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예(濊)와 맥(貊) 그리고 동부여(東扶餘,東夫餘)의 상호관계도 - 최초주장
[북부여의 해부루가 졸본부여 동명왕에게 쫓겨 북쪽 예(창해군)의 땅으로 도망쳐 그곳을 점거하고 동부여를 세우자, 그 땅을 빼앗긴 예는 동쪽으로 개마대산(현 대흥안령, 칠로도산)을 넘어 임둔(명주) 지역으로 옮겨 가서 그 땅을 차지하고 다시 예(동예)를 세우게 되고, 동예에게 그 땅을 빼앗긴 임둔은 그 후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전해지지 않았다. 동화되어 소멸했는지, 다른 곳으로 이주해 가서 다시 나라를 세웠는지 알 수 없다. 혹시 그 땅을 잃자 그곳을 떠나 베링해를 건너 아메리카로 가서 인디언, 인디오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임둔→임뎐→인디언으로 변화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예(동예)의 서남쪽에 맥국(貊國)이 위치하고 있었는데 후일 고구려가 이 동예(東濊)와 맥(貊) 그리고 동북쪽의 옥저 그리고 북쪽의 동부여까지 모두 복속시키게 된다]
전한서 원삭 원년(B.C.128) 조를 보면, “東夷薉君南閭等 口二十八萬人降 爲蒼海郡(동이 예군 남려 등이 28만명을 이끌고 투항해 와서 그곳을 창해군으로 만들었다)”라는 기록과 원삭 3년(B.C.126)조의, “春 罷蒼海郡(봄 창해군을 파했다)”라는 기록과,
후한서 예전의, “元朔元年 濊君南閭等 畔右渠 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 武帝以其地爲蒼海郡 數年乃罷(원삭 원년에 예군 남려 등이 우거에 반하고 28만구를 이끌고 요동(요동군)으로 내속해 왔으므로 (전한의) 무제가 그 땅을 창해군으로 만들었다가 수년 만에 파했다)” 라는 기록 속의 예와 창해군은 지금의 내몽골 정람기 부근을 말하는 것인데, 그 땅을 동부여에게 빼앗기게 되자 이 예(濊 = 薉)가 동쪽인 진한(후일의 신라)의 북쪽 임둔 땅으로 옮겨가 그 땅을 차지하고 예(동예)를 재건하게 된다.
다만 이때 그 땅을 빼앗긴 임둔 사람들은 또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하다.
소멸하고 말았을까?
아니면 그곳을 떠나 동북쪽으로 향하여 베링해를 건너 아메리카로 가 버린 것일까?
임둔?
인뎐?
인디언?
후한서 부여국전을 보면, “부여국은 현토의 북쪽 1천리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하였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땅이 2천리인데 본래는 예(濊)의 땅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지 부여전을 보면, “그 나라 노인들은 자기들이 옛날 다른 곳으로부터 망명해온 사람들이라고 한다...........그 나라의 옥새에 예왕지인(濊王之印)이란 글자가 있고, 나라 가운데에 예성(濊城)이라는 옛 성이 있으니 아마 이곳이 본래는 예맥의 땅(예의 땅의 오기)이었으나 부여(동부여)가 그곳을 차지하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자기들 스스로 망명해온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후한서 예전을 보면, “예는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옥저, 남쪽으로는 진한과 접했고, 동쪽은 대해에 닿았으며, 서쪽은 낙랑까지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예가 원래 자기들이 살던 땅을 동부여에게 빼앗기고 진한의 북쪽으로 이동해 갔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인데, 동부여는 지금의 내몽골 정람기 부근으로 비정된다.
따라서 옛 예국 땅이었고 한 무제가 창해군으로 만들었다는 곳은 바로 지금의 내몽골 정람기 부근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 마한 조를 보면, “명주(溟州)는 옛날에는 예국(穢國:濊國)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원도 강릉대도호부 건치연혁을 보면, “本濊國漢武帝 元封二年遣將討右渠定四郡時臨屯(본래는 예국이었다. 한(漢)무제 원봉2년에 장수를 보내 우거를 토벌하고 사군을 정할 때 임둔군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 원래의 예국 땅에 임둔군을 설치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임둔군 땅이 후일 동예(예)의 땅이 된 것이다.
