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북경요동설 74

윤여동설 - 고구려 대무신왕의 동부여 침공로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 대무신왕의 동부여 침공로 - 최초공개 [독석구에 있는 옛 장성인데, 중국에서는 명대에 쌓은 장성이라 한다. 그러나 필자는 옛날 고구려 때 북방 유목민족의 침공을 막기 위해 쌓은 장성의 흔적일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고구려 대무신왕과 동부여 대소왕의 악연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그를 보면, 유리왕 28년(A.D.9) 가을8월 동부여 대소왕이 사신을 보내어 왕을 책망하며 동부여를 상국으로 모실 것을 강요하자, 왕의 아들인 무휼(후일의 대무신왕)이 누란(累卵)을 이야기 하다. 유리왕 32년(A.D.13) 겨울11월 동부여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무휼(후일의 대무신왕)이 군사를 숨겨 놓았다가 동부여 군사들이 학반령에 이르자 급습하여 전멸시킨다. 대무신왕 3..

카테고리 없음 2015.03.22

윤여동설 -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 주류성(周留城)과 임존성(任存城)의 위치 찾기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 주류성(周留城)과 임존성(任存城)의 위치 찾기 - 최초공개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성이었던 주류성과 임존성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던 성일까?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조를 보면, “무왕의 조카 복신이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때에 중 도침과 함께 주류성(周留城)에 웅거하며 반하였다. 옛 왕의 아들로서 왜국에 볼모로 갔던 부여풍을 맞아들여 왕으로 삼으니 서북부에서 모두 호응하매 군사를 이끌고 사비 도성에 있는 유인원을 포위하였다. 당나라에서 조서를 내려 유인궤로서 검교대방주자사를 삼아 왕문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군사를 적당하게 발동시켜 유인원을 구원하게 하니........(중략).........인궤가 군사를 엄숙하게 통제하여 싸우면서 전진하여 오므로 ..

카테고리 없음 2014.10.04

윤여동설 - 고대 요동(遼東)을 중심으로 찾아보는 우리 삼국의 원래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대 요동(遼東)을 중심으로 찾아보는 우리 삼국의 원래 위치 - 최초주장     “요동(遼東)”은 “요수(遼水)의 동쪽”이라는 뜻이다.    요동은 우리 고대 역사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요동의 위치를 정확히 모르면 우리의 역사강역을 찾아낼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요동(遼東)”은 우리의 역사강역을 찾아내는 비밀의 열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우리는 지금 한반도 북쪽 요동반도 부근을 요동이라 하며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면서 왔던 곳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이곳은 명· 청시기에 지명을 옮겨 놓은 곳이지 고대의 요동은 아니다. 따라서 지금의 요하도 고대의 요수가 아니고, 요하하류는 고대의 요택이 아니다. 지금의 요동반도는 고대의 왜국이었다..

카테고리 없음 2014.07.20

윤여동설 - 고지도 기주협우갈석도(冀州夾右碣石圖)가 알려주는 춘추전국시대 연5군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지도 기주협우갈석도(冀州夾右碣石圖)가 알려주는 춘추전국시대 연5군의 위치 - 최초공개  [위 기주협우갈석도(冀州夾右碣石圖)에는 어양군, 우북평군, 상곡군의 위치가 잘못 그려져 있다. 왜냐하면 후한서에 어양군은 낙양동북2000리, 우북평군은 낙양동북 2300리, 상곡군은 낙양동북 3200리에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제75 고구려 조를 보면,  “건무 25년(A.D.49) 봄 구려가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약탈하였는데, 요동태수 제융[祭肜 : 삼국사기에는 蔡彤(채동)으로 되어 있다]이 은의와 신의로 대하니 모두 요새밖으로 철수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구려(고구려)가 후한을 침공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때는 고..

카테고리 없음 2013.06.22

윤여동설 - 우북평군 백랑현(白狼縣)에서 발원하는 백랑수(白狼水)와 요수(遼水) 상류의 백랑수(白浪水)는 서로 다른 강이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우북평군 백랑현(白狼縣)에서 발원하는 백랑수(白狼水)와 요수(遼水) 상류의 백랑수(白浪水)는 서로 다른 강이다 - 최초주장 전한서 권28하 지리지 제8하 우북평군(右北平郡) 백랑현 조를 보면, “白狼 莽曰伏狄 師古曰 有白狼山故以名縣(백랑현을 왕망은 복적이라 하였다. 안사고는 백랑산이 있어 현의 이름으로 삼게 되었다고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우북평군 백랑현에 백랑산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도 우북평군이 어디를 말하는지 정확히 밝힌 사람이 없었고, 따라서 우북평군 백랑현의 위치도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지 알 수 없었는데, 드디어 우북평군의 정확한 위치를 찾은 듯한데, 우북평군은 지금의 하북성 성도인 석가장시 북쪽부근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과 전..

