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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위만조선의 도읍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 - 최초공개

윤여동 2008. 12. 5. 00:56

윤여동설 - 위만조선의 도읍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 - 최초공개 

 

 

  원봉 2년(B.C.109) 한나라는 섭하를 보내어 (조선의) 우거를 회유하였으나 끝까지 수긍하지 않고, 조서를 받들지 않았다.
  섭하는 돌아올 때 국경인 패수(필자 주 : 이때 한나라와 위만조선의 국경이 패수일 수는 없고 살수이어야 맞다. 만약 패수일 경우 패수 동쪽에 바로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이 위치했었다는 말이 된다. 사실이 이러했다면 위만조선은 도읍을 동쪽으로 멀리 옮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인데, 위만조선은 멸망할 때까지 왕검성에 도읍하고 있었다)에 이르자 사람을 시켜 전송나온 조선의 비왕장을 죽이고 즉시 강을 건너 요새로 돌아와서 천자에게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하였다. 천자는 그것을 잘한 것으로 여겨 나무라지 않고, 섭하를 요동동부도위에 임명하였다.
  조선이 섭하를 원망하여 군사를 갑자기 발동시켜 섭하를 죽여버리자 천자는 죄수들을 모아 조선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 해 가을 누선장군 양복을 보내 병력 5만으로 제나라에서 발해에 배를 띄우게 하고, 좌장군 순체에게는 요동을 출발하게 하여 우거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우거가 군사들을 발동시켜 험준한 곳에서 막았다.
  좌장군(순체)의 졸정인 다(多)가 요동병사들을 이끌고 멋대로 선제 공격했다가 패하고, 흩어져 도망해 왔으므로 잡아 군법에 의하여 참수하였다.
  누선장군(양복)이 제나라 군사 7천명을 이끌고 먼저 왕험(왕검)에 이르렀는데, 성을 수비하고 있던 우거가 누선장군의 군사가 적은 것을 알고 곧 성을 나와 공격하였다. 누선장군의 군사들은 패하고 흩어져 도망하였다.      
  무리를 잃은 양복장군은 10여일 간 산 속에 숨어 있으면서 흩어진 군사들을 불러모아 군대를 다시 편성하였다.
  좌장군은 패수 서쪽에서 조선을 공격하였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천자는 두 장군의 전세가 불리하자, 위산을 사자로 보내어 군사의 위용으로 우거를 회유하도록 하였다.
  우거는 사자를 보자 머리 숙여 사과하고 "항복을 하고 싶었지만 두 장군이 죽일지도 몰라 두려웠다. 이제 신임표인 부절을 보았으니 항복을 청한다"고 하였다.
  우거는 태자를 입조시켜 사죄하고, 말 5천 필을 헌납하며, 군량을 공급하겠다고 하였다.
  태자가 무장한 1만여 군사를 거느리고 패수를 건너려고 하였는데, 사자 위산과 좌장군은 혹시 변란이 있을까 의심하여, 태자에게 "이미 항복을 하였으니 수행하는 군사들에게 무기는 버리라고 명하시오" 하였다.
  태자 역시 사자와 좌장군이 자기를 죽일까 의심하여 패수를 건너지 않고 되돌아가 버렸다.
  위산이 돌아와 천자에게 보고하자 천자는 위산을 주살 하였다.
  좌장군은 패수 강가에 배치된 조선군을 격파하고 앞으로 나아가 성(왕검성) 아래에 도착하여 성의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누선장군 역시 합류하여 성의 남쪽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우거가 성을 굳게 지켜 수개월이 되어도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좌장군(순체)은 원래 시중이었고, 연(燕 : 하북성 보정부근)과 대(代 : 현 산서성 북부 대현부근)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군사들이 독하고 날랬으며 교만스러웠다.
  누선장군(양복)은 제나라(현 산동반도부근) 병졸들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 우거와의 전투에서 이미 여러 번 패하여 병졸들을 많이 잃었으므로 병졸들은 겁을 먹고 있었다.
  그리하여 누선장군 양복은 우거왕을 포위하고는 있었으나 항상 화친하기를 원하였고, 좌장군은 빨리 공격하려고 하였다.
  조선의 대신들은 은밀하게 첩자를 보내 상황을 탐지하고는 사람을 누선장군 양복에게 보내 항복을 약속하였으나 말만 오갈 뿐 확실히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좌장군 순체는 누선장군과 함께 여러 차례 조선을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누선장군은 조선이 약속한 항복을 빨리 받아낼 욕심으로 순체와 만나지도 않았다.
  좌장군 역시 조선에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조선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누선장군에게 만 마음이 쏠려 있었다.
  이렇게 두 장군의 마음은 일치하지 못하였다.
  좌장군은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누선장군이 앞서 군사를 잃은 죄가 있어 이제 조선과 사사로이 친선을 맺어 항복하지 못하게 하고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인가 의심스러웠지만 발설하지는 않았다.
  천자가 말하기를 "두 장군이 진격하지 못하므로 위산을 우거에게 사자로 보내어 회유하였었다. 우거가 항복하고 태자를 한나라에 보내기로 했었는데 사자인 위산이 자기가 결정하지 못하고 좌장군과 잘못 상의하여 항복 약속을 그르치고 말았다.
  지금 두 장군이 성을 포위하고는 있으나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 해결되기는 틀렸다." 하고는 제남태수 공손수를 보내어 일을 마치도록 하고, 편의에 따라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였다.          
  공손수가 도착하자 좌장군 순체가 말하기를 "조선이 오래 전에 항복했을텐데 아직 까지 항복하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고는 누선장군이 만나지도 않는다는 것과 또 자기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모두 말하였다.
  "지금과 같은 사태를 빨리 처리하지 않는다면 커다란 해가 있을까 걱정되고, 누선장군과 조선이 연합하여 나의 군대를 공격하여 큰 해를 입히는 일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공손수 역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여 부절로서 좌장군의 군영에서 작전회의를 한다고 누선장군을 소환하여 그가 오자 좌장군 휘하에 명하여 누선장군을 즉시 체포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런 다음 누선장군의 병력을 좌장군의 휘하에 병합하고 이를 천자에게 보고하였다. 천자는 공손수를 처형해 버렸다.
  좌장군은 병합된 군사로서 조선을 급히 공격하였다.
  조선의 재상 노인과 한도(사기에는 한음이라 했다), 이계의 재상 삼과 장군 왕겹 등이 모의하기를 "처음에 우리는 누선장군에게 항복하려고 했었는데. 누선장군은 지금 갇혀있고 좌장군이 혼자 양쪽 군사를 거느리고 있어 우리가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을 것이니 전투상황이 매우 급하고 공포스럽다. 왕(우거왕)은 항복하는 것에 대하여 긍정적이지 못하다" 하고는 한도와 왕겹, 노인은 도망하여 한나라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 죽었다.
  원봉 3년(B.C.108) 여름에 이계의 재상 삼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한나라에 투항하여 왔다.
  그러나 왕검성은 아직도 함락되지 않고, 우거의 대신인 성이(成已)가 한나라군을 다시 공격하였다.
   좌장군 순체는 항복한 우거의 아들 장(위장)과 재상 노인의 아들 최로 하여금 백성들을 회유하여 성이를 죽이도록 함으로써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는 진번·임둔·낙랑·현토 4군으로 만들었다.
  삼을 홰청후에, 한도를 추저후에, 왕겹을 평주후에, 장을 기후(幾候)에 봉하였다.
최는 그 아버지가 죽었고 또 공이 있다고 하여 저양후로 봉하였다.
  좌장군은 소환되어 공을 다투고 서로 시기 질투하고 모략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어 목이 잘려 저자거리에 매달렸다.
  누선장군 역시 열구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좌장군을 기다려야 했는데도 기다리지 않고, 멋대로 먼저 공격하여 많은 병사를 잃었다는 죄목으로 응당 처형되어야 했으나 속죄금을 물고 서민으로 강등되고 말았다