후한서 예전을 보면, “예(濊 : 동예)는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옥저, 남쪽으로는 진한(신라)과 접했고, 동쪽은 대해에 닿았으며, 서쪽은 낙랑까지이다. 예(동예), 옥저, 고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고조선, 위만조선) 땅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지 예전에도, “예(濊 : 동예)는 남쪽으로는 진한(신라), 북쪽으로는 고구려, 옥저와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대해에 닿았다. 지금 조선(고조선, 위만조선)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 백성이 2만호이다............한 무제가 조선(위만조선)을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네 군으로 만들었다............단단대령의 서쪽은 낙랑에 속했으며, 단단대령의 동쪽 일곱 개현은 낙랑동부도위가 통치하는데, 그 백성이 모두 예인(濊人)이다. 뒤에 낙랑동부도위를 폐지하고 거수로서 현후를 삼았다. 지금의 불내예(不耐濊)는 모두 그 종족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를 알 수 있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46년(A.D.98) 조를 보면, “봄3월에 왕이 동쪽으로 책성(柵城)을 순행하다가 책성 서쪽 계산에 이르러 백록을 잡았다. 다시 책성으로 와서 여러 신하들과 함께 잔치를 베풀고 술을 마시면서 책성관리들에게 물품을 차등있게 하사하고 그들의 공적을 바위에 새겨놓고 돌아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책성[柵城 : 삼국유사 말갈발해 조에는 橻城府(추성부)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은 후일 신라의 하슬라(何瑟羅)와 명주(溟州)가 되기도 하고, 발해의 동경용원부, 책성부가 되는 곳이기도 한데, 이곳이 바로 삼국시대의 예(濊 : 동예)의 땅이었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53년(A.D.105) 조를 보면,
“왕이 한(후한)나라 요동(遼東)에 장수를 보내어 6개현을 약탈하게 했더니 요동태수 경기가 군사를 내어 항전하매 왕의 군사가 대패하였다.
가을9월 경기가 맥인(貊人)들을 쳐부수었다”라고 맥인이 등장하고,
또 66년(A.D.118) 조를 보면, “여름6월 왕이 예(濊)와 맥(貊)과 함께 한(漢)나라 현토(玄菟)를 습격하고,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했다”라고 예와 맥이 동시에 언급되고 있고,
☆ 삼국지 동옥저 전을 보면, “한(漢)나라는 그 땅이 넓고 멀어 단단대령의 동쪽을 나누어 동부도위(낙랑동부도위)를 설치하고 치소를 불내성(不耐城)에 두어 별도로 대령의 7개현을 관할하게 하였다............건무 6년(A.D.30) 변경의 군을 줄일 때 도위도 폐지하고 그 후 모두 현의 거수로서 현후를 삼으니 불내(不耐), 화려(華麗), 옥저(沃沮) 등의 여러 현이 모두 후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17년(A.D.40) 조를 보면, “가을9월 화려(華麗), 불내(不耐) 두 현의 사람들이 공모하여 기병을 거느리고 (신라의)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으나 맥국(貊國)의 거수가 군사로서 곡하의 서쪽에서 요격하여 패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낙랑동부도위 7개현 중에 불내현, 화려현 등이 있음을 알게 하는데, 이때 태조대왕은 왜 예(동예)와 맥의 군사로서 화려성을 공격해야만 했던 것일까?
