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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한반도 경주에 신라왕릉은 하나도 없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12. 3. 3. 09:07

 

윤여동설 - 한반도 경주에 신라왕릉은 하나도 없다 - 최초주장

 

 

[위 : 경주오릉, 이 고총들을 신라 혁거세왕릉, 알영왕후릉, 남해왕릉, 유리왕릉, 파사왕릉이라고 비정하고 있으나 이는 신라 왕릉들이 아니다]

 

  어느 역사학자가 한반도 “경주에 있는 신라왕릉 중 제대로 명명된 곳이 7기 뿐”이라고 그의 유저 “신라왕릉 연구”에서 주장하였다고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으나, 사실 신라왕릉들이 잘못 비정되었다는 주장은 조선시대부터 꾸준히 제기되어온 것으로서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경주부 능묘 조를 보면,

  “혁거세릉,미추왕릉,법흥왕릉,태종무열왕릉,진흥왕릉,선덕왕릉,효소왕릉,성덕왕릉,헌덕왕릉,흥덕왕릉,김유신묘,김인문묘,김양묘”에 대한 조성위치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기 때문에 조선시대 사람들은 나머지 신라왕릉들의 위치를 찾으려 하였고, 한반도 경주에 있는 고총들을 신라왕릉으로 비정하기 시작했던 것인데, 사실 확실한 근거(출토물 등)에 기초하여 명명했던 것이 아니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기록을 참고하여 적당한 위치에 있는 고총을 무슨왕릉, 무슨왕릉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경주에는 신라왕릉이나 왕후릉이 하나도 없다”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신라는 한반도에서 건국되고 멸망한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신라가 한반도에서 건국되지 않았으니 시조인 혁거세거서간의 능이 한반도에 있을 리 없고, 신라가 한반도에서 멸망하지 않았으니 마지막왕 경순왕의 능 역시 한반도에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는 왜 한반도 경주에 신라왕릉이 하나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신라의 위치에 대하여,

  수서 신라전에는, “신라국은 고려(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다.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사는데 혹은 사라라고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북사 신라전에는,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의 종족이다. 땅이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는데,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산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와 특별히 밀접했던 당나라의 역사서 신당서에는, “신라는 변한의 먼 후예이다.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사는데, 횡으로는 1천리, 종으로는 3천리이다. 동쪽은 장인(국)에 닿고, 동남쪽은 일본, 서쪽은 백제, 남쪽은 바다에 닿아 있으며,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모든 기록들이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말해주고 있고, 특히 신당서는 신라의 동쪽에 장인국, 동남쪽에 일본, 서쪽에 백제, 북쪽에 고구려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있었다?

  신라의 동쪽에 장인국이 있었다?

  신라가 한반도 경주를 중심으로 존재했었다면 동쪽은 동해바다인데 바다 가운데 장인국이 어떻게 위치할 수 있을까?

  사서의 기록을 한반도에 대입시켜 보면, 경주 부근이 한나라 때의 낙랑 땅이어야 하고, 경주의 동쪽에 장인국이라는 나라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한반도를 기준으로 볼 때 위 사서들의 기록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전한서 권28하 지리지 제8하 낙랑군 조를 보면,

  “무제 원봉3년(B.C.108)에 처음 설치되었다. 왕망은 낙선이라 하였다. 유주에 속했다. 호수는 62,812호이고, 인구는 406,748명이다. 운장(장성을 말함)이 있고 현은 25개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후한서 지제23 군국5 낙랑군 조를 보면,

  “(전한) 무제가 설치하였는데, 낙양 동북 5천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5천여리 되는 그 부근이 한나라 때의 낙랑군이었다는 말이 되고 그 부근에 신라도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인데, 그곳은 과연 지금의 어디 부근일까?

 

☆ 사기 권2 하본기 제2 갈석(碣石)의 주를 보면,

“태강지리지에 이르기를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다’라고 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통전 권186 변방2 동이하 대당 무덕4년(A.D.621) 조에도,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데,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되었다. 지금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고구려로 들어갔는데, 그 유지가 지금도 남아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갈석산이 있는 곳이 곧 한나라 때의 낙랑군 수성현이었다는 말이고, 그 부근이 한나라 때의 낙랑군 지역이었다는 말이 되는 것인데, 지금 갈석산(碣石山)이라는 산은 한반도의 평양이나 경주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 산이 아니다.

