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고구려 평양성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 - 최초공개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이 과연 지금의 어디인지를 밝히기 위하여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주장이 있어왔다.
지금의 북한 평양이 고구려의 평양성이라는 조선시대부터의 주장으로부터 압록강 북쪽 요양 또는 요하서쪽 조양일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 고구려의 평양성이라는 필자의 주장 등이 있는데, 이처럼 주장들이 많다는 것은 아직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을 정확히 찾지 못했다는 말과 같다.
만약 고구려의 평양성을 정확히 찾을 수만 있다면 우리 고대역사의 거의 전부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곳이 바로 고조선의 왕검성이었기 때문에 고조선의 중심지를 알 수 있게 되고, 위만조선, 한사군의 위치를 찾을 수 있게 되며, 삼한, 삼국, 고려의 위치를 정확히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21년(A.D.247) 조를 보면,
"봄 2월 왕이 환도성은 병란을 겪어서 다시 도읍할 수 없다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들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이란 본래 선인왕검이 살던 집이다. 혹은 왕의 도읍이라하여 왕검이라 한다(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儉)"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의 평양성이 옛 고조선의 왕검성(왕험성이라고도 한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조선의 왕검성은 후일 위만조선의 도읍으로 사용되었으며,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에는 한사군의 한 군이었던 전한낙랑군의 치소로 활용되었고, 전한낙랑군 땅에 세워졌던 최씨 낙랑국의 도읍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서기 37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무신왕이 최리의 낙랑국을 멸망시키고 왕검성 부근의 땅을 고구려에 편입시킴으로써 고구려 땅이 되었고 동천왕 때 이르러 위나라 관구검의 침공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되자 옛 왕검성을 수리한 후 평양성이라 명명하고 환도성으로부터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어 그때부터 평양성이 사서의 기록에 남겨지게 되는데, 이곳은 후일 고려의 서경이 된다.
☆ 사기 조선전의 주에는, "括地志云 高(句)麗都平壤城 本漢樂浪郡王險城 又古云朝鮮地也(괄지지에는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성인데 본래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이다. 또 고조선 땅이라고도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조선의 왕검성이 곧 낙랑군의 치소였고, 고구려의 평양성 임을 알 수 있다.
수서 고구려 전을 보면 평양성에 대하여,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성으로서 장안성이라고도 하는데, 동북이 6리이고 산의 굴곡을 따라 (성을) 쌓았으며 남쪽으로는 패수에 닿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구당서 고구려 전에는 고구려의 위치에 대하여,
"그 나라의 도읍은 평양성인데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이다. 장안에서 동쪽으로 5천1백 리에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당서에는 평양성의 위치와 형태에 대하여,
"그 나라의 왕이 살고 있는 곳은 평양성인데 장안성이라고도 부른다. 한나라 때의 낙랑군으로 경사에서 5천리 남짓 떨어져 있다. 산의 굴곡을 따라 성곽을 쌓았으며, 남쪽은 패수까지이다. 왕은 그 좌측에 궁궐을 지어 놓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장안이나 경사란 당나라의 도읍이었던 지금의 서안을 말하는 것으로서 고구려의 평양성이 서안에서 5천여 리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고구려의 평양성을 북한 평양이라 하고 있는데, 지금의 북한 평양이 과연 중국 사서들에 기록되어 있는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으로서 서안으로부터 5천여 리 떨어져 있으며, 한나라 때의 낙랑군이었던 것이 역사적 사실인 것일까?
앞서 전한의 무제는 기원전 108년에 순체와 양복이라는 두 장군을 보내 위만조선을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하게 되는데, 이때 수군인 양복으로 하여금 제(지금의 산동반도)에서 발해에 배를 띄우게 하고, 육군인 순체에게는 요동으로부터 출발하게 하는데, 고구려의 평양성이 지금의 한반도 평양이라면 산동반도에서 발해에 배를 띄울 일이 아니라 황해를 건너 동쪽으로 와야 한다.