또 69년(A.D.121) 조를 보면, “12월 왕이 마한(馬韓 : 시기적으로 백제이다)과 예(濊 : 동예)와 맥(貊)의 기병 1만여명을 거느리고 현토성(玄菟城)을 포위했더니 부여왕이 자기 아들 위구태를 시켜 군사2만을 거느리고 한나라 군사와 힘을 합하여 항거하므로 우리 군사가 대패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70년(A.D.122) 조를 보면, “왕이 마한(馬韓 : 시기적으로 백제이다), 예(濊 : 동예)와 맥(貊)과 함께 요동(遼東)을 침공하였더니 부여왕이 군사를 보내 한(漢)나라를 구원하고 우리 군사를 격파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백제는 마한의 동북쪽에서 건국되었다고 하였는데, 당시 마한의 도읍은 지금의 북경 동쪽 당산시 풍윤으로 비정되고, 백제의 건국지는 그 동북쪽 방향인 도산남쪽으로 비정된다.
고구려 태조대왕 때는 마한은 소멸하였고, 백제가 그 땅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므로 백제라고 해야 옳겠지만 이때 옛 마한 지역이었던 지금의 당산, 풍윤 지역에서 군사를 동원했으므로 마한이라 기록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 예(濊 : 동예)는 삼국, 발해시대의 책성, 하슬라, 명주, 발해의 동경용원부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서 지금의 내몽골 오한기(敖漢旗), 고륜기(庫倫旗) 부근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맥(貊)”은 과연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17년(A.D.40) 조를 보면, “가을9월 화려(華麗), 불내(不耐) 두 현 사람들이 공모하여 기병을 거느리고 (신라의)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으나 맥국(貊國)의 거수가 군사로서 곡하(曲河)의 서쪽에서 요격하였으므로 패하게 되었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貊國)과 우호를 맺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19년(A.D.42) 조를 보면, “가을8월 맥국(貊國)의 거수가 사냥을 하여 잡은 짐승을 바쳤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맥국(貊國)이 신라(新羅)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라는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에 도읍하고 천년 왕조를 이룬 나라였으므로 그 부근에 맥국(貊國)이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다.
☆ 후한서 구려 조를 보면, “구려(句麗)는 일명 맥(貊)이라고도 한다. 별종으로서 소수에 의지해 살기 때문에 소수맥(小水貊)이라 한다. 좋은 활이 생산되는데 소위 맥궁(貊弓)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소수는 소요수를 말하는 것으로서 맥족의 일부가 대요수, 소요수 부근으로 옮겨가 살았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들도 남겨졌을 것인데, 대요수는 지금의 영정하, 소요수는 규수하를 말하는 것이므로 구려는 지금의 북경 서북쪽 팔달령장성 너머 연경분지 일원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곳이 곧 고구려의 국내성(지금의 영녕고성)이었다.
위 지도는 필자가 여러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여 종합적으로 그린 것인데,
임둔(臨屯)은 원래 임둔국이 위치하고 있던 곳으로서 후일 한사군 중 임둔군이 되었으며, 진번(眞番)은 고조선(위만조선)의 동쪽에 위치했었고, 옛 진번국 땅으로서 후일 한사군 중 진번군이 되었는데, 바로 이곳이 맥(貊)의 원래 위치로 생각된다. [필자주 : 이 맥족이 환국의 중심 종족으로 보인다]
예(동예)와 맥이 바로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예와 맥 즉 예,맥이라는 기록이 역사서에 남겨질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예(濊)와 맥(貊)의 원래 위치를 찾아보면, 예는 원래는 고조선, 위만조선의 서북쪽인 지금의 내몽골 정람기 부근, 맥은 고조선, 위만조선의 동쪽인 지금의 영성, 능원 부근에 위치했었으나 후일에 이르러 예가 그 위치를 바꾸어 진한의 북쪽에 나타나므로 예가 옛 창해군 지역을 떠나 임둔국(한사군 중 임둔군) 지역으로 이동해 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 태조대왕 때에 이르자 이 예(동예)와 맥이 고구려에 복속되었으므로 태조대왕은 이 맥인(貊人)과 예인(濊人)들을 동원하여 현토군도 치고, 요동군도 칠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위 지도를 이해하는 사람은 우리의 대륙 상고사와 고대사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고, 설명도 잘 할 수 있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