카테고리 없음 2013.03.31

윤여동설 - 광개토태왕의 정복지 비려 염수와 개선로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광개토태왕의 정복지 비려 염수와 개선로 - 최초주장 호태왕 비문 영락 5년(A.D.395) 을미년 조를 보면, “영락 5년 을미년에 왕이 비려(碑麗)가 붙잡아간 사람들을 돌려보내지 않으므로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3개 부(部) 6, 7백영(營)을 격파하고 셀 수 없을 만큼의 소, 말, 양떼를 노획하고 개선하였다. 양평(襄平) 길을 지나 동쪽으로 ○○성, 역성(力城), 북풍(北豐)을 거쳐 왕이 사냥을 준비시켜 국경도 구경하고 사냥도 즐기면서 돌아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여러 지명이 언급되고 있다. 비려(碑麗), 부산(富山), 부산(負山), 염수(鹽水), 양평(襄平), 역성(力城), 북풍(北豐) 등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카테고리 없음 2012.01.13

윤여동설 - 고려는 “철령(鐵嶺)” 때문에 망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려는 “철령(鐵嶺)” 때문에 망했다 - 최초주장       고려가 “철령(鐵嶺)” 때문에 망했다고?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      명사 조선전 홍무19년(A.D.1386) 12월 조를 보면,  “(명 태조 주원장이) 호부에 명하여 고려왕에게 말하기를   “철령 북쪽, 동쪽, 서쪽의 땅은 옛날부터 개원(開元:원나라 때의 개원로를 말함)에 속하였으니 요동(遼東)에서 통치하도록 하고, 철령(鐵嶺) 이남은 옛날부터 고려에 속하였으니 고려에서 통치하도록 하시오. 그리하여 서로 국경을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하였다.[필자주 : 이는 관북, 관서지역을 명나라가 차지하겠다는 말이다]   그러자 고려에서는 홍무21년(A.D.1388) 4월에 표문을 보내 철령 이북 공험진(필자주 : 고..

카테고리 없음 2011.11.11

윤여동설 - 주몽이 동부여에서 졸본(홀본)으로 간 남하로 찾기

윤여동설 - 주몽이 동부여에서 졸본(홀본)으로 간 남하로 찾기 [지금 중국에서는 원 상도유지(원 상도성터)라 하고 있는데 이곳은 옛 동부여의 도읍 부여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고구려 건국시조 주몽은 22세 때에 동부여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자 그곳에서 남쪽으로 도망쳐 엄호수(호태왕비문에는 엄리대수라고 하였다)를 건너 졸본(홀본)으로 갔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아들이 없던 졸본부여 왕의 둘째공주와 혼인을 하였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그후 주몽이 부여(동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 건소 2년 봄2월에 남쪽으로 도망쳐 졸본에 이르렀다”고 하였고, 위서 고구려전에는 “주몽은 오인, 오위 등 두 사람과 함께 부여(동부여)를 떠나 동남쪽으로 도망하였다”라고 하였다. 두 기록이 주몽이 동부여에서 도망친 방향을..

카테고리 없음 2011.06.17

윤여동설 - 고구려 졸본, 국내성과 작위 속 요동군개국공의 의미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 졸본, 국내성과 고구려 왕들에게 주어진 작위 속 “요동군개국공”의 의미 - 최초주장 고구려 왕들에게 주어진 작위를 보면 한결같이 “요동군개국공”이란 문구가 들어가 있다. 북위에서 장수왕에게 보낸 작위는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이었고, 문자왕에게 보낸 작위는 “사지절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이었으며, 안장왕에게 보낸 작위는 “안동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이었으며, 안원왕에게 보낸 작위는 “사지절 산기상시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이었으며, 북제에서 양원왕에게 보낸 작위는 “사지절 시중 표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이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고구려 왕들에게 주어진 작위에는 대개 “..

카테고리 없음 2011.01.12

윤여동설 - 당 태종 고구려 침공시의 주둔지 마수산(馬首山)을 찾았다

윤여동설 - 당 태종 고구려 침공시의 주둔지 마수산(馬首山 : 말머리산)을 찾았다 [마수산으로 비정되는 곳으로서 말이 구유에 입를 넣고 먹이를 먹고 있는 것 같다. 하필 그곳에 도로가 나고 건물이 지어져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없어 안타깝다] 서기 645년 당 태종은 고구려 침공을 하기 위..

