데, 수양제나 당태종이 육군을 탁군이나 정주에서 출발시킬 수밖에 없었다면 이때 고구려와 수나라, 당나라의 국경이 그 부근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현재의 요하를 고구려와 수나라, 당나라와의 국경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는데, 엉뚱하게도 수 양제나 당 태종은 요하로부터 아주 수천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육군을 출발시키고 있는 것이다.
  수 양제나 당 태종이 바보가 아닌 이상 국경으로부터 수천리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육군을 출발 시켰을 리는 없으니 결국 이때 고구려와 수나라, 당나라와의 국경은 지금의 북경 서쪽 쯤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본왕 2년(A.D.49) 조의 "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습격했다"는 기록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현재의 요하 동쪽에 위치했을 고구려군이 어떻게 그 멀리 떨어진 산서성 태원까지 습격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이 안 된다고 했던 것이나, 모본왕 당시 고구려가 북경 연경현 부근의 국내성에 도읍하고 산서성 북쪽 부근까지 차지하고 있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고, 덕흥리고분의 유주 13군 태수들의 그림은 유주로 비정되는 보정시 부근까지가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의 강역이었음을 알려주는 고분벽화였던 것이다.
  이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상식과는 전혀 다르다는 말이 되는데, 이를 보면 사서의 기록들은 정확했으나 우리가 지금까지 옛 사서들의 기록을 잘못 해석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은 북한 평양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었고, 낙랑군의 치소도 바로 그곳이었으며,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도 바로 그곳이었던 것이다.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 곧 왕검성이었고, 고구려의 평양성이었다면 우리 고대 역사의 중심지가 바로 지금의 난하(패수)를 중심으로 한 바로 그 부근이었다는 말이 된다.
  자, 이것이 우리 고대 역사의 진실이라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역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 지금 많은 재야 역사연구자들은 우리 고대 역사의 중심지가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이라 하면서 강단사학자들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물론 이들 재야연구자들의 주장은 통일되어 있지 않고, 제각각이며, 심지어 중국 대륙 전체가 우리의 옛 땅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있는데, 이는 말이 되지 않고,

  또 개중에는 학문적인 비판을 넘어 욕설과 험담으로 일관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대륙을 보지 못하고 한반도 안에서 맴도는 강단사학자들이 답답해 보이기는 하겠지만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역사를 공부한다는 사람이 욕설과 험담을 일삼는다면 그것을 어찌 옳은 행동이라 할 수 있으랴.

  스스로의 명예에도 결코 득이 되지 않을 것이다.
  품위를 지키고 아량을 베풀어도 결국 최후의 승자는 재야사학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 상고사, 고대사의 중심지는 한반도가 아니라 발해 북쪽 대륙이니까,

  그것이 역사의 진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