 

  

  양서 신라전을 보면,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의 종족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옛 삼한 중 진한에서 신라가 건국되었음을 알게 하는데,

  후한서 한전을 보면,

  “한은 삼종이 있는데, 첫째는 마한이요, 둘째는 진한이며, 셋째는 변진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이 있고, 그 북쪽은 낙랑, 그 남쪽은 왜와 접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 맥과 접했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지 한(韓)전에는,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한계로 했고, 남쪽은 왜와 접했다. 땅이 사방 4천리이다. 삼종이 있는데, 첫째는 마한이요, 둘째는 진한이며, 셋째는 변한인데, 진한은 옛 진국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한에는 마한, 진한, 변한(또는 변진)이 있었고, 사방 4천리에 이르는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대방군의 남쪽에 위치했는데, 마한의 북쪽에는 낙랑군이, 진한의 북쪽에는 예, 맥이, 변진(변한)의 남쪽에는 왜가 위치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후한서 예전을 보면,

  “원봉3년(B.C.108)에 이르러 조선(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 임둔, 현토, 진번으로 나누었다.

  소제 시원5년(B.C.82)에 이르러 임둔과 진번을 폐지하여 낙랑과 현토에 병합했다. 현토를 다시 구려로 옮겼으며 단단대령 동쪽의 옥저와 예, 맥은 모두 낙랑에 속하게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한사군에 변화가 있었음을 알게 하고 옥저, 예, 맥 등이 언급되고 있으며,

  삼국사기 신라본기 5대 파사이사금 조를 보면 파사이사금이 말하기를,

  “내가 덕이 없이 나라를 가져 서쪽으로는 백제를 이웃하고, 남쪽으로는 가야를 접하였으며.........” 라고 말하고 있고,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조를 보면 온조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변경을 침공하기 때문에.............” 라고 말하고 있어, 신라와 백제는 국경을 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또 가까이에 말갈이 있었으며, 신라의 남쪽에 가야가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눈치빠른 사람이라면 사방 4천리 강역의 삼한이 한반도 남부에 위치할 수 없다는 것을 금방 눈치챘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반도 남부는 사방 1천여리 정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방4천리 땅을 차지하고 있던 한(韓)의 진한에서 발전한 신라는 한반도 남쪽에서 건국된 나라가 아니라 더 넓은 땅 대륙에서 건국된 나라이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은 지금의 북경 부근을 중심으로한 그 부근에서 넓게 사방 4천리 땅을 차지했던 나라였고, 신라는 낙양으로부터 동북쪽으로 5천여리 떨어졌으며 한의 동쪽에 위치했던 진한 즉 지금의 요녕성 호로도부근에 위치했던 나라였던 것이다.

  그리고 신라왕들의 능은 금성 부근에 조성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 고려사절요 현종8년(A.D.1017) 12월 조를 보면, “교서를 내려 ‘고구려, 신라, 백제왕의 능묘는 모두 소재지의 주와 현으로 하여금 수리하게 하고, 땔감을 베는 행위를 금하며, 지나는 사람은 말에서 내리도록 하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까지도 삼국의 왕릉들이 잘 보존, 관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신라왕들의 능이 한반도 경주에 있을 수가 있을까?

  신라왕들이 한반도 경주에서 살지도 않았고, 경주에서 죽은 일도 없는데, 어떻게 신라의 왕들이 한반도 경주부근에 묻힐 수 있었다는 말인가!

  한반도 경주는 신라의 천년도읍 금성이 아니며, 한반도 경주에 신라왕들의 능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지금 한반도 경주의 고총들은 신라 왕릉이 아니다.

  이는 지금 우리가 모르고 있는 제3의 왕국의 왕릉일 가능성이 많다. 

  신나라가 멸망한 후 흉노 김일제의 후손들이 한반도로 도망쳐 와서 세운 왕국의 왕릉일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하여튼 한반도 경주는 대륙문화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필자의 주장이 믿어지지 않거든 모두 발굴해 보면 명명백백 밝혀질 일이다.

 

 

[참고]

신라 왕릉의 위치에 관한 기록들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증동국여지승람)

 

1. 시조 혁거세왕릉(박씨) 사릉(蛇陵),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담엄사(曇嚴寺) 옆에 있다고 하였고,

    오릉(五陵), 사릉(蛇陵)이라고도 한다고 하였음.

2. 남해왕릉(박씨) 사릉원

3. 유리왕릉(박씨) 사릉원

4. 탈해왕릉(석씨) 성북양정구

5. 파사왕릉(박씨) 사릉원

6. 지마왕릉(박씨) ?