카테고리 없음 2010.10.11

윤여동설 - "송막(松漠)"의 위치를 밝힌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송막(松漠)”의 위치를 밝힌다 - 최초공개        역사 연구를 하다보면 “송막(松漠)” 또는 “송막지간(松漠之間)”이라는 지명이 자주 언급된다.  특히 거란의 역사를 보면 어김없이 “송막지간(松漠之間)”이 언급되고, 고구려가 멸망한 직후인 서기 696년에 거란인 송막도독 이진충과 귀성주자사 손만영이 영주도독 조문홰를 죽이고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한 기록도 보인다.   또 남송의 홍호가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휘종과 흠종의 송환을 위해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어 냉산(冷山)이라는 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돌아와서 송막기문(松漠記聞)이라는 견문록을 써 송막이라는 지명이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는데, 그 송막 또는 송막지간이라는 곳이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카테고리 없음 2010.07.05

윤여동설 - 환도성(丸都城)과 안시성(安市城)은 같은 곳이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환도성(丸都城)과 안시성(安市城)은 같은 곳이다 - 최초주장 [학자들이 환도산성으로 비정하고 있는 집안 부근의 산성자산성 환도산성 표지석과 성벽인데 사실 이곳은 환도성이 아니다] 삼국유사 왕력 고구려 16대 국원왕(고국원왕) 조를 보면, “임인년(A.D.342) 8월 안시성으로 도읍을 옮기니 이것이 환도성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흥법 순도조려 조에도, “상고해보면 고구려의 도읍은 안시성이며, 이곳을 혹은 안정홀(安丁忽 , 필자주 : 安寸忽의 오기인가?)이라고도 하는데 요수 북쪽에 있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우리를 매우 헷갈리게 한다. 왜냐하면 환도성은 서기 198년 고구려 산상왕 2년 2월에 처음으로 쌓았다고 하고, 서기 209년 산상왕 13년 10월에 국내성(국내위나암)으로부터 옮..

카테고리 없음 2010.05.30

윤여동설 - 고구려 안시성(安市城)을 찾았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 안시성(安市城)을 찾았다 - 최초주장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안도 용강현(龍岡縣) 건치연혁 조를 보면, “고황룡국(古黃龍國)으로서 고구려가 병합하였고, 고려에서는 황룡성(군악이라고도 했다)이라 하였다. 후에 지금 이름(용강)으로 고치고 현으로 만들었는데, 본조(조선)에서는 그대로 따랐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평안도 용강이 옛날에는 황룡국이었음을 알 수 있고, 성곽 조를 보면, “안시성(安市城)은 오석산(烏石山)에 있는데, 현의 치소와는 5리 떨어져 있으며, 험하고 견고하기가 비할 데가 없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만2천5백80척이며 안에는 샘 열 개가 있는데 합쳐 흐르고 군창이 있다. 세상에서 이 성을 당 태종이 친히 치려하였으나 함락 시키지 못하였다고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

카테고리 없음 2010.03.08

윤여동설 - 당 태종이 고생하며 건넌 "요택(요동늪)"을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당 태종이 고생하며 건넌 “요택(요동늪)”을 찾았다 - 최초공개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와 철군할 때 고생 하며 건넜다고 전해지는 요택(요동늪)은 과연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요택이 지금의 요하 하류의 저습지를 말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엉터리 중의 엉터리 주장이다. 왜냐하면 고대의 요수는 지금의 요하를 말하는게 아니라 북경 서쪽을 흐르는 영정하이었고, 북경 부근이 옛 요동군이었기 때문이다. 서기 645년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 기록을 보면, 이때 당 태종은 정주(定州)에서 출발하여 요동을 향하여 가다가 (필자주 : 이때 갈석산에도 올랐다고 한다) 요택(요동늪)을 통과하고, 요수(遼水)를 건너 요동성에 도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학자들은 이러한 기록을..

