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속 “백제의 동쪽에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 말갈(靺鞨)이 있다”는 온조왕의 말은 잘못된 기록 - 최초주장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조를 보면, “2년(B.C.17) 봄 정월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말갈이 우리의 북부국경에 연접하여 있으며, 그곳 사람들이 용기가 있고, 거짓이 많으니 우리는 병기를 수선하고 곡식을 저장하여 그들을 방비할 계책을 세워야 한다”하였다.
3년(B.C.16) 가을9월 말갈이 북부 국경을 침범하므로 왕이 강력한 군사를 거느리고 급격히 쳐서 그를 크게 패하게 하니 적들이 살아 돌아간 자가 열에 한 둘에 지나지 않았다.
8년(B.C.11) 봄2월 말갈적군 3천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하였다. 왕이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더니 열흘이 지나 적들이 군량이 떨어져 돌아갈 때 왕이 정예한 군사를 뽑아 대부현까지 쫓아가 단번에 싸워 이기고 적병 5백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가을7월 마수성을 구축하고 병산에 목책을 세웠더니 낙랑태수가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지난날 서로 예방을 하고 우호관계를 맺어 한 집안과 같이 생각했는데, 이제 우리의 영역에 접근하여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는 것은 혹시 우리의 땅을 차츰차츰 침식할 심사가 아닌가? 옛날 우호의 정을 변하지 않으려거든 성을 허물고 목책을 뜯어 버려 즉시 억측과 의심을 없게 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바탕 싸워서 승부를 정할 수밖에 없다”하였다. 이에 왕이 답하여 말하기를 “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은 고금의 떳떳한 일인데, 어찌 이것으로서 화친과 우호에 변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 당신이 의심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일 당신이 강한 것을 믿고 군사를 발동한다면 우리나라도 또한 그에 대응이 있을 뿐이다”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낙랑과의 사이에 화친이 끊어졌다.
10년(B.C.9) 겨울10월 말갈이 북부국경을 침략하므로 왕이 군사 2백 명을 보내 곤미천 가에서 싸우다가 우리 군사가 패하여 청목산을 의지하고 지켰는데, 왕이 몸소 정예한 기병 1백 명을 거느리고 봉현으로 나와 구원하니 적들이 이것을 보고 즉시 물러갔다.
11년B.C.8) 여름4월 낙랑이 말갈로 하여금 병산의 목책을 덮쳐 파괴하고 1백여 명을 죽이고 납치하여 갔다.
가을7월 독산과 구천 두 곳에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으로부터 오는 길을 차단하였다.
13년(B.C.6) 왕의 어머니가 죽으니 나이가 61세였다.
여름5월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강역을 침공하기 때문에 평안한 날이 적다. 더구나 요즈음 요상한 일이 자주 나타나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시어 사태가 불안하니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나가서 순행하다가 한수의 남쪽 토양이 비옥함을 보았으니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여 영구히 평안할 계책을 도모 하여야겠다”하였다.
가을7월 한산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8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리고 나라의 영역을 획정하니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웅천(熊川)까지요, 서쪽으로는 대해(大海)에 닿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까지로 하였다.
9월 성을 쌓고 궁궐을 세웠다.
14년(B.C.5) 봄 정월 도읍을 옮겼다.
2월 왕이 부락으로 순회하면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농사를 적극 장려하였다.
가을7월 한강 서북방에 성을 쌓고 그곳에 한성 백성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15년(B.C.4) 봄 정월에 새 궁실을 지었는데,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았고(儉而不陋),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華而不侈).
17년(B.C.2) 봄에 낙랑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불살랐다.
여름4월 사당을 세우고 왕의 어머니에게 제사를 지냈다.
18년(B.C.1) 겨울10월 말갈이 습격하여 오므로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에서 그들을 맞받아 싸워 추장 소모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내고, 그 나머지 적들은 전부 산채로 묻어버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전체 기록 중 “말갈”은 “맥국(貊國)”으로 고쳐 해석해야 하고, 낙랑(樂浪)은 백제의 서쪽, 서북쪽에 위치했었다
그런데 백제의 건국초기 백제의 강역과 주변국은 위 그림처럼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백제의 온조왕은 왜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고 말했던 것이며, 말갈은 어떻게 백제를 수시로 침공했던 것일까?
필자가 연구해 본 바에 의하면,
낙랑은 백제의 동쪽이 아니라 서쪽, 서북쪽에 있었고, 백제의 북쪽에는 옥저가, 동북쪽에는 맥국(옛 진번국, 진번군)이, 동쪽에는 변한과 신라가, 서남쪽에는 마한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삼국사기 백제 건국초기에 말갈이 백제를 수시로 침공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옥저 또는 맥국(貊國)에 말갈족들이 많이 섞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말갈이라 기록한 것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위치했다는 온조왕의 말은, 백제의 서쪽에 낙랑이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해야 할 것을 동쪽이라고 잘못 기록한 것이 틀림없다. 즉 "백제의 동쪽에는 (신라가 있고, 서쪽에는) 낙랑이 있으며,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고 기록해야 할 것을 중간의 (신라가 있고, 서쪽에는)을 빼먹고 잘못 기록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백제 건국초기 백제의 서쪽, 서북쪽에는 실제로 낙랑(樂浪)이 위치하고 있었고, 동북쪽에는 맥국(貊國)이, 동쪽에는 신라와 변한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수많은 역사연구자들이 이 잘못된 온조왕의 말 한마디 때문에 너무도 오랜 세월 헷갈렸던 것인데, 이제 필자가 그 잘못을 바로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