 

우리는 지금 기원전 108년 한무제의 명을 받은 순체와 양복이 위만조선을 침공할 때 육군인 순체는 지금의 요하 쯤에서 출발하여 압록강, 청천강을 건너고, 대동강을 건너 왕검성으로 향했고, 수군인 양복은 산동반도를 출발해 동쪽으로 서해(황해)를 건너 대동강을 타고 올라와 왕검성에 도착해 포위함으로써 위만조선을 멸망시켜 그 땅을 임둔군·낙랑군·진번군·현토군의 네 군으로 나누어 통치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때 수군을 이끈 양복은 제(지금의 산동반도)에서 발해에 배를 띄워 위만조선의 도읍인 왕검성의 남쪽에 주둔했다고 하고, 육군을 이끈 순체는 요동을 지나 패수의 서쪽에 이르러 공방전 끝에 간신히 패수를 건너 왕검성의 서북쪽을 포위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 북한의 평양성이 옛 왕검성이었고, 대동강이 패수라면 해석이 매우 곤란해진다.
  왜냐하면 지금의 북한은 대동강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압록강을 건너온 육군이 대동강을 건널 필요가 없었고, 수군이 산동반도에서 발해에 배를 띄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는 지금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북한평양왕검성설"이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의 북경부근이 옛 요동성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요수(遼水)는 북경 서쪽을 흐르는 영정하를 말하는 것으로 비정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육군인 순체가 위만조선을 침공하기 위해 출발한 요동은 지금의 북경부근이라는 추정이 가능해 지고, 수군인 양복은 지금의 산동반도에서 발해에 배를 띄웠다고 했다.
  이는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이 발해연안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후대 고구려와 중국 세력들의 전쟁 기록을 분석해 보면, 중국 세력들이 평양성을 공격할 때 그들은 요수를 건넌 후 동쪽으로 압록강을 건너고, 다시 살수를 건너고, 패수를 건너야만 평양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요수란 지금의 북경 서쪽 영정하를 말하는 것이고, 요동이란 그 동쪽 지역인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며, 압록강은 백하, 밀운수고, 살수는 조하, 패수는 지금의 난하중류를 말하는 것이고, 평양성은 난하의 동쪽으로서 청나라때 청나라황제들의 여름궁전 피서산장(열하행궁)이 있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으로 비정할 수 있다.