7. 일성왕릉(박씨) ?

8. 아달라왕릉(박씨) ?

9. 벌휴왕릉(석씨) ?

10. 나해왕릉(석씨) ?

11. 조분왕릉(석씨) ?

12. 점해왕릉(석씨) ?

13. 미추왕릉(김씨) 대릉(죽장릉),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주부 남쪽 황남리에 있고,

     죽현릉, 죽장릉이라고도 한다고 하였음.

14. 유례왕릉(석씨) ?

15. 기림왕릉(석씨) ?

16. 흘해왕릉(석씨) ?

17. 나물왕릉(김씨) ? 삼국유사에는 점성대 서남쪽

18. 실성왕릉(김씨) ?

19. 눌지왕릉(김씨) ?

20. 자비왕릉(김씨) ?

21. 소지왕릉(김씨) ?

22. 지증왕릉(김씨) ?

23. 법흥왕릉(김씨) 애공사북봉,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주부 서악리에 있다고 하였음.

24. 진흥왕릉(김씨) 애공사북봉,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주부 서악리에 있다고 하였음.

25. 진지왕릉(김씨) 영경사북, 삼국유사에는 애공사북쪽

26. 진평왕릉(김씨) 한지

27. 선덕여왕릉(김씨) 낭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낭산 남령에 있다고 하였음.

28. 진덕여왕릉(김씨) 사량부

29. 태종무열왕릉(김씨) 영경사북,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주부 서악리에 있다고 하였음.

30. 문무왕릉(김씨) 동해구대석위,

     삼국유사에는 감은사 동쪽해중

31. 신문왕릉(김씨) 낭산 동쪽

32. 효소왕릉(김씨) 망덕사 동쪽, 삼국유사도 동일,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주부 동쪽 분남리에 있다고 하였음.

33. 성덕왕릉(김씨) 이거사 남쪽, 삼국유사에는 동촌 남쪽(양장곡),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주부의 동쪽 도지곡리에 있다고 하였음.

34. 효성왕릉(김씨) 화장, 삼국유사에는 법류사에서 화장

35. 경덕왕릉(김씨) 모지사 서잠,

     삼국유사에는 처음 경지사에 조성했다가 양장곡 가운데로 이장했다고 하였음.

36. 혜공왕릉(김씨) ?

37. 선덕왕릉(김씨) 화장

38. 원성왕릉(김씨) 봉덕사 남쪽에서 화장,

     삼국유사에는 능이 곡사(鵠寺, 지금의 숭복사)에 있다고 하였고,

     최치원이 세운 능비가 있다고 하였음.

39. 소성왕릉(김씨) ?

40. 애장왕릉(김씨) ?

41. 헌덕왕릉(김씨) 천림사 북쪽, 삼국유사에도 동일,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주부의 동쪽 천림리에 있다고 하였음.

42. 흥덕왕릉(김씨) 장화왕비릉에 합장,

     삼국유사에는 안강 북쪽 비화양에 있고, 왕비 창화부인과 합장,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안강현 북쪽에 있다고 하였음.

43. 희강왕릉(김씨) 소산(蘇山)

44. 민애왕릉(김씨) ?

45. 신무왕릉(김씨) 제형산 서북쪽

46. 문성왕릉(김씨) 공작지

47. 헌안왕릉(김씨) 공작지

48. 경문왕릉(김씨) ?

49. 헌강왕릉(김씨) 보리사 동남쪽

50. 정강왕릉(김씨) 보리사 동남쪽

51. 진성여왕릉(김씨) 황산,

     삼국유사에는 화장하여 뼈를 모량서악(牟梁西岳 혹은 未黃山)에 뿌렸다고 하였음.

52. 효공왕릉(김씨) 사자사 북쪽,

     삼국유사에는 사자사 북쪽에서 화장하여 뼈는 구지제(仇知堤) 동쪽 산 중턱에 간수했다고 하였음.

53. 신덕왕릉(박씨) 죽성,

     삼국유사에는 화장하여 뼈를 잠현(箴峴) 남쪽에 두었다고 하였음.

54. 경명왕릉(박씨) 황복사 북쪽,

     삼국유사에는 황복사에서 화장하여 뼈를 성등잉산(省等仍山)서쪽에 뿌렸다고 했음.

55. 경애왕릉(박씨) ?

56. 경순왕릉(김씨) ?, 삼국유사에는 ○○동쪽방향 동네에 있다고 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