그리고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네 조각으로 나누어 4군을 설치한 후 위만조선의 도읍이었던 왕검성을 낙랑군의 치소로 활용하게 된다.
진황도 창려에 있는 갈석산 "碣石" 각석(이곳은 원래의 우공갈석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만리장성이 시작된 진황도 산해관 노룡두
☆ 사기 조선전의 주에 "昌黎有險瀆縣也(창려는 험독현에 있다)"는 기록과 "遼東險瀆縣朝鮮王舊都(요동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라는 기록 그리고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라는 기록을 그대로 지금의 진황도 창려에 적용해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이 곧 고조선의 왕검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창려는 해변에 너무 가까이 위치하고 있고, 역사 기록들 모두를 충족하지 못한다.
그런데 사서의 기록들을 보면 고구려의 평양성이 남쪽으로 패수(浿水)에 닿았다고 했고, 또 왕검성이 패수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고도 기록되어 있으므로 결국 평양성의 서쪽과 남쪽 가까이로 패수(浿水)가 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하북성 난하를 한번 보자.
발해에서 난하를 타고 올라가 보면 만리장성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로지르는 곳에 위치한 반가구수고를 지나야 하고, 더 올라가면 승덕시 남쪽을 지나게 된다.
☆ 하북성 승덕시에 청나라 황제들이 북경의 더위를 피하여 여름철에만 행궁으로 사용했다는 피서산장(열하행궁)이 있다.
이 성은 산의 능선을 따라 둥그렇게 20km쯤 되는 성벽으로 이어져 있고, 내부의 면적은 약 170만평정도 되며, 성의 서쪽으로부터 남쪽으로 난하가 지나며, 정문인 여정문과 그 반대편에 서북문이 있다.
[피서산장 성벽]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에서 바라본 북쪽 풍경]
수 양제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침공하면서 육군은 탁군에서 출발시켰고, 수군은 제(산동반도)에서 출발시켰으며, 당 태종은 고구려를 침공하면서 육군은 탁군보다도 더 먼 정주에서 출발시켰고, 수군은 산동반도에서 출발시켰는데, 수양제나 당태종이 육군을 탁군이나 정주에서 출발시킬 수밖에 없었다면 이때 고구려와 수나라, 당나라의 국경이 북경 부근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요하가 고구려와 수나라, 당나라와의 국경이었을 것으로 알고 있으나 정작 수 양제나 당 태종은 요하로부터 서쪽으로 3천리쯤 떨어진 곳에서부터 육군을 출발시키고 있는 것이다.
수 양제나 당 태종이 바보가 아닌 이상 국경으로부터 3천리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육군을 출발 시켰을 리는 없으니 결국 이때 고구려와 수나라, 당나라와의 국경은 지금의 북경 부근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본왕 2년(A.D.49) 조의 "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습격했다"는 기록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요하 동쪽에 위치했을 고구려군이 어떻게 그 멀리 떨어진 산서성 태원까지 습격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이 안 된다고 했던 것이나, 모본왕 당시 고구려가 지금의 북경 부근까지 차지하고 있었다면 가능한 일이었고, 덕흥리고분의 유주 13군 태수들의 그림은 지금의 북경 부근까지가 광개토대왕 때의 고구려 강역이었음을 알려주는 고분벽화였던 것이다. [유주는 지금의 하북성 보정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요동군은 북경 부근이며, 고구려 국내성은 북경 서북쪽 연경현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상식과는 전혀 다르다는 말이 되는데, 이를 보면 사서의 기록들은 정확했으나 우리가 지금까지 옛 사서들의 기록을 잘못 해석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은 북한 평양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었고, 낙랑군의 치소도 바로 그곳이었으며,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도 바로 그곳이었던 것이다.
지금의 승덕시 부근이 곧 왕검성이었고, 고구려의 평양성이었다면 우리 고대 역사의 중심지가 바로 지금의 난하(패수)를 중심으로 한 바로 그 부근이었다는 말이 된다.
그곳까지가 우리의 옛 땅이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