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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조선(왕검조선) 왕검성(王儉城)의 서쪽에 위치했던 부여(夫餘, 扶餘)의 원래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 2021. 6. 26. 21:56

윤여동설 고조선(왕검조선) 왕검성(王儉城)의 서쪽에 위치했던 부여(夫餘, 扶餘)의 원래위치 - 최초공개

 

 

[옛 부여와 북부여의 도읍성이었을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赤城縣)]

 

                                                              [적성고루(赤城鼓樓)]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기(檀君記)를 보면,

  고조선(왕검조선)의 초기강역에 대하여,

  북쪽으로는 대황(大荒)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알유(猰貐. 필자주 : 흉노를 말한다)를 거느리고,

  남쪽으로는 해대(海岱)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창해(蒼海, 필자주 : 대해의 오기이다)에 닿았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고조선(왕검조선)의 제후국에 대하여,

  천하의 땅을 공적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

  치우씨(蚩尤氏)의 후손에게는 남서쪽의 땅을 주었는데, 들이 넓고 바다와 하늘이 푸르러 남국(藍國)이라 하였다......[필자주 : 고대의 요동 즉 지금의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서 상호 공수의 요충이었으므로 역사적으로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이 끊임없이 펼쳐진 곳이다]

  신지씨(神誌氏)의 후손에게는 북동쪽의 땅을 주니 산하가 웅장하고 풍기가 굳세어 오진국 또는 숙신(肅愼)이라 했으며.......[필자주 : 숙신, 말갈, 읍루, 물길, 여진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고시씨(高矢氏)의 후손에게는 동남쪽의 땅을 봉하니 산하가 아름답고 초목이 무성하여 청구국(靑丘國)이라 하였고.......[필자주 : 삼한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주인씨(周因氏)의 후손에게는 개마국(蓋馬國)을 주고,[필자주 : 태백산 북쪽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여수기(余守己)는 예()의 임금을 삼았다.[필자주 : 원래의 예는 고조선(왕검조선)의 서북쪽 방향에 위치한 곳으로서 지금의 내몽골 정람기, 다륜 일원을 말하는 것이다. 한 무제 때 창해군으로 명명되기도 했는데, 후일 동부여의 해부루에게 그 땅을 빼앗기고 동쪽으로 개마대산을 넘어 임둔군 땅으로 옮겨가 다시 동예를 세웠다]

   부소, 부우 그리고 막내 부여에게는 모두 서쪽 땅을 주었는데, 이들이 고구려, 진번(?, 필자주 : 진번은 왕검성의 동쪽에 위치했었다), 부여(夫餘) 등의 나라이다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당시 고조선(왕검조선)의 도읍 왕검성(王儉城)은 지금의 어디였으며, 각 나라들은 어떻게 배치되어 있었을까?

   위 그림을 보시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이 옛 고조선의 왕검성터로 밝혀졌고, 부여는 그 서쪽 방향인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일원으로서 적성(赤城)이 그 도읍으로 비정된다.[필자주 :  이 부여가 후일 북부여와 졸본부여로 나누어졌다가 졸본부여로 통합되고 다시 고구려가 된다]

   적성에 가보니 오래된 고목들이 있어 유구한 역사를 증명하고 있었고, 고루도 있었으나, 성벽은 사라지고 없었고, 그곳이 옛 부여와 북부여의 도읍이었음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냥 변경의 조그만 도시로 여길 뿐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옛날 단군왕검이 그 막내아들 부여에게 봉해주었던 영지였고, 나라의 서쪽을 방어하던 중요한 요충지였으며, 고조선 말기 해모수 천제의 북부여, 동명왕의 졸본부여가 되었다가 동이를 호령하는 대제국 고구려가 되는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위 그림을 보시면, 규원사화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규원사화 기록은 정확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