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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험독(險瀆)은 지금의 북경남쪽 부근 - 최초주장

윤여동 2012. 1. 6. 17:32

윤여동설 -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하여 처음 살았던 험독(險瀆)은 지금의 북경남쪽 부근 - 최초주장 

 

   위략에

  “(조선왕) 부가 죽고 그 아들 준(準)이 왕위에 올랐다.

  그 뒤 20여년이 지나 진항(진승과 항우)이 기병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燕), 제(齊), 조(趙)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점점 준에게 망명해오자 준은 이들을 (고조선의) 서부지역에 살게 하였다.

  한나라 때에 이르러 노관으로 연왕을 삼으니 조선과 연나라는 요수(원문은 패수로 되어 있으나 요수의 오기임이 확실하므로 필자가 고쳤다)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관(노관)이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치자 연나라 사람 위만도 망명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조선의) 준(준왕)에게 망명하고는 서쪽 변방에 살게 해주면 중국의 망명자들을 거두어 조선의 번병이 되겠노라고 준을 설득하였다.

준은 그를 믿고 총애하여 박사에 임명하고 규를 하사하며 사방 백리 땅을 봉해주어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만(위만)이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준에게 보내 속여서 말하기를 ‘한나라 군대가 열군데 길로 쳐 들어오고 있으니 (왕궁으로) 들어가 숙위하기를 청합니다.’ 하고는 드디어 거꾸로 준을 공격하였다. 준(준왕)은 만(위만)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않았다[출전: 삼국지 한전의 주]”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위만이 고조선의 준왕이 오갈 데 없는 자신을 받아주고 벼슬과 사방 백리 땅의 영지를 주는 등 자신에게 베풀어준 은혜를 배반하고 고조선의 도읍인 왕험성(왕검성)을 빼앗아 왕위에 오르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게 하는데, 지금 우리는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하여 처음 자리 잡고 살았다고 하는 고조선 서부변경지역의 사방 백리 땅이 어디를 말하는지 찾지 못하고 있었고, 고조선의 도읍 왕험성(왕검성)의 위치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기 조선전 “도왕험(都王險)”을 설명하는 주를 보면,

  [집해] 서광은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고 했다.

  [색은] 위소는 고읍(古邑)의 이름이라 했고, 서광은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고 했으며, 응소는 지리지 주에서 요동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라 했고, 신찬은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했다 [集解] 徐廣曰 昌黎有險瀆縣也 [索隱] 韋昭云 古邑名, 徐廣曰 昌黎有險瀆縣, 應劭注 地理志 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 臣瓚云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也]” 라고 기록되어 있고,

 

  한서 권28하 지리지 제8하 요동군 험독현 조의 주를 보면, 

  “응소는 조선왕 위만의 도읍(사기색은에는 응소가 “조선왕구도[朝鮮王舊都]“라고 했다고 되어 있다고 했는데 한서에는 ”조선왕만도야[朝鮮王滿都也]“라고 되어 있으니 어찌된 일일까?]으로서 물에 의지하여 험하기 때문에 험독이라고 한다고 하였고, 

  신찬은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으므로 이로부터 험독이라 하였다고 하였고, 

  안사고는 신찬의 설이 옳다고 하였다(應劭曰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 臣瓚曰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師古曰 瓚說是也)”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도왕험(都王險 : 王儉城)을 설명하는데 험독을 들먹이고, 험독을 설명하는데 왕험성을 들먹이며, 안사고도 왕험성이 곧 험독이라는 신찬의 설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였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왕험성(왕검성)과 험독을 동일한 곳으로 인식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 전한서지리지 요동군 험독현의 주 중 신찬의 “此自是險瀆也”의 정확한 의미를 알기 어려우나 “이로부터(此自) 험독이라 하였다”는 의미로 보인다. 따라서 신찬은 고조선의 왕험성(왕검성)의 다른 이름이 험독인 것으로 이해했던 듯하고, 안사고 역시 그렇게 생각했던 것인데, 필자는 험독과 왕험성이 같은 장소라고 주장한 신찬과 안사고가 틀렸고 오히려 서광이나 응소의 주장이 옳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요동군의 험독현과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는 왕험성(왕검성)이 같은 장소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요동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으로서 물에 의지하여 험하기 때문에 험독이라고 한다(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也 依水險 故曰險瀆)”라고 말한 응소의 주장과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昌黎有險瀆縣)”는 서광의 주장

  그리고 “왕험성(왕검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也)”고 말한 신찬의 주장 등은 험독과 왕험성(왕검성)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라 보고 있다.

  다만 신찬의 주장 중 왕험성이 곧 험독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험독과 왕험검(왕검성)은 각각 다른 곳이기 때문이다.

