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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한반도에는 어떠한 낙랑(樂浪)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21. 11. 7. 08:30

윤여동설 한반도에는 어떠한 낙랑(樂浪)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최초주장

 

[낙랑은 지금의 산동반도 북쪽방향에 위치]

 

[낙랑은 지금의 산동반도 북쪽 방향에 위치]

 

  한반도에는 어떠한 낙랑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낙랑군도 없었고, 최숭이나 최리로 대표되는 낙랑국도 없었다.

  왜냐하면 환인의 환국, 환웅의 단국, 왕검의 조선(고조선)과 부여, , 개마, 옥저 그리고 위만조선과 삼한이 모두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발해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환단고기 단군세기 13세 단군 흘달 조를 보면, “갑오16(B.C.1782) 이해 겨울에 은나라 사람이 하나라를 정벌하니 하나라 걸왕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흘달단제께서 읍차인 말량으로 하여금 구한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돕게 하니 은나라의 탕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어명을 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하나라 걸왕이 조약을 위배하고 병사를 보내 길을 막고 약속을 깨려고 하였다.

이에 은나라 사람들과 함께 하나라 걸왕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 우량을 파견하여 견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樂浪)과 합쳐서 진격하여 관중의 빈, 기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낙랑이 아주 유서 깊은 나라였음을 알게 하고,

환단고기 북부여기 상 3세단군 고해사 조를 보면, “임신원년(B.C.169) 정월 낙랑왕(樂浪王) 최숭(崔崇)이 곡식 삼백석을 해성(海城)에 바쳤다. 이보다 앞서 최숭은 낙랑으로부터 진귀한 보물을 산처럼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서울 왕검성[즉 금마(金馬)이다. 필자주 : 목지국(또는 월지국)이라고도 한다]에 이르니 이때가 단군 해모수 병오년(B.C.195) 겨울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낙랑왕 최숭은 고조선 말기의 제후였을 것이다. 그런데 고조선을 위만에게 빼앗기자 온갖 패물을 모두 가지고 고조선의 준왕이 남하하여 도읍하고 있던 마한의 도읍 금마(金馬)로 와서 살면서 위만조선에 반대하는 세력인 북부여 해모수에게 군량을 지원했던 것으로 보이고, 후일의 낙랑왕 최리(崔理)는 이 최숭의 후손일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위만조선의 도읍이었던 조선현의 왕검성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였고, 마한의 금마(목지국 또는 월지국)는 그 남쪽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풍윤현을 말하는 것으로서 한반도가 아니다.

 

  전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네 조각으로 나누어 설치했던 초기의 전한4군 즉 한사군인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토군은 고대의 요동이었던 지금의 북경 동북쪽에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하북성 승덕시 일원이 고조선(왕검조선)의 왕검성, 최숭의 낙랑국, 낙랑군이었고, 요녕성 능원 일원이 진번국, 진번군이었으며, 내몽골 고륜기 일원이 임둔국, 임둔군이었으며, 내몽골 적봉시 일원이 옥저, 초기 현토군이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86년에 이르러 졸본부여 동명왕이 북부여를 병합하자 북부여의 해부루가 유민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이동하여 창해군 예의 땅을 빼앗아 차지하고 동부여를 세우자, 그 땅을 빼앗긴 창해군 예는 동쪽으로 개마산을 넘어 임둔군 땅으로 이동하여 다시 그 땅을 차지하고 동예를 세우게 된다.

 

이때 그 땅을 빼앗긴 옛 임둔국, 임둔군 사람들이 동예에 흡수되어 소멸했는지, 아니면 그 땅을 떠나 어디론가로 이동해 갔는지는 아직 잘 알 수 없다. 다만 필자는 혹시 아메리카 인디언의 선조 중 일부가 이 임둔 사람들이 땅을 잃고 그곳을 떠나 지금의 베링해를 건너 아메리카로 간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리고 진번군 땅에서는 옛 환인 환국의 후예들이 맥국을 세우자 전한에서는 진번군과 임둔군을 폐지하고, 그 땅의 일부인 7개현으로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하게 되고, 마한과의 갈등이 생기자 다시 낙랑군 남부에 위치한 7개현을 떼어내어 낙랑남부도위를 설치하게 된다.

  그러다가 기원전 75년에 이르자 다시 현토군 땅에서 옥저(필자주 : 북옥저, 동옥저, 남옥저가 있었다)가 독립하게 되자 옥저 땅에 설치했던 현토군을 요동군의 서북쪽, 구려의 서쪽으로 이동시키게 된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전한이 멸망하고 왕망의 신() 나라가 서자 이때 전한낙랑군 땅을 차지하고 있던 최리가 낙랑군을 바꾸어 낙랑국(樂浪國)으로 부활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게 되어 역사에 낙랑국(樂浪國)을 다시 등장시키게 되는데, 고구려 초기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는 바로 이때의 이야기가 전해진 것이다.

  그런데 서기 37년에 이르러 고구려 대무신왕이 최리의 낙랑국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빼앗아 버리게 되어 우리의 역사 강역에서 낙랑이 일시적으로 소멸하게 되었으나 그로부터 7년 후에 다시 후한의 광무제가 장수를 보내 옛 전한낙랑군 땅을 탈환하려 시도 하였으나 고구려의 방어에 막혀 결국 옛 낙랑군 전체를 탈환하지는 못하고 살수 이남에 위치했던 옛 낙랑남부도위 땅을 탈환하고는 그곳에 다시 낙랑군을 부활시키게 되는데 실제는 7개현에 불과한 땅이었다. 그리하여 필자는 이곳을 후한낙랑군이라 부른다.

 

후한서에는 낙양 동북쪽 3,600리에 요동군이 위치했고, 4,000리에 현토군이 위치했다고 기록하였는데, 고대의 요동군은 지금의 북경일원, 이동된 현토군은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낙랑이 우리의 강역에서 이어졌는데, 서진 말기의 혼란기인 313년에 이르자 고구려 미천왕이 후한 광무제 때 설치했던 낙랑군을 쳐서 없애버리게 되자 서진에서는 그 낙랑의 명칭을 완전히 없애버리지 않고, 낙랑을 갈석산(碣石山, 필자주 :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낭아산을 말하는 것이다.) 부근으로 교치하여 존속시키게 되어 서진의 태강지리지에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남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대강 알아보았듯이 한반도에는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된 적도 없고, 따라서 낙랑군이 설치된 적이 없었고, 낙랑국도 없었다.

  낙랑(樂浪)은 발해 북쪽 옛 요동군이었던 지금의 북경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었을 뿐이다.

  한반도 평양에서 발굴되었다는 낙랑봉니는 낙랑의 존재를 밝혀줄 유물이 아니라 가짜이거나 낙랑으로부터 보내온 문서를 받았던 곳이었을 뿐임을 말해주는 것이고, 점제현신사비라는 것도 가짜이거나 다른 곳으로부터 옮겨온 것이며, 낙랑의 호구를 기록했다는 낙랑목간이라는 것도 가짜이거나 낙랑과 관련 있던 누군가가 무슨 사연이 있어 그곳으로 가져갔던 목간이 무덤에 묻혔다가 발견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봉니나 비석, 목간도 한반도 평양에 낙랑이 위치했었다는 확실한 물증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 역사학계와 일부 우리 역사연구자들이 주장하는 한반도 최리낙랑국설도 착각이 만들어낸 유령 낙랑국일 뿐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한다.

  한반도에는 어디에도, 어떠한 형태의 낙랑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