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우리의 대륙고대사 진실(眞實)찾기의 지름길 영정하요수설(永定河遼水說)과 북경요동설(北京遼東說) - 최초주장
고대의 요동(遼東)은 낙양 동북3,600리에 위치한다고 하였고,
요수(遼水)를 건너면 바로 그 동쪽이 요동(遼東)이었다.
☆ 고대의 10리는 지금처럼 4km가 아니라 2.3km였다고 한다. 따라서 고대의 1,000리는 230km가 된다. 그런데 지금 낙양에서 북경까지의 고속도로 거리가 약800km쯤 된다. 환산해보면 약 3,500리쯤 된다. 지금의 북경 부근이 옛 요동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는 요동(遼東) 동쪽 1천여리에 위치해 있었다고 수 많은 사서들에 기록되어 있고,
서진(西晉) 말기에 고구려는 요동(遼東 : 요수 동쪽)을 차지했었고, 백제는 요서(遼西 : 요수 서쪽)를 차지했었다.
그리하여 백제(百濟 : 대륙백제)와 북위(北魏)는 수십만 기병을 동원하여 대규모 전쟁을 할 수 있었다.
북위가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고, 백제가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두 나라는 전쟁을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고, 사실 대규모 전쟁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이야 큰 배를 타고 서해(황해) 바다를 직접 건너는 것이 어렵지 않지만, 옛날에는 그러한 항해는 아예 불가능했고, 연안해로를 따라 항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 장안(지금의 서안)을 출발하여 동북쪽으로 향하여 탁군(涿郡 : 지금의 탁주시)을 지나고 요수(遼水)를 건너 요동(遼東)에 도착한 후 우중문 등으로 하여금 압록강(鴨綠江, 鴨淥江)을 건너 을지문덕을 쫓아 패수(浿水) 동쪽의 평양성(平壤城)까지 왔었으나, 전과도 없이 철군하다가 살수(薩水)에서 거의 전멸 당하는 치욕을 당했다.
또한 당 태종도 고구려를 침공할 때 장안(지금의 서안)을 출발하여 동북쪽으로 향하여 정주(定州)와 갈석산(碣石山) 그리고 요택(遼澤)을 지나고 요수(遼水)를 건너 요동성(遼東城)을 지나 안시성(安市城)까지는 왔었으나 그를 함락시키지 못하여 압록강을 건너보지도 못한 채 체면을 구기고 철군할 수밖에 없었고,
당 고종 때 소정방은 지금의 산동반도 내주(萊州)에서 서북쪽으로 발해(渤海)를 건너 백강(白江)을 타고 올라가 기벌포에서 김유신의 신라군과 연합하여 의자왕이 이끄는 백제(대륙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위 그림에 옛 사서들의 기록을 대입하여 해석해 보면 지형과 기록이 일치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고대의 요수(遼水)에 대하여,
지금의 조백하를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조백하요수설도 있고,
지금의 난하가 고대의 요수라고 주장하는 난하요수설도 있으며,
또 지금의 대릉하가 고대의 요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대릉하요수설도 있으나, 모두 옛 사서들의 기록들을 완벽하게 충족할 수 없다.
지금의 요하(遼河)가 옛 요수(遼水)라고 하는 엉터리 주장보다야 한결 가까이 다가갔다고 할 수 있지만 역시 우리 고대사의 진실은 아니다.
고대의 요수(遼水)는 지금의 북경 서쪽을 흐르는 영정하(永定河)를 말하는 것이고, 고대의 요동(遼東)은 지금의 북경(北京) 일원을 말하는 것이 확실하다.
역사연구가 윤여동이 주장하는 “북경요동설(北京遼東說)”과 “영정하요수설(永定河遼水說)”이 우리 대륙 고대사의 진실(眞實)이다.
이를 이해하는 것이 우리 고대사를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지름길임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