카테고리 없음 2010.03.01

윤여동설 - 부여의 황금, 섭라의 백옥 보물찾기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부여의 황금, 섭라의 백옥 보물찾기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문자왕 13년(A.D.504) 조를 보면,  "여름 4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더니 위나라 세종이 우리 사신 예실불을 동당에서 접견했는데, 예실불이 나아가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누대에 걸쳐 온 정성을 다하여 토산물을 보내는 조공을 빠뜨리지 않았으나 다만 황금(黃金)은 부여에서 나오고, 가(珂: 백옥)는 섭라에서 나오는 것인데, 부여는 물길에게 빼앗겼고, 섭라는 백제가 병합해버렸으므로 금과 옥이 왕의 창고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실로 두 도적 때문입니다' 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위서 고구려전에도,   "정시(A.D.504-507) 중에 세종이 동당에서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을 인견하니 예실불이 나아가 말하..

카테고리 없음 2008.12.24

윤여동설 - 우리 고대사의 의문을 밝혀 줄 윤여동의 난하중심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우리 고대사의 의문을 밝혀 줄 윤여동의 난하중심설 - 최초주장 우리 고대사가 실제 이루어진 곳이 어디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모범답안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우리 고대 역사의 현장에 관한 한 아직 정설이 없고 가설만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가설이란 아직 검증되지 않은 개인의 의견이라 정의할 수 있으므로 우리 고대사가 이루어진 역사의 현장은 아직 정확히 찾지 못한 상태라 할 수 있다. 지금 우리 고대사의 현장이 과연 어디인가라는 질문에는 현격하게 다른 상반된 두 주장이 존재한다. 첫째는 한반도를 우리 역사의 중심지로 보고 해석하는 한반도중심설이 있고, 둘째는 발해 서북쪽 중국 하북성 난하를 중심으로 하는 그 부근 지역을 우리 고대사의 중심 강역으로 보는 난하중심설(윤여동설)이 있다. 한반..

카테고리 없음 2008.12.19

윤여동설 - 위만조선의 도읍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위만조선의 도읍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 - 최초공개 원봉 2년(B.C.109) 한나라는 섭하를 보내어 (조선의) 우거를 회유하였으나 끝까지 수긍하지 않고, 조서를 받들지 않았다. 섭하는 돌아올 때 국경인 패수(필자 주 : 이때 한나라와 위만조선의 국경이 패수일 수는 없고 살수이어야 맞다. 만약 패수일 경우 패수 동쪽에 바로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이 위치했었다는 말이 된다. 사실이 이러했다면 위만조선은 도읍을 동쪽으로 멀리 옮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인데, 위만조선은 멸망할 때까지 왕검성에 도읍하고 있었다)에 이르자 사람을 시켜 전송나온 조선의 비왕장을 죽이고 즉시 강을 건너 요새로 돌아와서 천자에게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하였다. 천자는 그것을 잘한 것으로 여겨 나..

카테고리 없음 2008.12.05

윤여동설 - 위만조선은 중국 하북성 난하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나라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위만조선은 중국 하북성 난하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나라 - 최초주장 우리는 싫든 좋든 위만조선의 역사를 알아야만 한다. 그것은 위만조선의 역사가 우리 역사의 한 장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고, 특히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되었기 때문에, 위만조선의과 한사군을 빼버리고는 우리 고대사 역사의 현장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위만조선이 과연 어디에 위치했던 나라였는지, 한사군이 어디에 설치되었었는지 지금까지도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으니 매우 난감한 일이다. 역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역사의 현장이 어디였는지를 찾는 일인데, 고조선, 위만조선으로 이어진 그 역사의 현장이 어디인지를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의 역사연구는 시작부터 장벽에 가로막혀 있는..

카테고리 없음 2008.12.01

윤여동설 - 한국,중국,일본이 역사를 거짓말로 해석하는 이유(1) - 한국편

한국·중국·일본이 역사를 거짓말로 해석하는 이유(1) - 한국편 고대 역사를 착각하고 옛 땅이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르고 역사강역을 잃어버리고 있는데도 그것도 모르는 바보 같은 한국, 청나라 때의 강역을 고착화시켜 역사강역을 최대한 넓히려고 안달하는 음흉한 중국, 천황의 정통성 때문에 자신들의 대륙역사 강역을 주장하지 못하고 진퇴양난에 빠진 일본. 지금 이 세 나라는 고대 역사의 해석을 모두 거짓말로 일관하고 있는데, 중국이나 일본은 그들이 목적하는 바가 있으나 한국은 아무 이득도, 명분도 없는 일에 멋도 모르고 덩달아 춤을 추고 있고, 옛 강역을 스스로 잃어버리고 있으니 정말 바보 같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고대 역사를 착각하고 있는 바보 같은 한국 우리 역사의 상고시대로부터 고대 역사의 중심지는 한반..

카테고리 없음 2008.10.27