# 압록강이란 말갈국 백수의 강물 색이 오리의 머리색과 비슷하여 압록수라고 불렀다는 강인데, 지금 북경 북쪽에는 대마군산에서 발원하여 적성을 지나고 탕하구를 지나 밀운수고로 흘러드는 백하(백수와 동일한 의미이다)라는 강이 있어 이 강이 바로 압록강으로 비정되는 강이고, 살수란 하북성 승덕시 풍녕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고북구를 지나 밀운수고로 들어가는 조하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고구려의 평양성은 곧 옛 왕검성이었으니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 바로 옛 고조선,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이 틀림없는 것이다.
  따라서 한 무제의 명을 받고 위만조선을 공격한 육군의 순체는 요동인 지금의 북경 부근을 출발하여 밀운수고를 건너 고북구를 통과하여 패수인 난하의 서쪽에 도착하여 고조선 방어군과의 공방전 끝에 난하를 건너 승덕시에 도착했을 것이고, 수군인 양복은 제 지역이었던 지금의 산동반도를 출발하여 서북쪽으로 향하여 발해를 건너 난하를 타고 올라가 우여곡절 끝에 위만조선의 왕검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위만조선을 멸망시켰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마천은 사기에 "조선을 평정하고 네 군으로 만들었다"고 만 기록했고, 반고의 전한서에는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는 진번·임둔·낙랑·현토 4군으로 만들었다"고 기록함으로써 그를 가지고 논란이 되고 있으나, 사실 이때 사마천은 조선을 평정한 것에만 무게를 두었을 뿐 네 군의 구체적인 명칭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 틀림없을 것이고, 곧 조선에게 그 땅을 돌려주고 조공을 받는 것으로 마무리 될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나라는 빼앗은 위만조선 땅을 다시 돌려주지 않고 전한낙랑군은 기원전 108년부터 서기 37년까지 145년 간 우리의 옛 강역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고, 현토군은 기원전 82년에 이르러 처음 설치되었던 옥저를 떠나 관할지를 바꾸어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겨 부여(동부여)의 남진과 구려의 서진을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원래 현토군의 관할지였던 옥저와 동예는 낙랑동부도위가 되었다가 서기 30년 대무신왕 때 고구려에 편입되어 소멸된다. 
  따라서 한사군이 설치된 적이 없다고 하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고, 억지이며, 민족주의 입장에서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 한나라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고 하기 위해 그렇게 해석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한나라에 투항한 삼, 한도(한음), 왕겹, 장, 최는 위기에 처한 조국을 목숨 바쳐 지킬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들만 살자고 한나라에 투항한 매국노들일 뿐이다.
  우거왕을 죽이고 한나라에 투항한 삼은 기원전 108년에 산동반도 부근의 홰청후가 되어 옛 제나라 지역에 식읍 1천 호를 받고 살다가 조선의 포로들이 도망쳐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자 하옥되어 기원전 99년에 병들어 죽었고,
  우거왕의 아들 장은 기원전 107년에 지금 산서성의 기후로 봉해졌다가 기원전 105년에 죽었는데, 조선사람들이 모반하여 때려 죽여버렸다. 조선 유민들은 왕자의 신분으로서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나라를 지킬 생각은 하지 않고 한나라에 투항한 후 한나라의 앞잡이가 되어 조선의 유민들을 탄압하는 장을 때려 죽여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왕겹은 기원전 108년 4월 지금 산서성의 평주후가 되고 식읍 1,480호를 받았으나 다음해인 기원전 107년에 죽었고,
  한도(한음)는 기원전 108년 발해 부근의 적저후가 되어 식읍 540호를 받고 살다가 기원전 91년에 죽었는데, 역적들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
  최는 한나라에 투항하려고 오다가 죽은 조선의 재상 노인의 아들로서 왕검성을 끝까지 사수하려한 충신 성이를 죽이도록 사주한 사람인데, 기원전 107년 3월에 산동반도 부근에 위치했던 제나라 땅의 온양후(열양후라고도 한다)로 봉해졌다가 기원전 103년에 죽었다.  
  조국을 배신한 역적들의 나머지 여생은 그리 행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르고 어느 사람은 이들 역적들이 조선부흥운동을 했던 애국자였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잘 모르거든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가는 법이다.
  그들을 애국자라고 하는 것은 역사를 매우 잘못 해석하는 것으로서 왕검성을 끝까지 지키려다가 역적들의 사주를 받은 자객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우거왕과 충신 성이의 영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또한 한나라의 장수들이 한결같이 벌을 받은 것은 그들이 전쟁 중에 취한 태도 때문에 벌을 받았던 것이지 전쟁의 승패와는 상관이 없었다.
  한 무제는 장수가 장수답게 스스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고 벌을 내린 것이었지 전투에 패했다고 벌을 내린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