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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위만조선 때 진번국(眞番國)과 임둔국(臨屯國)의 진짜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 2018. 6. 8. 08:43

윤여동설 - 위만조선 때 진번국(眞番國)과 임둔국(臨屯國)의 진짜위치 - 최초공개

 

  삼국유사 위만조선 조를 보면,

  “연왕(燕王) 노관이 한(: 전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匈奴)로 들어가니 연()나라 사람 위만도 망명하고자 무리 1,000여명을 모아 동쪽으로 도망쳐 요새를 넘고 패수(浿水)를 건너 진()나라의 옛 빈터인 상하장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그리고는 차츰 진번(眞番), 조선(朝鮮)의 오랑캐들과 옛 연나라, 제나라에서 망명해 온 사람들을 모아 왕이 되고, 왕검성에 도읍했다.

  위만은 군사의 위력으로 이웃의 조그만 나라들을 침략하여 항복시켰다. 이에 진번(眞番)과 임둔(臨屯)이 모두 복종해 와서 그에게 예속되니 땅이 수천리나 되었다. 위만은 아들에게 왕위를 전하고, 손자 우거에 이르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위만조선에 복속했던 곳이 대표적으로 조선, 진번, 임둔 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후일 기원전 108년에 이르러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4군을 설치했는데, 곧 낙랑군(樂浪郡), 진번군(眞番郡), 임둔군(臨屯郡), 현토군(玄菟郡)이었다.

  낙랑군은 옛 조선(고조선, 위만조선) 땅에 설치되었는데 치소는 조선현(朝鮮縣 : 왕검성)에 두었으며,

  진번군은 옛 진번국 땅에 설치되었고 치소는 삽현(霅縣)에 두었으며,

  임둔군은 옛 임둔국 땅에 설치되었고 치소는 동이현(東暆縣) 에 두었으며,

  초기 현토군은 옛 동옥저 땅에 설치되었고, 치소는 옥저성(沃沮城)에 두었다.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를 보면, “眞番臨屯在南北 樂浪玄菟東西偏(진번과 임둔은 남북으로 위치했고, 낙랑과 현토는 동서에 위치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대략 정확한 표현이고, 초기현토군은 후일 요동군의 서북쪽으로 옮겼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옛 한4군의 설치 위치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지 못하고 있고, 정설 없이 역사 연구자들 각각의 주장들만 분분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옛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이고, 그 강역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오랜 연구 끝에 우리 고대역사의 중심지인 그 왕검성을 찾아냈는데, 그 위치는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었고, 옛 패수(浿水)는 지금의 난하(灤河)로 밝혀졌다.

  따라서 낙랑군은 바로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承德市) 부근을 치소로 하였음을 알게 되었고,

  진번군은 낙랑군의 동쪽 지금의 능원(凌源) 또는 영성(寧城) 부근에 치소를 두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임둔군은 진번군의 동북쪽 지금의 내몽골 고륜기(庫倫旗) 부근에 치소를 두었을 것이며,

  초기 현토군은 임둔군의 서쪽인 지금의 내몽골 옹우특기(翁牛特旗) 또는 적봉(赤峰) 부근에 치소를 두었을 것이다.

  결국 옛 진번국(眞番國)은 지금의 영성, 능원, 건평 부근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던 나라였음을 알 수 있고,

  옛 임둔국(臨屯國)은 지금의 고륜기, 나만기, 오한기 부근의 땅을 차지하고 있던 나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진번국(眞番國)이 한()나라에 가고자 하였으나 위만이 길을 가로막고 지나지 못하게 했었다는 기록이 남겨질 수 있었던 것이다.

  위 지도를 보라.

 

 

자치통감 권21 한기13 세종효무황제(무제) 원봉3(B.C.108) 조의 주를 보면,

樂浪郡治朝鮮縣 蓋以右渠所都爲治所也

臣瓚曰 茂陵書

臨屯郡治東暆縣 去長安六千一百三十八里 領十五縣

玄菟郡本高句麗也 旣平朝鮮 倂開爲郡 治沃沮城 後爲夷貊所侵 徙郡句麗西北

眞番郡治霅縣 去長安七千六百四十里 領十五縣 余據後廢臨屯眞番二郡

이라 설명되어 있는데, 장안에서부터의 거리는 진번군과 임둔국이 바뀌어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