  즉 험독은 삼국지 한전의 주에 기록된 위략의 내용 중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한 후 준왕으로부터 고조선 서쪽 변경의 사방 백리 땅에 봉해진 후 그 땅을 다스리기 위하여 임시로 설치한 치소였던 곳이기 때문에 응소는 요동 험독현이 조선왕 위만의 옛 도읍이라 주장했던 것이라 생각되고,

  서광은 험독현이 창려에 있다고 한 것이며,

  왕험성(왕검성)은 고조선, 위만조선의 도읍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찬은 왕험성(왕검성)이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위치했다고 말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요동군의 험독현과 낙랑군 패수 동쪽의 왕험성(왕검성)은 각각 다른 장소일 수밖에 없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 두 장소를 동일한 곳이라고 착각하게 되어 지금까지도 헷갈리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하여 처음 자리잡고 살았다는 요동군의 험독현(險瀆縣)과 후일 고조선의 준왕으로부터  빼앗아 위만조선의 도읍이 되었던 낙랑군 패수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왕험성(왕검성)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는 기록과 험독현이 조선왕 만의 도읍이었다는 기록, 그리고 왕험성(왕검성)이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위치했다는 기록을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에 대입하여 그곳 창려가 곧 험독이요, 왕험성(왕검성)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틀린 것이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진황도 창려와 갈석산은 옛 창려, 옛 갈석산이 아니라 지명이 교치된 것이기 때문이다.

 

  한서지리지의 주를 보면, 응소는 요동군 험독현이 “물에 의지하여 험하므로 험독이라 한다” 라고 설명함으로써 물과 연관지어 놓고 있는데, 이는 험독 부근에 여러 강이 흐르고 있어 적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에 유리하다는 표현일 것이다.

 

☆ 후한서 지리지제23 군국5를 보면, 요동속국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는데, 요동속국이 낙양동북 3,260리에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요서군은 낙양동북 3,300리에, 요동군은 낙양동북 3,600리에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요동속국의 6개 영현(창요현, 빈도현, 도하현, 무려현, 험독현, 방현) 중에 험독현이 들어있다. 이를 보면 요동속국은 요동군과 요서군의 남쪽에 두 군에 걸쳐 위치했던 듯하다.   

 

  그리고 사기 조선전과 전한서 조선전에는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하고 나서 처음 자리잡고 산 곳을 “秦故空地上下障(진고공지상하장)”이라 기록하고 있어, 옛날 진(秦)나라 때 쌓은 장성 주변이라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즉 위만은 처음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있는 부근에서 살았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위략은 또 위만이 처음 자리잡은 곳을 고조선의 서쪽 변방이며 사방 백리 땅으로서, 연나라, 조나라, 제나라와 가까운 곳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기록들 모두를 충족할 수 있는 곳은 지금의 북경 부근인데, 그곳에는 옛 요수였던 영정하가 흐르고 있어 물이 험하다고 할 수 있고, 지금 북경 부근에는 옛 장성들이 무수히 많아 진고공지상하장이란 바로 그 부근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고, 

  요동군의 치소인 요동성은 지금의 북경 부근으로 비정되는데, 낙랑군 패수동쪽에 위치했다는 고조선의 도읍 왕험성(왕검성)이 북경의 동북쪽 방향에 위치한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으로 비정되고, 패수는 지금의 난하를 말하는 것으로서 하북성 승덕시는 바로 이 난하의 동북쪽에 위치한다.

  따라서 북경 남쪽 부근은 험독현이 요동군에 속한 현이었다는 기록을 충족할 수 있고,

  또 험독이 고조선의 서쪽(사실은 서남쪽이다) 변방이었다는 기록도 충족할 수 있으며,

  험독이 연나라, 조나라, 제나라와 가까운 곳이었다는 기록도 충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험독이 지금의 북경 남쪽이라면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昌黎有險瀆縣)”는 서광의 말은 “창려현(昌黎縣)”이 옛날에는 지금의 북경시 남쪽부근에 위치했었다는 말로서 지명이 교치되었음을 알 수 있고, 우리 고대 역사의 서쪽 경계가 지금의 요하가 아니라 북경 부근이었다는 말이 된다.

 

☆ 고대의 요수(遼水)는 지금의 요하가 아니라 지금의 영정하를 말하는 것이다.

 

  옛 기록들은 이렇듯 곳곳에 우리의 고조선, 위만조선, 삼한, 삼국이 북경, 하북성의 승덕시, 당산시, 진황도시, 요녕성 호로도시, 내몽골 부근에 위치했었다고 알려주고 있는데도 많은 사람들은 그를 알지 못하니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